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우리민족은 식민지지배에 항거하기 위해 거족적인 반일단체결성을 추진했다. 1910 <한일합병>이후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해왔다. 1917.3 평양숭실학교출신들이 주축이 돼 반일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가 결성됐다. 조선국민회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각지역에 구역장을 두었고 100여명의 회원을 가진것으로 알려졌다. 회원들은 무장에 관심을 갖고 권총·장총등으로 무장했다. 기관지<국민보>를 발행했다. 김일성주석의 부친 김형직은 조선국민회활동을 하던 1917 가을에 체포됐다. 출옥이후 김형직은 1918.11, 1919.7 청수동회의와 1919.8 관전회의, 1925.8 무송회의를 소집하고 산하 조직과 조직원들에게 새로운 투쟁방침과 과업들을 제시했으며 그관철을 위해 군중계몽사업과 군사활동을 조직·전개했다. 민족주의에서 시작해 공동주의에로 방향전환을 모색했으며 <민족유일당>을 건설할 목표를 세워 1926.4.5 고려혁명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얼마뒤인 6.5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직이 이과정에 오동진·손정도·장철호·양세봉등 독립운동가들과 가진 관계에 대해 김일성주석은 초기항일운동에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김일성주석은 이런 배경으로 인해 기존 독립운동의 성과와 한계·오류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가질수 있었으며 이들과의 통합과 연대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던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직돼 <좌우합작>이 추진됐다. 신간회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5)등 자치론을 주장하는 타협적인 민족운동에 반대해 비타협민족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계열의 협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1927.2 결성됐다. 신간회는 1929.11 광주학생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민중대회>를 기획했다가 허헌·홍명희등 핵심인물들이 대거 투옥되면서 실행되지못하자 신간회내부에서 타협적합법운동을 내세우는 이들이 나타났고 좌파진영에서는 이에 대해 반발했다. 결국 1931.5 신간회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세력들은 대체로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3개단체로 통합됐다. 정의부의 주도로 고려혁명당까지 창당하고 3부통합을 추진했으나 파벌싸움에 실질적통합을 이뤄내지못했다. 김일성대오는 1936.5.5 조국광복회를 조직했다. 발기인으로 이동백·여운형이 참여했다. 조국광복회는 천도교 박인진도정을 비롯한 종교인들과 애국적인 지주까지 참가하면서 그회원수가 20여만명에 이른것으로 알려졌다. 조국광복회는 국내전국각지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지부를 뒀다. 공고한 핵심을 중심으로, 일제침략무력에 대항할 무장력에 의거해 형성된 통일전선조직은 안정적이고 책임적인 활동을 보장할수 있었다. 조국광복회는 일제치하의 조건에서 철저한 비합지하조직형태의 통일전선체일수밖에 없었다. 1937 가을 <혜산사건>은 혜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국광복회조직이 일부 드러난 사건이었다. 조국광복회중앙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보위속에 있었던만큼 조직은 곧 복구됐고 1945.8 해방을 맞이할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전과 함께 조국광복회의 전인민적봉기, 소부대·인민무장대의 배후연합작전의 전략을 수행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