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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민주당대변인실 친일〈견찰〉백서발표

13일 민중민주당(민중당) 대변인실에서 친일<견찰>백서를 발표했다.

민중민주당은 <1896 일본헌병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경찰업무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1904 일제에 의한 고문경찰제도가 수립됐다. 1910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이후 헌병경찰제를 도입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체제가 강화됐다.>며 <친일세력은 미군정하에서 친미세력으로 돼 일제치하때보다 더 높은 직위를 차지했다.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남은 독도분쟁화·역사교과서논쟁·<일본해>표기논란·2019일본경제보복조치 등의 대립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2020.6 친일친미극우무리가 일본군성노예제 피해할머니들의 수요집회를 폄훼하고 소녀상을 침탈하려는 망동까지 벌이고 있다>며 <할머니들의 역사를 바로세우고자 한 숭고한 투쟁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분기해 나선 반일행동청년학생들의 활동에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소환장을 남발하는 것은 경찰의 친일친극우본성에 기인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친일경찰의 역사적 근원을 찾아 본질을 폭로하고 지난 75년간 우리민중들이 친일친극우<견찰>들에게 당한 공권력의 만행을 밝혀 경찰악폐를 청산하고 진정한 경찰개혁을 이뤄야 할 역사적 전환기에 있다>고 전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친일<견찰>백서

친일친미친파쇼친극우경찰백서2

우리민족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그들이 우리민족에게 저지른 역사적 죄악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찰제도는 식민지지배체제에서 중요한 요소다. 일제는 단계적으로 경찰제도를 식민지지배체제로 편입시켰다.

1896 일본헌병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경찰업무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1904 일제에 의한 고문경찰제도가 수립됐다. 1910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이후 헌병경찰제를 도입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체제가 강화됐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다. 조국이 분단되고 남에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친일경찰을 청산할 중요한 시기를 놓쳤다.

미군정은 일본군대를 무장해제하고 일제식민지통치체제를 청산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우리땅에 들어왔지만 오히려 이를 악용해 미군정의 지배체제를 마련했다. 이는 미국이 일제와 같은 지배체제를 남에 세우고자했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친일세력은 미군정하에서 친미세력으로 돼 일제치하때보다 더 높은 직위를 차지했다. 민중들의 생활속에 깊이 결합해있던만큼 경찰분야에서 이는 더 두드러졌으며 민중들의 직접적인 고통도 컸다.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남은 지금껏 일본의 군국주의적 <독도분쟁화>에 휘둘리고 역사교과서논쟁에 <일본해>표기논란, 2019 강제징용자들의 배상청구권대법원판결에 대한 일본경제보복조치까지 외교적 대립을 반복하고 있다. 2020.6 친일친미극우무리가 일본군성노예제 피해할머니들의 수요집회를 폄훼하고 소녀상을 침탈하려는 망동까지 벌이고 있다.

개혁정권하의 경찰마저도 이들을 비호하고 있다는데에 사안의 심각성이 있다.

할머니들의 역사를 바로세우고자 한 숭고한 투쟁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분기해 나선 반일행동청년학생들의 활동에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소환장을 남발하는 것은 경찰의 친일친극우본성에 기인한다. 친일극우무리와 그들을 비호하는 친일경찰을 청산하지 않은 채 일본에 과거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힘을 가질 수 없다.

친일경찰의 역사적 근원을 찾아 본질을 폭로하고 지난 75년간 우리민중들이 친일친극우<견찰>들에게 당한 공권력의 만행을 밝혀 경찰악폐를 청산하고 진정한 경찰개혁을 이뤄야 할 역사적 전환기에 있다.

 

일제강점기,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일제순사

일제강점기의 경찰은 조선총독부총독직속기관으로 중앙에는 경무총감부를, 지방에는 경무부를 뒀다. 헌병경찰을 총괄하는 중앙의 경무총감부와 지방의 경무부 등의 경찰기구는 총독의 직속기관으로 설치됐다. 조선통감에서 초대총독이 된 데라우치마사타케는 이같은 권력을 바탕으로 일종의 계엄령체제인 <무단통치(武斷統治)>라는 식민지폭압체제를 확립했다. 식민지공포정치는 헌병경찰제와 함께 시작됐다.(한겨레, 2019.1.2)

헌병경찰의 불법체포·구금·투옥행위를 합법화하기 위해 통감부재판소령을 조선총독부재판소령으로 바꾼 일제는 조선감옥령을 공포해 전국24개소에 감옥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혐의자를 임의로 투옥했다.(한겨레, 2019.1.2)

일제는 1911년 <특별고등경찰제>를 도입해 1945년 패전 때까지 운영했다. 3.1운동후에는 전국의 경찰서에 <고등경찰계>를 뒀다. <특고> 또는 <고등경찰>이라 불린 이들은 조선인독립운동가를 색출하고 고문했다. 조선의 언론·출판물을 통제하고 사상·정치활동을 사찰했다. 윤동주와 친구 송몽규도 일본유학시절 <특고>에게 붙잡혀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오마이뉴스, 2020.1.23)

1912년 데라우치총독은 조선태형령과 헌병경찰제를 <법제화>했다. 바둑판에 바둑알 깔아놓듯이 전국에 헌병경찰기관을 설치했다. 유사군인인 헌병경찰은 항상 칼을 차고 다니며 민중들을 위협했다. 경찰은 <조센징은 때려서 다스리라>는 데라우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KBS, 2019.2.17)

식민지병탄후 일제는 불과 1년동안 헌병경찰인원을 2배이상 증원해 총1만4000여명에 이르렀다. 헌병경찰의 권한으로 <급속한 처분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재판절차 없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할 수 있는 사법권까지 가졌다. 이런 막강한 권한은 무엇보다도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 항일독립운동을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주어졌다. 헌병경찰에게 생사여탈권까지 부여돼 공포의 대상이 됐다.(시선뉴스, 2017.7.16)

경찰은 범죄즉결례·태형제 등을 통해 악독하고 잔인하게 민중들을 탄압했다. 확인된 즉결처분건수만 1911년 1만8100여건, 1912년 2만1400여건, 1918년 8만2100여건에 달한다.(우리역사넷) 일제강점기 경찰에게 주어지는 최고훈장인 경찰공로기장을 받은 친일경찰 김덕기는 독립운동가들을 총으로 사살하거나 고문으로 죽였던 악질적인 친일주구다. 김덕기가 체포한 독립운동가들은 안창호·오동진·조봉암·홍증식 등 1000여명이 넘는다.(레디앙, 2020.2.17) 친일경찰중에는 손발을 모두 묶어 천장에 매달아놓는 <비행기고문>으로 악명 높은 서영출도 있다.(경남도민일보, 2015.6.14)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헌병과 보조원다수를 경찰조직(보통경찰제)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1부‧군1경찰서, 1면1주재소제도를 실시했다. 보통경찰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식민지조선의 경찰은 본래의 임무인 치안유지이외에 검사권·민사·조정권·행정사무원조·즉결처분·제한된입법권등을 가졌다. 한편으로 이를 위한 경찰력을 대폭 증원했다. 식민지조선은 <경찰국가>로 전락했다.(뉴스프리존, 2020.2.17)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유독 식민지경찰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경찰들은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사까지 감시·탄압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민중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순사는 순경, 즉 초급경찰이다. 검은 양복을 입고 허리에는 <하이도>라는 칼을 차고 다녔다. 걸어다닐 때마다 <철커덕>소리가 나서 이 소리만 들어도 <순사 온다>며 긴장했다. 조선인은 이들에게 누구나 죄인취급을 당했으며 순사는 무조건 반말을 했다. <오이 꼬라(야, 임마)>, 이것이 조선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으며 항의했다가는 <칙쇼! 조센진노 쿠세니(닥쳐! 조선인 주제에)>라고 면박을 받거나 <후데이 센징(사상이 불량한 조선인)>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본래 울거나 떼를 쓰는 아이들을 달랠 때 하던 <호랑이와 곶감>이야기는 <순사 온다>로 대체됐다.(위클리서울, 2016.3.6)

특히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가장 악랄하게 탄압한 일제공권력의 대명사였다. 종로경찰서에 끌려가면 송장이 아니면 산송장으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공익뉴스, 2019.8.7) 당시 종로경찰서에는 80여명의 형사가 있었다. 그중 일제침략세력과 친일경찰이 사상범이라 주장했던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잡기 위한 고등계형사가 40명이었다.(밀양방송, 2005.12.29) 1943.9 조선인 최초로 종로경찰서장에 임명된 윤종화는 취임사에서 <종로가 병참기지반도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매일신보, 1943.10.1)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열사의 의거가 민중의 원한을 대변한다. 열사는 1923.1.12 일제탄압의 본산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총격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다.(미디어오늘, 2015.8.8)

경찰은 해방75돌을 맞이했으나 여전히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전북경찰국장출신 친일인사는 김응조초대전북경찰국장을 비롯해 3대한종건·4대조병계·5대김상봉·9대김응권·15대김종원·16대신상묵·20대이정용 등 8명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친일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자체적인 판단을 거쳐 복원했다>며 버젓이 이들을 홈페이지에 게시하며 친일행각을 미화하고 있다.(전북금강일보, 2019.12.8)

 

미군정, 친일<견찰>의 재탄생

일제에 협력하며 독립투사들을 탄압했던 친일경찰들이 미군정의 경찰로 재탄생했다.(KBS, 2020.2.17) 해방과 함께 최우선으로 청산돼야 할 친일경찰이 미군정에 의해 부활했다. 1945.9.7 맥아더포고령은 친일파의 재산과 직위를 유지·보호했고 미군정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관료와 경찰들까지 통치에 적극 활용했다.(오마이뉴스, 2019.3.4) 해방후 미군정기 경찰은 정부수립보다 훨씬 빨리 출범했다. 1945.10.21 출범한 경찰은 일제경찰조직과 인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미군정은 경감급이상 100%, 경위급 75%를 일제경찰출신으로 채웠다.(오마이뉴스, 2020.1.23) 1946.11 당시 친일경찰의 비율은 치안감100%, 청장63%, 국장80%, 총경83%, 경감75%, 경위83%로 고위경찰의 82%에 이를 정도였다.(KBS, 2020.2.18) 해방직후 1946년기준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일본경찰출신이었다. 나머지 1명은 군수출신이었다.(서울신문, 2019.3.1) 경찰은 일제강점기엔 일제의 앞잡이, 미군정아래서는 미군의 주구였다.(통일뉴스, 2016.5.24.)

대표적인 친일경찰 최연은 혜산진경찰서고등계형사로 재직할 당시 독립투사수백명을 잡아가둔 공으로 <경찰관리공로기장>을 받았다. 해방직후 서울종로경찰서장으로 임명된 후 경기도경찰부장 스털링대위, 전경찰부장 오카와 함께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임명작업을 주도했다. 또 이익흥·노덕술·이하영·윤우경·김태일등 수십명에 달하는 친일경찰간부를 군정경찰로 입문시켰다.(국민일보, 1992.7.30)

친일경찰 하판락은 1938년 부산수상경찰서순사부장의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고문귀신>으로 악명을 떨쳤다. 1943년 독립투사 7~8명중 3명이 고문을 받다 절명했다. 잔혹한 고문과 친일행각으로 하판락은 빠르게 승진했다. 친일경찰 하판락은 해방후 <오히려> 더 출세했다. 해방후에도 하판락은 미군정의 <일제관리재등용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고 일본인적산재산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다. 1946.6 경남경찰청수사과차석으로 승진됐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을 가지고 사업가로 변신해 부를 축적했고 2003.9 향년 92세로 장수했다.(오마이뉴스, 2013.3.1)

친일경찰들은 정치경찰로 정치인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다.(경향신문, 2018.6.10) 대표적인 사례가 친일경찰 노덕술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체포였다. 독립투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을만큼 악명 높았던 노덕술은 1946년 수도경찰청수사과장으로 등용됐다.(뉴스타파, 2016.8.6) 해방후 김원봉은 <친일파청산>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체포돼 <조국해방을 위해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고 통탄했다.(경향신문, 2019.4.30) 일제강점기 <고문왕>으로 불리고 해방후에도 친일경찰의 대명사였던 노덕술은 경찰이 된 지 3년만에 부장으로 승진했다.(경상일보, 2014.11.16)

당시 미국의 가장 큰 적이었던 일본제국의 부역자들을 다시 기용한 미군정의 속내를 사람들은 미처 다 알지 못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람들은 또다시 경찰의 강압적인 쌀공출에 시달리며 기아에 허덕여야 했다. 친일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친미경찰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고 1946.10 대구에서 시작된 민중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친일경찰이자 친미경찰들은 실탄을 장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KBS, 2020.2.17) (오마이뉴스, 2020.10.16)

1947년 반민특위는 당시 경찰소속 최연(전수도청부청장), 이구범(전수도청부청장), 최운하(서울시경사찰과장), 이성엽(김제경찰서장), 이안순(전북도경사찰과장), 서영출(경주경찰서장), 조응선(종로경찰서사찰주임)을 검거했다. 경찰조직내 친일파들은 거세게 반발했다.(<반민특위특별조사부조사기록>해제, 민족문제연구소) 종로경찰서장출신 최운하는 친일경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극우세력을 동원해 특위활동반대데모를 선동했다.(국민일보, 1992.7.30) 1949년 최운하가 체포되자 6.6 서울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명의 사복경찰이 반민특위사무실을 급습했다.(뉴스타파, 2015.8.6) 이 사건은 이승만의 지시와 시경국장 김태선의 지휘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서울앤, 2019.4.18)

1949.6.6 반민특위습격사건은 이승만의 지시로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사무실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서울시경 김태선국장등이 기획해 차출된 경찰관 80여명이 1949.6.6 오전8시30분 반미특위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특위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친일파관련 조사서류를 빼앗았다. 경찰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당시 현직경찰의 75%가 넘는 인원이 친일세력이었다. 사회각분야의 친일파가 체포됐지만 그중에서도 친일경찰이 가장 많이 체포됐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경찰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최운하가 특위에 체포되자 반민특위사무실습격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한겨레, 2018.1.10)

김판산은 1933년 조선총독부 경기도순사로 임명되어 해방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53.12 그는 6·25전쟁 국난극복의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표창장을 수여한 사람은 윤기병이었다. 윤기병은 친일경찰로 1949.6.6 중부경찰서장으로서 반민특위본부 습격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KBS, 2020.6.4)

1948년말에는 노덕술과 친일경찰들이 친일자본가인 박흥식의 자금으로 청부업자 백민태를 끌어들여 반민특위요인들을 납치·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친일경찰들은 백민태에게 자금·권총·수류탄 등을 지급해 암살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지만 사주를 받은 백민태가 암살대상명단을 본 뒤 두려움을 느끼고 폭로하면서 미수에 그쳤다. 당시 친일파청산·반민특위활동과 관련해 친일세력의 반발과 회유·협박·테러는 끊이지 않았다.(뉴스타파, 2015.8.6)

결국 친일경찰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친일파청산은 무산됐다.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모두 복권됐다. 해방후 우리민족의 숙원이던 친일파숙청과 과거청산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뉴스타파, 2015.8.6)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해방후 경무국수사국장이었다. 양심적인 경찰로 신망이 두터웠던 그는 친일부패경찰청산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최능진은 오히려 파면을 당했다.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고문하던 경찰의 <정보활동>은 진보인사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최능진은 1951.2.11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당했다. 그를 재판도 없이 총살한 조직은 관동군출신 친일파 김창룡의 특무대였다.(오마이뉴스, 2020.10.15)

해방후 종로거리에 말을 타고 가던 항일투사 김명시를 향해 시민들은 <김명시장군만세>를 외쳤다. 그 항일영웅이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부평경찰서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취조에도 굳건했던 <백마탄여장군> 김명시가 스스로 목을 맸을 것으로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허나 경찰은 사건을 항일투사 김명시의 <자살>로 발표해 마무리했다. 국립경찰이 일제강점기 친일경찰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이다. 친일경찰의 소굴인 사찰과(현정보과) 경찰들은 수사와 고문을 동일시했고 고문으로 죽이고 자살로 위장해 발표했다.(한겨레온, 2019.11.17)

제주4.3항쟁의 도화선이 된 3.1사건도 친일경찰의 만행에 그 원인이 있다. 친일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발포를 했고 6명이 사망했다. 4.3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친미경찰로 탈바꿈한 친일경찰은 미군정과 함께 제주민중을 무참히 살육했다.(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0.10.27)

분단과 코리아전쟁을 거치며 친일경찰의 반공방첩활동은 더 강화됐다. 이승만정권시절 친일경찰은 불법선거를 진두지휘하며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노릇을 했다. 4.19항쟁당시 항쟁대열을 향해 발포한 것도 바로 군대가 아닌 친일경찰이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했고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183명이 숨지고 6000여명이 부상당했다.(프레시안, 2013.2.22)

 

박정희시대, 친일파쇼정권의 행동대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은 친일정권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친일본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졸속적으로 남일협정을 추진하며 굴욕적으로 체결한다. 박정희시절 군사쿠데타세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전사회를 파쇼적으로 통치했다. 정보부(중앙정보부)는 파쇼권력의 총본산이었으며 경찰은 파쇼정권의 행동대였다.

남일협정은 박정희와 기시노부스케와의 관계 등과 미일남3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5.16군사쿠데타이후 급속히 진행됐다. <1960년대에 들어 미국은 새로운 동아시아전략의 일환으로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문제를 강력히 제기하고 나왔다. 군사쿠데타를 승인해주는 대가로 비교적 말을 잘 듣는 박정희정권에 의해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시켜서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전략이었다.>(오마이뉴스, 2019.3.30)

박정희정권이 추진하는 남일회담이 공개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박정희파쇼정권은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무참히 짓밟았다. 1964.3 회담내용을 공개하고 3월타결, 4월조인, 5월비준이라는 방침을 밝히자 야당과 재야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에 돌입, 3.24 서울대생들은 <한일회담즉각중지>집회를 열어 이케다일본수상과 김종필을 상징하는 <현대판이완용>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 5.20 서울시내의 대학생연합으로 박정권이 표방한 <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거행하고 4.19민족·민주이념에 정면도전한 군사쿠데타정권의 타도투쟁을 선언했다. 경찰은 이날 시위를 난폭하게 진압해 학생100여명이 부상당하고 200여명이 연행됐다.(오마이뉴스 2019.3.30) 6.3 1만5000여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일체시위금지, 언론·출판사전검열, 무영장압수·체포, 대학휴교 등을 명령했다.(YTN, 2010.6.3)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불법적으로 수립한 박정희정권이 권력을 유지한 것은 한축으로 미일외세이고 다른 한축은 정보부로 대표되는 파쇼통치기구였다. 파쇼통치기구는 유신헌법이나 반공법등 파쇼악법으로 유지됐다. 정보부요원들은 총독부치하에서 친일파출신이 다수였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후과는 친일정권인 박정희시대에 더욱 심각했으며 정보원과 경찰의 민간인에 대한 고문수사방식도 일제시대 그대로였다. 정보부는 1961.6.10 법률제619호 <중앙정보부법>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정·공포됨으로써 창설됐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기관으로 발족된 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각부서의 정보·수사활동을 감독>하며 <국가의 타기관소속직원을 지휘·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정보부는 박정희세력이 군내부의 반혁명기도나 민간정치인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분쇄·저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됐다. 쿠데타의 2인자 김종필이 군부내 첩보부대·방첩부대·헌병대·육군본부정보국·총리직속중앙정보위요원 등 3000여명을 중심으로 정보부를 조직하면서 대통령(당시최고회의의장)직속의 최고권력기관으로 군림했다. 정보부는 미국의 CIA(중앙정보국)에서 그 명칭을 따오고 CIA교법으로 요원들을 교육시켰다. 선발된 요원들 중에는 총독부치하에서 검사·경찰·형사·밀정노릇을 했던 자들도 다수 참가했다.(오마이뉴스, 2019.3.26)

경찰대공수사권은 1961.6 창설된 정보부로 상당부분 넘어갔다. 공안당국관계자는 <당시 경찰의 핵심 대공수사인력 상당수가 중정(정보부)으로 건너갔다>며 <경찰이 중정을 큰집으로 부르는 관행이 그때 시작됐다>고 말했다.(동아닷컴, 2018.1.15) 일제강점기의 사상경찰인 <특고>형사출신으로 해방후 경찰과 특무대에서 국내정치사건을 다루면서 고문과 조작을 감행했던 문제 있는 수사관들 상당수가 그대로 왔다. 이와 같은 인적 구성은 정보부가 권력남용과 인권탄압으로 원성을 사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시크릿파일 국정원>, 김당, 2016)

박정희정권은 각종 공안사건을 조직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박정희정권은 인혁당재건위사건자들의 주검까지 빼돌렸다. 경찰은 사형집행다음날인 1975.4.10 연미사를 올리기 위해 함세웅신부가 있는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주검을 탈취했다. 녹번동삼거리에서 4시간20분동안 승강이를 벌이고 크레인까지 동원해 영구차를 강제로 끌어가 일방적으로 화장처리했다. 이를 막으려던 문정현신부는 영구차바퀴에 깔려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지금껏 장애를 겪고 있다. 서도원의 가족도 응암동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올리려 했으나 경찰에서 관을 실은 차를 고향 창녕으로 몰고갔다. 이수병의 주검은 손톱·발톱·발뒤꿈치와 등에 시커멓게 탄 자국이 남아있었고 함세웅신부가 이를 흑백사진으로 찍어 외신에 공개했다. 경찰의 주검탈취 소동은 이런 고문흔적을 감추고 장례미사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인혁당사건조작의혹>증폭과 시위를 차단·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한겨레 2011.11.14)

박정희정권시기의 고문은 일제시대 그대로였다. <…점퍼들은 알몸이 된 남자의 팔과 다리를 교차하여 묶더니 그 사이에 큰 막대기를 끼워서는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놓았다. 이른바 <통닭구이>고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고등경찰이 우리독립운동가를 붙잡으면 조직을 캐기 위해 동원했다는 비인간적 고문수법이었다. 박정희정권의 하수인들이 유신쿠데타상황에서 야당인사들에게 그대로 자행했다.>(프레시안, 2012.10.16)

경찰은 박정희정권의 노동운동탄압에도 앞장섰다. 박정희정권은 남경제를 미일의 하청경제로 만들고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무참히 짓밟았다. 특히 전태일열사의 청계피복노조는 결사적으로 투쟁했다. <노동자들은 9월8일 <결사선언>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어머니즉각석방, 폭력경찰처단, 노동탄압중지, 노동3권반환 등을 요구하면서 격렬히 투쟁했다. 9월9일 노동자200여명은 노동교실부근에 모여서 경찰의 제지를 뚫고 노동교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농성을 벌이는 과정에서 기동경찰과 혈투를 벌였다. 경찰이 교실입구까지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하다 민종덕이 3층에서 뛰어내려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신승철은 유리칼로 2번이나 배를 그어 할복을 기도했으며 박해창도 유리조각으로 팔의 동맥을 끊어 방안에는 피가 낭자했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과 임미경도 투신을 기도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경찰은 YH무역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농성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결국 이 사건은 부마민중항쟁과 10.26사건으로 이어져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의 종말로 귀결됐다. <1979년 8월 YH무역여성노동자 187명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YH무역노동자의 농성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다. … 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된 1970년대 한국노동운동은 YH무역여성노동자의 <농성>을 거쳐, 1979년 부산과 마산의 노동자<봉기>로 이어졌다.>(오마이뉴스, 2020.4.16) <8월11일 새벽2시 1000여명의 경찰이 이른바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해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21, 노조집행위원)이 사망하고 신민당의원과 당원, 취재중이던 기자 등이 경찰에 구타당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 경찰은 노조지부장 최순영 등 여공172명과 경찰의 강제연행을 제지하던 신민당당원26명을 강제로 연행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친일은 곧 친미, 감출 수 없는 친일경찰의 <근본>

해방후 미군정이 친일경찰을 재임용하면서 경찰의 <친일>성은 이후 수립된 정권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미국은 겉으로는 남정부에 대한 내정간섭을 감추기 위해 애썼고 특히 일본과의 관계는 남민중들의 민족적 요구와 크게 상충하면서 친미정권에 이를 억지로 강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 그들의 <견찰>로 역할을 했다. 알렉시스더든미국코네티컷대학교교수는 뉴욕타임스에 <동아시아내 미국의 더러운 비밀>이라는 기고문에서 <남일청구권협정은 여전히 남과 일본간 분쟁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동결시켰을뿐이다. 그것은 미국입장에 부합한 협정이었기 때문>이라며 협정체결반세기가 지나도록 이같은 입장차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미국이 당시 일본의 시각에 기대어 남코리아를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한국일보, 2019.9.24)

4.19항쟁이 일어나고 4.25 이승만은 허정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한다. 이승만은 그날까지도 퇴진할 생각이 없었고 자유당을 탈당한 뒤 방탄내각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4.25에도 경찰에 의한 사상자가 속출했다. 4.26 미국의 압력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4.27 당시 외무장관인 허정이 수석국무위원으로 대통령권한대행이 돼 과도정부를 이끌게 된다.(한겨레, 2016.11.18) 이날 바로 미국무부는 주남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허정과도정부가 일본과 관계개선을 꾀하고 미국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했다. 허정은 4.28 미대사 매카노기를 초청해 미국과 밀접하게 전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히고 이미 전날 아이젠하워미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간섭도 절대 한 적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내정간섭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충고>였다고 생각한다며 도움을 간청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정부가 반대한 <한일수교>와 관련해 미국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며 누구보다 <한일국교정상화>를 특별히 바란다고 밝히고 재일동포들이 북으로 가는 것을 일본정부가 막도록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했다. 매카노기는 (허정의) <한일관계>에 대한 언급에 고무돼 <한일국교정상화>에 실질적 진전을 꾀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왔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매카써주일미대사 역시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남의 새정부를 이용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권고했다. 국무부는 주남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미국이 남내에서 <한미관계 및 한일관계>를 통해 커다란 이득을 보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을 허정에게 명확히 전하라고 했다. 아울러 미국이 남의 내정에 간섭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극도로 신경쓸 것을 강조했다.(프레시안, 2018.4.25)

2006 노무현정권당시 미남간 전작권(전시작전통제권)환수논의를 추진하자 국방장관 등을 지낸 예비역장성 77명이 전작권환수논의 유보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내놓은 데 이어 전직경찰총수26명도 전작권환수에 반대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시국선언문에는 조흥만(18대), 이소동(19대), 박태원(20대), 정상천(26대), 정석모(28대), 최석원(29대 이상 치안국장), 박현식(1대), 김성주(3대), 손달용(4대), 염보현(5대), 유흥수(6대), 안응모(7대), 이해구(8대), 박배근(9대), 강민창(10대), 권복경(12대), 이종국(15대 이상 치안본부장), 이인섭(2대), 김효은(3대), 김화남(4대), 박일용(5대), 황용하(6대), 김광식(8대), 이무영(9대), 최기문(11대), 허준영(12대이상경찰청장) 등이 참여했다.(중앙일보 2006.9.12)

1965남일기본조약·남일청구권협정뿐아니라 2016남일군사정보보호협정도 <제2의 남일수교>라고 하며 강한 반일여론에 부딪혔다. 원래 남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2012년 이명박정부당시 일본측의 제안으로 추진돼 2012.6 서명식을 가질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위안부>합의문제와 독도영유권문제, 협상과정이 투명하지 않다는 비판 등에 따라 협정서명식을 불과 1시간 앞두고 전격 연기됐다. 이후 양국의 합의는 전면 백지화됐다. 2016.10.27 박근혜집권시기 지소미아를 다시 추진한다고 공식발표하고 11.23 전격적으로 협정을 공식체결했다. 경찰은 <한일군사협정체결중단>을 외치는 시위대를 막아나서는데도 앞장섰다.(미국의소리, 2016.12.5) 사드저지전국행동회원들이 11.22 오전 서울종로구 정부서울청사앞에서 개최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국무회의 의결 중단! 대통령 재가 반대!>집회에서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대치했다. 참가자들은 <한일군사보호협정은 미국과 일본에게는 이익이지만 우리에게는 백해무익하다>고 규탄했다.(뉴스1, 2016.11.22)

2018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들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에 2019년 7월 일본정부가 경제보복조치를 취하자 일본제품불매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남일군사정보보호협정파기여론까지 강해져 남정부가 더이상 협정을 연장하기 힘들어졌다. 협정파기일정을 연기하는 꼼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2020년 미국무부대변인실관계자는 언론인터뷰에서 남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관련 <남과 일본은 이 민감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미국은 두 나라의 친한 친구이자 동맹으로서 두 나라의 문제해결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이라며 밝혔다.(조선비즈 2020.8.6) 미국무부는 남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를 언제든지 종료할 수 있다는 남정부의 입장에 대해 <미국의 안보이익에도 매우 중요하다>며 이 문제를 남일갈등과 별개로 다룰 것을 압박했다.(이데일리, 2020.8.7)

매국적일본군성노예제문제합의가 미국의 압박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익명의 정부관계자는 <협상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이 양보하지 않아 진전이 없다>고 미국을 설득했고 미국이 다시 한국의 양보를 압박하는 악순환이었다>고 전했다. TF도 <한일관계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역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써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한국정부는 위안부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맞았다>고 분석했다.(한국일보, 2017.12.27)

이 합의의 일선에는 경찰출신의 주일대사 유흥수가 있었다. 유흥수는 2014.8 주일대사에 부임하면서 남일수교50주년인 2015년을 <새로운 한일관계 출발의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14.8.23) 유흥수는 2016년 주일대사를 사임하면서 <위안부합의까지가 내 역할>이라고 말해 그 친일적 본색을 감추지 않았다.(아시아투데이, 2016.4.6) 유흥수는 치안본부장(현경찰청장)을 역임한 경찰관료출신으로 전두환정권때 충남도지사, 대통령정무제2수석비서관 등을 지냈으며 이후에는 부산을 지역구로 12,14,15,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연합뉴스, 2014.8.23) 경남중을 졸업한 그는 재경경남중·고동창회부회장 등의 활동을 하며 경남고출신인 박근혜의 비서실장 김기춘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춘과는 서울법대졸업연도도 같고 <한일의원연맹> 활동도 함께했다.(한겨레 2014.7.22) 유흥수는 1962년 고시합격 이후 경찰요직을 두루 거친만큼 박정희나 박근혜와도 직접적인 인연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노컷뉴스, 2014.7.22) 또 유흥수는 치안본부장당시 <녹화사업>에 학생운동관련자들의 강제징집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진술이 확보돼 있는 상태다.(동아일보, 2002.3.4) 그는 2016.6 일본정부가 수여하는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욱일대수장은 일본정부가 국가와 공공에 대해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수여하는 <욱일장> 여섯종류중 가장 높은 등급이다.(노컷뉴스, 2016.6.20)

2016.7.12 오후 서울 중구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일본자위대창설62주년기념행사가 열렸다. 호텔주변에 경찰 약300명이 배치돼 항의시위를 막았다.(조선일보, 2016.7.13) 남국방부는 7.12 주남일본대사관이 개최하는 자위대창설기념행사에 남의 군인사를 파견하면서 남일간국방교류차원이라고 밝혔고(연합뉴스, 2016.7.7) 행사에는 국내인사들과 주남무관단관계자들이 초청받아 참여했으며 마크리퍼트주남미국대사 등 주남대사들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정부는 국방부에서 국장급인사를 포함해 관계자2명과 외교부에서 과장이하 실무자가 참석했다.(서울신문, 2016.7.12)

<한일의원연맹>이 10월 정기총회를 열어 새 간부단 인선을 공식화한다. 스가요시히데총리 부임 이후 남일간 대화분위기가 조성하는 가운데 연맹대표에 더불어민주당의원 김진표를, 간사장에 경찰출신의 국민의힘의원 김석기를 확정했다.(한국경제, 2020.9.28) 연맹은 1972년 설립됐고 21대국회에서 140명의 여야의원이 참여하고 있다.(노컷뉴스, 2020.10.6) 김석기는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있으면서 <용산철거참사>가 벌어진 것에 대해 경찰청장 내정자 사임을 요구받고 경찰직을 사퇴했다.(국민일보, 2011.11.8) 그는 경찰시절 도쿄에서 주재관을 지내는 등 일본에서의 근무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사퇴후 2011년 오사카총영사로 부임했다. 이후로는 19·20대총선에 연속 출마했다. 그는 일본어에도 능통하며 야당내 대표적인 일본통으로 알려졌다.(한국경제 2020.9.28) 김석기는 일본경찰대학교 본과(76기)를 졸업했으며 기타무라시게루일본내각정보실장 등 일본정계에 넓은 인맥을 확보하고 있고 이같은 전문성이 이번 인선에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매일신문, 2020.10.10)

 

친일<견찰>의 역사, 한마디로 권력의 <>

2020.7.15 만주국출신의 친일파 백선엽이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대한민국육군참모총장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진데 이어 오전11시30분 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가졌다. 앞서 오전10시부터 광복회대전충남지부·도립유공자유족회대전지부·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가 백선엽안장반대집회를 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다며 경찰420여명이 동원됐다. 안장식에는 해리해리스주남미국대사, 로버트에이브럼스주남미군사령관이 참석했다. 백선엽의 수의는 코리아전쟁당시 입었던 1944년 미군복을 입혔고 미군이 운구에 참여해 미국과의 친밀한 관계를 과시했다.

관동군출신으로 이승만시기 특무대장을 지내면서 권력에 부역해 공안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유명한 김창룡 또한 1998년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백범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은 물론, 제1공화국시절 무고한 사람들을 용공, 부역자로 몰아 탄압하고 군의 정치화에 앞장선 인물을 국립묘지에 안장한 것은 국민정서와 군정통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적하며 현충원에 안장을 반대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국립묘지법개정및반민족행위자김창룡묘이장추진시민연대가 현충원앞에서 시위를 벌여왔다. 2005.6.6 묘역내에서 김창룡의 묘이장을 촉구하는 집회가 벌어지자 경찰들이 나서 묘를 둘러싸 보호했다.

2차세계대전을 겪고 미군정이 들어선데다 1950~53년 전쟁과 1961년에는 군사쿠데타까지 경험하면서 남에서 군권력은 막강해졌다. 불안한 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권은 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창룡이었고 김창룡은 이승만의 주구가 돼 군지휘부와 갈등을 빚고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박정희시기는 군출신들이 전면에서 최고권력을 장악한 군사정권이었다. 민주화과정에서 점차 군권력은 약화되고 한편으로 검찰권력이 강력해졌다. 경찰은 그중 말단이었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경찰처우개선 등의 요구에 경찰역량강화를 모색하면서 1970년대 경찰대학설립안을 추진, 1979.12 경찰대학설립법안이 통과됐다. 1981.3 1기생을 받아 2014년 경찰대학출신의 첫경찰청장을 배출했다. 박근혜시기 경찰대학출신으로 처음 경찰청장에 임명된 강신명은 2016년 2년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으나 2019년 2016.4 20대총선에서 여당후보에 유리한 선거관련 정보를 수집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현재 보석으로 불구속재판중이다. 역시나 권력의 <개>라는 불명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경찰대출범배경에는 열악한 경찰근무환경을 개선하고 경찰역량을 개선해 경찰의 자율적인 수사권범위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찰대학출신들은 검·경수사권조정을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문재인정부는 검찰개혁을 선언하며 경찰의 숙원인 검·경수사권조정을 추진했다. 2020 문재인정부는 민갑룡에 이어 경찰대출신의 3번째경찰청장으로 김창룡을 임명했다.

김창룡은 1964년생으로 경찰대4기출신이다. 2004년 노무현정권시기 문재인대통령이 시민사회수석이었을 당시 시민사회수석실산하 치안비서관실행정관으로 파견근무를 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2015년 워싱턴DC 주미대사관의 주재관(경무관)으로 근무했으며 외사업무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알려졌다. 미국주재기간 미국경찰체계에 대한 경험 또한 주요장점으로 꼽혔다. 2008.3 경찰청 정보1과장(총경) 2014.12 경남경찰청제1부장(경무관) 2018.12 경남청장(치안감) 2019.7 부산청장(치안정감)을 거치면서 엘리트코스를 밟아왔다. 김창룡경찰청장은 7.24 취임해서 8.10 첫기자간담회를 가지고 임기내 경찰내 사업추진방향과 경찰의 권한강화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0.21 <경찰의 날>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대통령은 경찰의 권한이 강화된만큼 책임있는 활동을 주문했다. 그럼에도 경찰개혁이 친일친미의 과거를 청산할 것이라는 전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실례가 소녀상을 지키는 반일행동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소환장을 남발하는 반면 소녀상과 소녀상지킴이들에 대한 정치테러를 일삼는 극우무리들의 친일망언망동을 비호하는 일이다. 10.14 반일행동은 10.15소환조사일을 앞두고 경찰청앞에서 <소녀상지킴이탄압중단! 친일친극우견찰규탄!>기자회견을 진행했다. 6.22부터 진행된 소녀상지킴이들의 연좌농성을 불법이라며 소환장을 남발하는 경찰의 친일친극우행태에 대해 밝혔다. 최근에는 소녀상뒤로 극우무리가 정치테러물품을 가져다두려하자 욱일기설치때와 똑같이 지킴이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냈다. 악질극우유튜버가 살인미수수준으로 차량돌진을 했던 일도 종로서가 무혐의로 검찰에 송치하며 극우들의 친일행각을 비호했다. 소녀상지킴이들이 친일극우무리들의 위협에 노출돼있음에도 어떠한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으며 극우무리를 비호하고 있다.

이런 사건들은 경찰의 역사적 뿌리가 친일친미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현재도 경찰은 친일친미파들의 부역자로서 일체 부끄럼없이 그들의 <개>·주구,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흥신소>·<구사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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