
코리아전은 미국의 침략적대외정책의 직접적결과였다. 2차세계대전후 미국은 세계제패를 대외정책의 총적방향으로 규정하고,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역량의 장성을 가로막으며 <분열>·<소멸>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공세로 넘어갔다. 코리아반도에 38°선이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트루먼대통령이 민주진영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김일성수상은 새로운 싸움을 예견했다. 미국에게 조선은 동북아패권을 틀어쥐기 위한 중요전략적거점이었다. 1949.1.28 극비문서인 미국무부정보조사국보고서4849호에는 <조선이차지하고있는동북아에있어서의지리적위치로말미암아조선과그주민들을좌우하는것이…미국의지위를상당히강화하는것으로될것>이라고 썼다. 6.27 주<한>미군철수완료3일전 미는 조선이 남침하는경우 미군이 유엔군의 일환으로 참전할것이란 내용의 극비문서를 작성했다. 7월 애치슨미국무장관은 이승만<특사>와 <10만명의상비병,10만명의전투경찰>을 포함한 40만명의 무력을 갖출데 대해 모의했다. 이승만의 외교담당고문이자 미CIA요원인 올리버는 10월 이승만에게 <군사적으로미국의지원을받기위한방안은세계인들이코리아반도전쟁이조선군의남침에의한것으로생각할수있도록은밀한방식으로남침을부추기는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달 유엔총회4차회의에서는 <코리아에서의군사분쟁>을 <감시>한다는 미명하에 전쟁도발의 진상을 가리는 3차<유엔코리아위원단>이 조작됐다. 12.30 미백악관국가안보회의(NSC)는 코리아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대아시아정책<NSC-48>을 채택했고 1950.1 트루먼과 애치슨에 의해 발표됐다. 조선은 이를 기만책으로 봤다. 조선은 1949 2617회, 1950 1147회의 대조선무장도발사건이 일어났다고 밝힌다. 미군사고문단단장 로버츠는 1949.10 <한>육군본부사단장회의에서 <무수한공격이,나의결정에의해시작된것만은사실이다.그러나앞으로는더많을것>이라고 언급했다. 1950.4 극비문건<NSC-68>에는 전쟁이 일어나는경우 미국과 추종국가군대까지 투입한다는것을 명시했다. 6월 덜레스미국무부고문은 38°선일대를 현지시찰하며 <한국>군의 배치와 무기, 전투기술기재의 동원준비상태를 검열하고 이미 조작된 <북벌군사전략계획>을 검토했다. 6.18 이승만에게 전쟁개시지령을 주면서 <북에서먼저침입했다는역선전과동시에북에대하여공격을개시…이동안에미국은북이남을공격했다고제소해유엔으로하여금그이름으로육해공군을동원하지않을수없게>한다고 말했다. 6.19 국회개원식에서 덜레스는 <공산주의와의타협이나양보를거부해야한다>면서 유사시 미군사개입을 재천명했고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사멸>하게끔 <열전>을 하겠다고 맹약했다. 서울을 떠나며 이승만에게 남긴 편지에서는 벌어질 전쟁을 두고 <위대한연극>이라고 명명했다. 이날 미국방부는 미육군부의 코리아반도전쟁시나리오<SL-17>을 승인했다. 6.22 덜레스와 미극동사령관 맥아더의 장시간 전쟁밀담이 있었다. <1950.6.25새벽10여만명의괴뢰군대가38°선전역에서불의의무력침공을개시,모험적인<전격전>으로공화국북반부를단숨에삼키려고시도했다>고 조선은 기록한다. 김일성수상은 <전국에전쟁상태를선포하며모든경비대들과인민군부대들은즉시적이며동시적인반공격작전으로넘어가야하겠습니다>라고 지시했고 6.26 <모든힘을전쟁의승리를위하여>방송연설에서 <이승만매국역도가일으킨내란을반대해우리가진행하는전쟁은조국의통일독립과자유와민주주의를위한정의의전쟁>·<승리는반드시우리인민의편에있을것>이라고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