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소침략기구 나토의 설립과 확장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미국중심의 유럽패권전략하에 반소련침략기구로 설립됐다. 2차세계대전종전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화에 더해 서유럽내 공산당·노동운동이 강화되며 서유럽으로의 사회주의붉은물결이 확산되는 현실은 미국중심의 제국주의세력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미국은 유럽내 패권장악을 위해 경제적측면에서 마샬계획을, 군사적측면에서 나토를 설립했다. 마샬계획은 전후유럽을 부흥시키는데 미국이 전면적으로 원조해준다는 명목으로 1947.6 설립됐으나 실상은 2차대전후 경제력이 심히 약화된 서유럽에 잉여상품을 팔아 미국의 경제공황을 모면하고 유럽을 정치·경제적으로 예속시키며 사회주의권을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샬계획의 자금중 일부는 미패권전략에 반하는 정권전복을 위한 자금으로 쓰였는데 일례로 미CIA(중앙정보부)정책조정실을 통해 비밀첩보활동자금으로 악용됐다. 이는 각종 선무공작과 노동조합·진보조직에 침투, 반정부게릴라활동·지하군사조직·시설파괴·요인암살등으로 이어졌다. 뿐만아니라 마샬계획을 이용해 서유럽에 침략적인 군사기지를 설치하기도 했다. 마샬계획이 실시되는 동안 서유럽나라들은 미국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철저히 예속되고 반소련군비경쟁에 끌려들어갔다. 이같은 배경은 군사블록인 나토설립의 토대가 됐다.
1949.4.4 미워싱턴DC에서 나토가 설립됐다. 1948.7.6 워싱턴DC에서 미국·캐나다·브뤼셀조약국가들간 북대서양조약체결을 위한 첫회담이 시작된지 9개월만에 나토가 설립된 배경에는 미국·서유럽국가들간 안보조약관련협상과 각국의 입장·외교정책이 있다. 특히 나토설립에는 영국의 입장이 크게 반영됐다. 2차세계대전당시 영국은 반파쇼전선편에 있긴 했지만, 2차대전발발직전까지 독일의 소련침공을 부추기고 전쟁중 소·미·영간의 협상에서 소련과 가장 갈등을 많이 일으켰으며 서부전선을 의도적으로 늦게 형성하며 소련과 반파쇼투쟁세력에 악영향을 끼치고 전쟁양상을 복잡하게 했다. 1944.6 당시 영국의 경제·재건부책임자 글래드윈젭은 영외무장관·합참의장에게 서유럽연합각서를 제출하며 영국내 서유럽<안보>체제참여여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젭을 중심으로 한 전후기획조직은 1944.11 소련을 위협적대상으로 삼으며 영국의 안보이익은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이 이뤄지는 서유럽안보그룹의 형성에 있다는것과 북대서양이라는 틀만이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서유럽을 보호할수 있는 충분한 권력을 제공할수 있을것이라고 결론했다. 1945.7 영외무장관이 된 어니스트베빈은 서유럽전체에 걸친 정치·경제·군사협력확대를 주창하며 영·프우호조약인 던커크조약을 체결했다.
1947.12 베빈은 미국무장관 마샬과 만나 미·영·프·이탈리아·캐나다로 구성된 <서유럽체제>를 강조했고 <안보동맹>을 구상했다. 더해 1948.3 미국무부·캐나다외무부에 미국지원의 영·프·베네룩스체제, 미국중심의 대서양안보구상, 이탈리아까지 포괄하는 지중해안보체제를 제안했다. 그러면서 미국중심의 집단방위를 표방한 브뤼셀조약이 체결된다. 같은시기 미·영·캐나다대표자들이 비밀리에 회동해 1948.3.22~4.1 진행한 펜타곤회담을 통해 미국중심의 나토설립이 구체화된다. 펜타곤회담에서는 브뤼셀조약에 미·캐나다포함, 새로운 대서양동맹조직, 전세계적조약체결의 가능성을 논의해 펜타곤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를 미국의 보고서로 간주하기로 동의했다. 미의회는 <미안전에영향을미치는지역적,집단적방위협정참가>를 표방하며 <동맹국의방위력강화의무화>를 앞세운 반덴버그결의안을 채택한것을 계기로 1948.7 <안보에관한워싱턴임시회담>을 개최한다. 회담에는 조약형태를 합의한 미국·영국·프랑스등 북대서양7개국과 이에 동의한 유럽5개국이 참여했다. 9월 발표된 워싱턴보고서에는 북대서양조약이 3가지층의 회원자격을 가져야한다고 명시했다. 핵심층은 미국·캐나다·브뤼셀조약국가들이며 이들은 공통의 전략적, 이데올로기적관점을 공유하면서 북대서양조약의 핵심을 형성한다. 징검다리층은 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아일랜드·포르투갈로서 이들은 전략적위치로 그필요성이 인정돼 영토보장을 받으며 이들이 원할때 회원국이 될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다. 외부층은 이탈리아·그리스·튀르키예(터키)로 지리적, 전략적측면에서 북대서양개념에는 맞지않지만 서유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워싱턴보고서는 최종조약에 반영되지않았으나 나토확대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있다. 1948.12.24 북대서양조약을 위한 최종초안이 마련됐고 1949.4.4 워싱턴회담에서 북대서양조약이 체결됐다.
영국이 시작하고 미국이 중심이 된 나토가 <안보>를 앞세우나 본질은 반소침략기구라는것은 당사국들의 반소정책을 통해 드러난다. 2차대전당시 미국의 핵개발프로젝트인 맨해튼계획을 총괄한 미육군공병대소속의 레슬리그로브스는 1945 핵무기통제권을 쥔채 소련에 대한 선제공격을 공공연히 주창했다. 특히 잠재적라이벌도 허용해선 안된다며 <핵무기를만들기시작하면우리를위협할정도로진전되기전에그들의제조능력을파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46.3 영총리출신 윈스턴처칠은 헤리트루먼미대통령도 참석한 한행사에서 <발트해연안슈체친에서아드리아해연안트리에스테까지유럽을가로지르는철의장막이드러워져있다>·<공산당또는제5열들이점차기독교문명에심각한도전과위협이되고있다>·<소련이원하는것은전쟁의과실이며힘과정책의무한한확대>라며 소련을 향한 호전성을 드러냈다. 소련의 이오시프스탈린의장은 처칠을 겨냥해 <인종이론을추종하는전쟁광들과놀아나고있다>며 강도높게 비난했다. 1947.3 트루먼은 미상하원합동회의에서 그리스·튀르키예<군사원조>를 주장하며 지리적으로 동서유럽의 경계에 위치한 두나라가 공산주의세력에 의해 국내외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미국은 <자유국가를지키기위해> 양국에 4억달러의 군사원조를 실시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한다고 역설하며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트루먼독트린>을 선포했다. 이에 소련공산당기관지 프라우다는 미국이 <자선을빙자해제국주의적팽창>을 추구하며 <먼로독트린을유럽으로확장하고있다>고 규탄했다.
나토가 북대서양이라는 지역적범위를 넘어선건 이탈리아·그리스·튀르키예를 나토에 포괄하면서부터 이미 예견된것이었다. 이탈리아를 나토회원국으로 포함시키는것에 대해 1948까지 나토핵심국사이에서 반대입장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북대서양국가가 아니며 이탈리아를 포괄할 경우 동구유럽과 소련의 경계에 있는 그리스·튀르키예를 배제할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공산당이 강성이던 이탈리아에서 미CIA정치공작이 작용하며 1948총선에 보수적인 기독교민주당이 압승했다. 이탈리아정치상황은 이탈리아가 나토에 가입하게 된 배경중 하나다. 한편 포르투갈과 북대서양에 포괄되지않은 북유럽의 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도 미국의 군사전략적중요성으로 인해 나토에 포함됐다.
나토는 소·미대결역사의 중요변곡점마다 세력을 확장하며 그침략성을 심화시켰다. 1차확대로는 1952 그리스·튀르키예의 가입을 들수 있다. 그리스의 경우 2차세계대전당시 레지스탕스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이나 종전후 미·영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정부군에 의해 레지스탕스세력이 패배하는 정치적불운을 겪는다. 당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갖고있던 미국은 유럽에서 그리스, 아시아에서 코리아를 사회주의확장을 막는 봉쇄지점으로 삼았다. 그리스·튀르키예는 반소책동의 전략적요충지로서의 공통성이 있으나, 그리스는 서구문명에 가까운 반면 튀르키예는 그렇지않아 튀르키예는 코리아전에 4500명의 군사력파병결정을 통해 나토가입의 기회를 얻으려했다. 나토도 1949.8 소련의 핵실험과 1950.6 코리아전을 계기로 나토의 군사기구적성격을 더욱 강화하고있었고 1950.9 합의된 <전진방위전략>의 핵심원칙은 가능한 더 동쪽으로 나토회원국가들을 <방위>해야한다는것으로, 나토의 동진을 담고있다. 나토회원국들이 그리스·튀르키예의 나토가입을 지지하지않았음에도 미국은 이두나라의 가입승인을 강압했고 결국 1952.2 리스본에서 두나라의 나토가입이 이뤄졌다.
나토의 2차확대인 1955 서독의 나토가입으로 미국중심의 대러침략책동은 더욱 노골화됐다. 1949.8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독점력이 무너지며 서유럽에서의 군사력증강필요성과 도달가능한 동쪽지역까지의 무력배치가 대두됐다. <전진방위>라는 미명하에 반소침략책동의 강화는 서독의 무장으로 연결됐다. 이런 배경하에 나토는 자체 연합군사지휘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나토의 연합군사력은 핵무기보유국이자 반소책동의 핵심인 미측이 최고사령관직을 맡는것으로 연결됐다. 서독의 재무장과 나토가입을 추진하기 위해 1954.10 서방9개국은 서독에 대한 점령통치를 종식하는 의정서를 채택하고 10.23 파리협정을 통해 서독의 나토가입과 이탈리아·서독의 서유럽연합(WEU)가입에 합의했다. 1955.5.5 서독은 나토의 15번째 가입국이 됐다. 1·2차세계대전의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서독은 미국·나토의 대소침략책동에 의해 침략무기보유가 가능해졌고 서독의 나토가입으로 동·서독의 분단이 동·서유럽의 분단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한편 서독의 나토가입은 1955.5.14 바르샤바조약기구(WTO)의 탄생을 불러왔다. 나토의 확장이 소련을 위협하는것을 넘어 핵전쟁을 불러오는것임을 알고있는 소련은 유럽의 평화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소련외무장관 뱌체슬라프몰로토프는 다른 유럽국가들을 겨냥한 유럽국가들의 군사블록으로서의 유럽방위공동체에 반대했고 그런 행동은 독일의 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것이라고 주장했다. 뿐만아니라 나토가 유럽의 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소련입장을 강조했다. 1954.2 베를린에서 열린 소·미·영·프외무장관회의에서 소련은 독일문제와 유럽안보조약을 위한 계획을 제시하며 독일문제해결 없이 전후 어떤 해결책이나 평화조약이 있을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련측은 제안<유럽안전보장에관하여>·<유럽의집단적안전에관한전반적유럽조약>기본원칙초안을 제출하며 유럽의 집단안전체제수립을 제기했다. 소련은 모든 제안이 거부되고 소련·동유럽에 대한 위협이 갈수록 심화되자 1955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창설한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소련과 알바니아·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동독·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다. 가맹국들은 가맹국중 1개국이 군사적공격을 받을 경우 즉시 전면적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소련은 나토를 독일밖으로 확장하지않겠다는 전제하에 독일재통일을 찬성했고 나토·바르샤바조약기구를 대체할 새로운 대서양·유럽집단안보체제를 제안하며 유럽의 평화·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영국경제사학자 로버트스키델스키는 <1952·54소련이독일의중립을전제로독일통일을용인했고,1954모든체제에열린보편적유럽집단안보조약을제안했으며1955흐루시쵸프가나토가입을신청했다>고 강조했다. 스키델스키의 발언은 독일분단의 원인과 서독의 무장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조직이 미국·나토의 대러침략책동에 기인한다는것을 보여준다.
한편 1975.8.1 헬싱키협정의 결과 CSCE(유럽안보협력회의)가 설립됐다. CSCE형성논의는 1954 소련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됐다. 1966 바르샤바조약기구회원국들은 <유럽의평화와안보강화를위한부카레스트선언>을 발표했고 나토는 중부유럽에서의 재래식군사력의 상호균형감축협상에 소련참가, 베를린문제에 대한 소련협력, 미국·캐나다의 참여조건을 수용한다면 바르샤바조약기구와 협상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조건을 소련이 받아들이며 1972 CSCE협상회의가 시작됐다. CSCE협상과정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유럽안전보장·경제협력확대를 주된 의제로 제시한 반면 나토는 사람·정보·사상의 교류와 <인권문제>를 주의제로 제시하며 나토가 CSCE협상에 임한 의도가 소련·동구사회주의권의 와해·붕괴에 있다는것을 드러냈다. 서독의 강경한 반사회주의책동은 CSCE협상의 암초였으나 1968 빌리브란트서독총리의 개량주의적인 <신동방정책>으로 반사회주의책동이 어느정도 완화되며 CSCE협상이 진행될수 있었다. 1975.8.1 35개국정상이 모인 헬싱키회의에서 최종의정서가 공식체결되며 CSCE가 탄생했다. CSCE는 군비·예방외교·신뢰구축조치·인권·선거감시·경제환경안보등을 골자로 하고있다. 군사적의의가 담긴 합의로는 1975 헬싱키의정서와 1986 스톡홀름협약을 들수 있다. 헬싱키의정서에서 주요군사분야내용은 병력2만5000명이상이참가하는주요군사훈련의21일전사전통보, 대규모군사이동의사전통보, 군사훈련에타참여국의참관인교환, 상호이해증진을위한군인사교환, 궁극적목표로완전한무기감축설정등이다. 의정서체결후 미국의 소련·동구권을 겨냥한 미사일배치등 10년간 오히려 군비경쟁이 심화되며 관계는 악화됐다. 미·나토는 동구사회주의권을 향해 인권·인적교류에 관한 헬싱키원칙의 위반과 소련의 군사현대화에 대해 비난했고 동구측은 인권을앞세운내정간섭, 경제협력문제, 동구지역에대한영향력행사등을 이유로 서구를 비판했다. 레이건미정부는 <전략방위구상>등 군사력증강계획을 심화시켰고 소련은 비슷한 시기 아프간침공을 단행하며 군사적대결은 더욱 심화됐다. 그러던 차에 1980~83 마드리드회의와 그후속회의에서 정치적구속력이 있는 <신뢰안보구축조치>에 양진영이 합의했다. 조치의 적용지역을 전유럽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를 포괄하고있으며 해당조치가 군사·정치적으로 유효해 검증이 가능한것이어야한다고 명시했다. 이후 소련의 기회주의적변질에 따라 협상은 거듭됐고 1990 파리회의에선 대결시대종식·인권·민주주의·경제적자유·평화적수단통한분쟁해결·모든국가의동등한안보를 목표로 제시하며 미국·나토가 전통적으로 강조해온 반사회주의의제가 전면부각됐다.
나토의 3차확대로는 1982 스페인가입을 들수 있다. 스페인은 지리적으로 서유럽에 속해있고 지중해에서의 군사전략적중요도가 높은 지역임에도 1980 들어서야 나토가입이 이뤄졌다. 그이유중 하나로 1939등장한 프랑코파쇼통치를 꼽는다. 프랑코정권은 표면적으로 나토회원국의 정치적지향에 배치됐고 그렇기에 프랑코정권이 종식된 1975이후 스페인의 나토가입논의가 시작됐다. 한편 미국·나토와 스페인이 실질적으로는 1950년대부터 유착관계였다는데 미국·나토의 파쇼세력과의 결탁과 침략본색이 드러난다. 미국은 1953 스페인과 마드리드조약을 체결하며 스페인영토에 미해군·공군을 주둔시켰고 <경제지원>이란 미명하에 경제적예속관계를 심화했다. 스페인은 나토회원국이 아님에도 미국과의 군사적<협력>관계로 인해 점차 나토군사체계로 통합됐다. 즉, 스페인은 1982 나토에 가입했지만 이미 사실상 나토회원국이었다. 이는 미국·나토가 2차세계대전의 파쇼세력을 배후조종해 반러침략책동에 동원해왔다는것을 보여준다.
나토의 본격적인 동진은 1989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며 시작됐다. 서독이 이미 가입된 조건에서 통일된 독일을 나토에 포괄시키려는 미국·나토는 소련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나토동진금지>약속을 한다. 미조지워싱턴대국가안보문서고가 입수한 비밀해제문서에 따르면 1990.1.31 서독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겐셔는 공개적으로 <동유럽의변화와독일통일이소련의안보이익을해쳐서는안된다>·<나토동진을하지말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주서독미대사관은 겐셔의 제안에 <독일이통일된이후에도나토군사력이동독에는주둔하지말아야한다는것을의미>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미국무장관 제임스베이커는 동년 2월 소련측에 <나토가1인치도동진하는일은없을것>
·<나뿐만아니라대통령도(보장)>라고 약속했고 헬무트콜서독총리에게도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5월에는 <우리의정책은소련으로부터동유럽을분리시키려는것을목적으로하지않는다>고 강조했다. 7월 조지허버트부시미대통령도 미하일고르바쵸프소련대통령에게 유사한 입장을 전했다. 이에 소련정부는 1991.7 나토본부에 대표단을 파견했고 이들을 만난 나토사무총장 만프레트워너는 <우리는나토의강화를추구하지않는다>고 확답했다. 이같은 과정끝에 소련은 독일의 통일과 나토잔류를 동의했다.
1989 우익정권이 들어선 폴란드는 1990.11 회색지대·완충국가·중립지역이라는 구상을 거부할것이라고 표명하며 사실상 나토가입입장을 드러냈다. 헝가리·체코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1991말까지 자국영토에서 소련군을 철수하는데 합의했다. 한편 폴란드·헝가리·체코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문제에 대한 상호협력을 목적으로 헝가리 비셰그라드에 회동해 비셰그라드그룹을 결성했다. 1991.1 3국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모여 바르샤바조약기구해체를 공식화했다. 1991.2 루마니아·불가리아가 비셰그라드그룹에 합류했다. 소련외무장관 베스메트니크는 중·동유럽국가들에게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해체에는 동의하나 이들국가들이 유럽공동체나 나토에 가입하는것은 용인할수 없다고 강조했다. 1991.7 바르샤바조약기구는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1990.6 나토는 런던정상회의에서 중·동유럽국가들과의 정치·군사적협력관계증진모색을 표명하고 1991.11 로마정상회의에서 북대서양협력이사회를 통해 나토회원국과 25개국중·동유럽국가들간의 공식적협의과정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며 나토의 동진을 위한 사전작업을 시작했다. 비셰그라드그룹은 보스니아내전과 1991 소련내군부쿠데타를 계기로 나토가입을 본격화했다.
1994.1 브뤼셀정상회의에서 나토는 중·동유럽으로의 확대를 공식선언했고 그전략으로서 북대서양이사회 틀내에서 <평화를위한동반자관계>를 수립했다. 러시아의 반발은 예정된것이었기에 1997.5.14 나토확대는 러시아안보이익을 위협하는 군사적함의를 가지고있지않다는 의미의 러시아·나토동반자관계조약에 관한 임시협정을 체결했다. 이어 5.27 러시아·나토간 상호관계·협력·안보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다. 기본협정체결을 위해 나토는 새나토회원국의 영토에 상주하는 상당규모의 전투력이나 핵무기를 배치할 의도·계획·이유가 없다고 러시아에 약속했다. 러시아의 반대를 어느정도 완화시킨 후 1997.7 마드리드정상회의에서 비셰그라드그룹국가들의 나토가입이 약속되고 1999.4 워싱턴정상회의에서 이들국가들이 정식회원국이 되며 1990 확약했던 <나토동진금지>는 완전히 깨졌다. 나토의 동진은 이후에도 계속됐는데 2002.11 프라하정상회의에서 불가리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가 초청된것을 계기로 나토가입회담을 본격화해 2004.3 나토의 정식회원으로 가입됐다. 2008 부카레스트정상회의에는 알바니아·크로아티아가 초청됐고 2009 나토60주년정상회의에서 이들 나라들이 신규회원국으로 가입됐다. 반면 2000.5 빌클린턴미대통령과 만난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당선인은 <러시아가나토에가입하겠다>고 제안했으나 클린턴은 <나는반대하지않는다.다만미국의대표들이매우민감해할것이다.>라고 답하며 사실상 거절했다. 미국·나토는 러인접국들의 나토가입을 승인하며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한편, 러시아의 나토가입은 거부함으로써 나토의 대러침략기구로서의 본색을 잊지않았다.
나토의 전략개념변천과 핵전쟁위협
나토는 2010까지 총7차례에 걸쳐 전략개념을 수정했다. 전략문서를 통해 확인할수 있는 나토의 군사전략은 크게 전략개념·전략지침·전략개념실행위한조치로 세분화된다. 1949.12 북대서양지역의방위를위한전략개념(DC6/1)을 시작으로 1952.12.3 전략개념(MC3/5 전진방위전략), 1957.5.23 전략개념(MC14/2 대량보복전략), 1968.1.16 전략개념(MC14/3 유연반응전략), 1991.11 새전략개념, 1999.4 동맹의전략개념, 2010.11 동맹의새전략개념으로 수정·변화됐다.
나토회원국들은 북대서양조약9조에 의거해 북대서양이사회, 9월 방위위원회·군사위원회를 꾸렸다. 당시 통합군사지휘구조를 갖추지못한 나토는 미·영·프상임그룹에 의해 전반적전략개념이 세워졌다. 그결과 1949 북대서양지역의방위를위한전략개념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나토의 <대서양동맹의방어적성격>·<전쟁예방에대한강조>·<집단성의중요성>·<핵무기의역할>·<지역적상이성내에서전략적통일>등이 명시됐다. 특히 유사시 나토의 대응능력으로 전략적폭격에 의한 핵무기사용을 분명히 함으로써 대소련핵공격위협의도를 드러냈다. 첫전략개념을 바탕으로 1950.3 군사위원회에서 북대서양지역기획위한전략지침(MC14)이 공식승인됐고 1950.4.1 나토중기계획(DC13)이 마련되며 핵무기사용에 관한 세부전략지침을 정리했다. 한편 미국내에선 1940후반~1950초 미국의 유럽전략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논쟁은 미국의 핵전략형성과 나토의 전략개념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1949 소련의 핵시험성공과 1950.6 코리아전은 나토의 재래식전력증강필요성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1949~52 나토전략개념은 핵무기사용을 내세우면서도 기본적으로 재래식전력에 의존하는것이었고 이에 따라 1950.9 뉴욕북대서양이사회에서 <전진방위>와 통합군사지휘구조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나토의 군사제도화가 가속화됐다. 그러면서 1951.3 ACE(유럽동맹군사령부)조직을 시작으로 연이어 군사조직을 세워 통합군사지휘구조를 갖췄으며 1952.2 리스본회담에서 사무총장직·국제참모진을 꾸렸다. 또 리스본회담에선 <전략목표>에 합의했는데 주내용은 1954까지 100여개사단조직·재래식전력증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국중심의 대러침략기구로서의 진용을 갖췄다.
나토의 전진방위전략채택은 그리스·튀르키예·서독의 신규회원국가입을 불러왔고 전략개념을 변화시켰다. 그러면서 1952.12 첫전략개념을 수정·보완하는 북대서양조약지역방위를위한전략개념, 전략지침을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한편 2차대전종전후 미국은 원자탄보유고를 늘리며 1947중반 13개였던것이 1950중반에는 300개로 급증했다. 동시에 원자탄운반·투하능력도 향상됐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공군을 강화하며 핵무기사용체계를 발전시켰다. 미국은 전쟁발발시 원자탄133발을 70개도시에 투하해 소련방어망을 단번에 궤멸시킬 계획을 추진했다. 실제 실행될 경우 소련산업의 40%가 파괴되고 270만명이 사망하는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2차대전막바지에 일본에 이미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이 <냉전>시대에 들어서 원자탄을 실전에 사용할수 있다는것은 1950.11 코리아전을 겨냥해 원폭투하를 포함한 모든 선택지를 테이블에 올려놓고있다는 발언으로도 드러났다. 소규모전술핵무기의 발전은 전장사용에 적합하며 소련의 우월한 재래식전력을 억지하기 위해 전장핵무기를 사용할수 있다는 주장이 미국내에서 공공연히 제기됐다. 그런와중에 드와이트아이젠하워미행정부가 채택한 <새로운전망>정책은 나토의 전략을 재래식전력에서 핵무기전력중심으로 전환시켰다. 소련의 미본토에대한핵공격능력부재와 달리 미국의 1952수소탄실험·소형핵무기등장·장거리폭격능력보유와 함께 소련본토공격능력보유는 1953 미국의 전략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소련·중국에 <대량적원자적열핵보복>을 위한 수단을 유지할것을 통보하고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유럽에 배치했다. 1954.12 북대서양이사회는 나토의 전략을 미전략노선과 일치시키며 유럽동맹군최고사령부에게 유사시 핵무기사용을 가정해 군사기획을 마련할수 있는 권한을 위임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6.12 핵전력을 우선시하는 대량보복전략인 나토지역방위를위한전반적전략개념(MC14/2)을 나토공식군사전략으로 채택했고 1957.5 북대서양이사회는 이를 3번째전략개념으로 승인했다. 나토의 대량보복전략은 소련의 핵무기발전정책에 영향을 줬다. 1953.8 소련은 수소폭탄을 실험했고 중장거리폭격기들을 개발했다. 1957.8 대륙간탄도미사일 SS-6미사일을 실험했다.
1950후반 소련핵무력강화에 따라 미국의 핵전력우위가 약화되며 대량보복전략의 가치가 상실하기 시작했다. 특히 1957.10 소련의 스푸트니크인공위성시험발사는 소련이 탄도미사일부문에서 미를 앞질렀다는것을 증명했다. 이에 따라 나토는 유연반응전략으로 또다시 선회한다.
1960년대 존F케네디미행정부는 대항전력전략을 채택한다. 이는 새롭고 보다 융통성있는 재래식전력선택과 핵무기에 대한 중앙통제를 보다 강화하는 전략이다. 그러면서 1961.3 애치슨보고서를 통해 이전략이 동맹의 목표로 전환됐다. 애치슨보고서에는 군사영역에서 과거 나토는 전면적핵전쟁에 대비한 동맹의 군사전력증강에 집중했으나 핵공격이나 대규모재래식공격가능성이 희박한 현상황에서 나토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우발적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보다 실용주의적접근방법을 권고한다고 명시됐다. 1961.4 케네디는 이보고서를 승인하며 나토전략개념변화와 재래식전력증강조치를 촉구했다. 1962.6 미국방장관 로버트맥나마라는 <나토는소련의공격에상응하는수준에서,재래식전력에는재래식으로,핵전력에는핵전력으로대응하는유연반응전략을채택해야한다>는 내용의 연설로 전략변경을 강요했다.
유연반응전략은 <억지개념>에 의거해 2차보복능력을 증가시키는 조치로서 미국의 3대핵전력인 대륙간탄도미사일·전략폭격기·잠수함발사미사일운반체제가 기본이다. 핵전력의 분산화로 소련의 <선제핵공격>으로부터 생존가능성을 높이고 2차보복공격력을 증대시킨다는것으로 사실상 상호확증파괴에 해당하는 전략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나토의 억지력에서 재래식전력의 가치가 강조됐고 이는 나토의 재래식전력증강을 불러오며 미국은 이전략을 통해 유사시 재래식공격에 대한 재래식방위를 강조하며 유럽에 국한한 제한전쟁을 선호했다. 반면 서유럽은 전략핵무기의 신속한 사용을 선호하면서 나토의 새군사전력을 둘러싼 미국·서유럽간 갈등은 격화됐다.
한편 1960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핵실험을 단행했고 프랑스영토에 배치된 미핵무기에 대한 통제·사용여부도 프랑스와 공동으로 결정할것을 요구했으며 지중해프·영해협에 나토소속으로 배치된 프랑스해군을 빼냈다. 그러면서 1966 프랑스는 나토를 탈퇴했다. 미국이 프랑스에 탈퇴의 재고를 요청하는 한편 14개국회의를 소집하며 나토존속으로 의견을 모으고있을 무렵, 샤를드골프랑스대통령은 소련방문계획을 알리며 독자노선을 표방했다. 이는 미국·서유럽제국주의간의 균열과 반목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유연반응전략은 6년간의 논쟁끝에 1967.12 나토의 군사전략으로 공식채택됐고 1968.1.16 북대서양이사회는 나토지역의방위를위한전반적인전략개념(MC14/3)을 승인하며 나토의 억지력으로써 핵전력과 재래식전력간의 우선성문제를 모호하게 만든 유연반응전략을 채택했다.
소련·동구의 해체에 따른 <냉전>종식으로 나토의 전략개념은 또다시 변경된다. 미국·나토는 <냉전>종식이후 직면한 중·동유럽의 민족갈등·영토분쟁등 정치·경제·사회적갈등·불안정의 위협들을 이유로 <냉전>의 산물인 나토의 해체가 아닌 확장을 택한다.
중·동유럽의 심각한 갈등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세력의 배후조종에 의해 촉발된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1980년대말 소련의 <개혁>·<개방>정책과 동구의 사회주의몰락을 이용해 보스니아·체첸등 분쟁지역에서 이슬람근본주의를 계속 부채질하고 우크라이나에 신나치세력을 투입시켰으며 소련내 자유주의운동을 획책하면서 소련과 중·동유럽의 분쟁과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를 기화로 미국의 이지역에 대한 침략·패권전략을 심화하는 한편, 나토의 탈바꿈을 시도했다.
이른바 <탈냉전시기> 미국내국방전략의 변화는 1992 <국방계획지침>문건을 통해 확인된다. 이문건초안에는 향후 미국의 세계패권을 위협할수 있는 경쟁자의 등장을 허용해선 안되며, 핵·생화학무기같은 대량살상무기획득을 시도하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일방적선제공격으로 제압해야한다고 명시했다. 전쟁시나리오 7가지중 북·이라크에 대한 동시전쟁대비와 함께 러시아의 <유럽침략>을 막아야한다는 반러침략책동이 명시됐다.
나토는 그세력범위를 서유럽에서 유럽전체로 확대하며 1990.7 런던회담에서 새전략개념을 구성했다. 개념에는 대서양동맹의 안보목표추구를 위한 개념적토대를 제공, 정치적접근방법의 강화와 군사력의 상당한 감축·재조정을 포함하는 <안보>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방법을 수용했으며 이는 1991.11 로마정상회의에서 합의·채택됐다. 1999 워싱턴정상회의에서 승인된 전략개념은 1991 새전략개념을 수정·보완해 최종승인한 전략개념이다. 개념을 통해 나토는 동맹의 <안보>가 다면적이고 평가가 어려운 광범위하고 다양한 군사·비군사적위험에 노출돼있으며 이러한 위험은 유럽·대서양지역내부와 주위의 불확실성·불안정과 동맹주변의 지역적위기가능성을 포괄한다고 명시했다. 특히 핵·생화학무기확산·운반수단은 심각한 관심사로 비확산과 관련한 주요도전들이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이같은 진단은 소련·동구붕괴후 미국이 강요하는 단극체제가 반제자주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받고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세인식속에서도 새전략개념중 <21세기안보에대한접근방법>부문을 통해 <유럽·북아메리카의불가분성>을 강조하고 <위기대응작전에필요한동맹의군사능력유지>·<갈등예방과위기관리>·<나토·러시아관계및나토·우크라이나관계중요성과필요성을강조하는동반자관계,협력,대화>·<신규회원국가입에대한확대>·<군비통제·군축·비확산등에대한입장>등을 제시했다. 뿐만아니라 잠재적위협을 내세우며 미사일방위필요성을 거론하고 동맹의 군사력·정부와 비정부차원의민간환경간의 상호작용이 작전성공에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민군협력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는 민간기구를 내세워 중·동유럽, 반제자주국가내부의 분열·갈등을 증폭시키는것과 연관된다.
2010.11 리스본정상회의에서 10년만에 새전략개념이 채택된다.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은 미제침략세력이 벌인 2번의 <자작테러>다. 2001.9.11<군사자작테러>를 계기로 미국·나토는 <테러와의전쟁>을 선언했고 2008 <금융자작테러>를 계기로 힘의 이동이 발생했다. 2001.9.12 나토는 역사상 처음으로 북대서양조약5조를 발동해 9.11테러를 모든 회원국에 대한 무장공격으로 간주하고 미국이 <테러와의전쟁>을 명목으로 일으킨 아프가니스탄전쟁에 합류했다. 2002.11 프라하정상회의에선 테러리즘이 주의제였다. 뿐만아니라 유럽·대서양지역에 국한됐던 나토의 범위를 전지구적범위로 확대시켰다. 2006.11 리가정상회의에서 승인된 정치지침은 테러리즘·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나토의 향후 10~15년사이 직면할 가장 큰 위협으로 규정했고 이는 <어디에서발생하든지간에> 21세기위협·위험·도전이라는 전체범위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할수 있어야한다며 나토의 세력확장야욕을 드러냈다. 뿐만아니라 <동반자관계>를 내세우면서 비유럽국가들과의 <안보적협력관계>강화를 강조하며 군사적결탁을 본격화했다. <지구적차원에걸친다른동반자국가들>구상은 비나토회원국·비유럽국가중 나토의 <동반자>국가를 지칭하는것으로 인도태평양지역의 남코리아·일본·호주·뉴질랜드·싱가포르등을 포괄했다. 2008.4 부카레스트정상회의에서 <맞춤형협력패키지>발전으로 남코리아·일본·뉴질랜드·호주와의 <협력>방안이 모색됐다.
한편 2009.3 스트라스버그·켈정상회의에서 새전략개념준비가 합의됐고 이초안은 미국무장관을 의장으로 한 나토전문가그룹이 마련했다. 2010새전략개념에는 여러차원의 <위협>, 사실상 하이브리드위협에 대해 언급하며 핵전력과 재래식전력간의 적절한 혼합을 바탕으로 둔 억지전략을 핵심요소로 표방했다. 특히 탄도미사일공격에대한방위능력발전, 생화학·방사선·핵무기위협에 대처할수 있는 능력발전을 강조하고 사이버공격으로부터의 보호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모든 나토기관을 중앙집권적사이버보호하에 두고 나토의 사이버자각·경고·대응에 대한 통합을 강조했다. 한편 나토의 포괄범위에 대해 유럽국가의 <통합>을 강조하고 지구전체에 걸친 국가·조직과의 광범위한 동반자관계연결망을 내세우며 나토의 세력확장전략을 드러냈다.
한편 미국중심의 <미사일방어체제>에 편승해 새전략개념에서도 미사일방위에 초점을 맞췄다. <울브라이트보고서>에서 나토미사일방어체제는 억지력·대서양간책임공유·안보가 불가분적이라는 원칙을 강화시킬것이며 러시아와의 공고한 협력을 허용할것이라고 언급했다. 2010.11 리스본정상회의에서의 정상선언에서도 <미사일방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미사일방어체계를 내세웠다.
나토의 침략역사
1950.6 코리아전은 사실상 나토가 최초로 개입한 전쟁이다. 개전초 미국중심의 총16개국이 코리아전에 참전했다. 콜롬비아와 아시아4개국을 제외한 미국·캐나다와 영국·벨기에·프랑스·룩셈부르크·네덜란드는 나토가입국으로 총12개가입국중 7개국이 코리아전에 미국의 편에서 참전을 감행했다. 특히 이들나라들은 1948.7 안보에관한워싱턴임시회담을 통해 북대서양조약을 합의한 나토핵심국들이다. 뿐만아니라 그리스·튀르키예는 나토가입을 앞두고있었다. 북대서양국가들의 참전은 미국이 나토전력증강등의 약속에 의한것이며 튀르키예는 나토가입을 위해 코리아전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코리아전과 나토의 밀접한 연관을 확인시켜준다.
코리아전이 미국중심의 침략·패권야욕에 의한 전쟁이었다는것은 트루먼이 6.26 코리아를 두고 <극동의그리스>라 칭한것으로 드러난다. 트루먼은 <우리가강하게나가면,3년전그리스에서그랬던것처럼저들과당당히맞서면,더는어쩌지못할것>이라고 말하며 코리아를 전쟁터로 삼으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미국의 호전세력은 전쟁에 원자탄사용을 주장했는데 더글라스맥아더는 <이전쟁이야말로원자탄사용의적지>·<소련이코리아반도와만주에공군력을증강하고중국군이코리아반도접경지역에신규로대규모병력을집결시키고있다>며 핵전력의 동원을 강변했다. 실제 미합참은 중국이 코리아반도에 파병할 경우 만주의 군사기지들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951.4 트루먼은 이명령을 재가하며 원자력위원회관할 원폭9발을 괌·오키나와기지로 이관했다. 코리아전에 대량투하된 각종 치명적인 재래식·생화학무기와 원폭투하가능성은 나토의 초기전략개념과도 일치한다. 전쟁을 계기로 1950.12 브뤼셀회담에서 북대서양이사회는 워싱턴DC에 상설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통합군사력은 미국의 최고사령관지휘하에 두기로 결정했으며 초대나토최고사령관으로 아이젠하워를 임명했다. 그러면서 서유럽연합군사기구를 나토로 통합하며 미국중심의 침략적군사기구로 확실히 변화했다.
1990년대 나토의 대표적군사개입은 보스니아내전과 코소보분쟁을 들수 있다. 구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의 해체과정에서 발생한 2건의 전쟁은 나토가 <인도주의적책임>을 주장하며 무력개입한 대표적사례다. 보스니아내전은 이슬람계와 헤르체코비나계가 1992 국민투표를 거쳐 세르비아계주도의 유고연방에서의 독립을 선언하며 본격화됐다. 이슬람계·크로아티아계연합의 결과인 보스니아정부에 대항해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내 스르프스카공화국을 수립하며 군사적갈등이 증폭됐다. 1995.7 스레브레니차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을 계기로 나토의 군사적개입이 본격화됐고 1995.8.30부터 3주간 나토는 대규모공습을 감행했다. 유엔의 제재결의안통과와 나토의 군사적개입은 1992 이미 시작됐다. 나토·서유럽연합은 1992.7 아드리아해에 해안순찰선을 보내 출항정지를 감시했고 11월 유엔은 나토·서유럽연합에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대한 유엔의 통행금지강제임무를 부여하는 결의안 787호를 통과시켰다. 10월 나토는 보스니아상공의 비행금지구역에 대한 감시임무를 수행했고 1993.4 나토는 3월 통과된 유엔안보리결의안실행을 위한 비행작전을 감행했다. 일련의 유엔안보리결의안에 근거해 나토공습은 1994.2 실행에 옮겨져 2.28 4대의 세르비아전투기를 격추시켰다. 이는 나토창설후 공식적인 첫군사행동이다. 1995.7이후 나토가 공습할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고 유엔사무총장이 1995.8 나토회담에서 결정된 새운영협정에 승인하며 8.30부터 약3주간 나토의 무자비한 공습이 시작됐다. 공습후 미국을 중심으로 1995.12.14 데이턴협정에 공식서명하며 분쟁은 일단락됐으나 이지역의 갈등은 여전히 상존하고있다. 나토는 데이턴협정의 군사적측면실행을 위해 <평화유지임무>을 내세워 실행전력을 배치했고 1996 안정화전력으로 대체했다. 나토군의 이지역에 대한 군사적점령은 2004말까지 계속됐다. 2006.12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는 나토의 <평화위한동반자관계>에 가입했고 2008부터 나토가입에 대한 논의를 시작됐다.
1999 코소보분쟁에의 나토개입은 세계적인 반미·반나토정서를 불러왔다. 1998 세르비아공화국의 코소보지역에서 발발한 전쟁은 코소보해방군을 중심으로 한 알바니아계의 분리·독립과 세르비아계의 대치로 촉발됐다. 코소보지역은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대통령 요시프브로즈티토의 정책에 의해 1974 자치를 인정받아 알바니아어사용·대학설립등이 가능했다. 1980년대들어 알바니아계의 분리·독립시위가 심화되고 1989 세르비아 슬로보단밀로셰비치대통령이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며 갈등은 첨예해졌다. 코소보알바니아인들은 1991 독립헌법채택, 1992 코소보공화국선포를 하며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1993 창설된 코소보해방군을 통한 무장화와 1996부터 전쟁양상이 본격화되자 세르비아도 코소보해방군에 대한 전면적소탕작전을 시작했다. 유엔은 1998.3 코소보지역을 포함한 유고에 대한 무기금지부과결정·코소보자치권증대등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을 시작으로 이지역에 대한 개입을 시작했다. 북대서양이사회는 1998.9 <세르비아안보세력과유고군대의과도한무력사용에대한우려>내용의 유엔안보리결의통과직후 코소보에서 제한·단계적공습준비를 위한 공군의 행동경고발표를 승인했다. 허나 유엔안보리결의가 나토의 무력사용승인을 의미한것은 아니었다. 행동경고발표는 나토의 야전사령관에게 공습작전에 필요한 자원들을 부여하는것으로 이미 공습을 위한 군사적계획이 준비돼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1998.10에는 야전군지휘자에게 권위를 위임하는 행동화명령발표를 결정했다.
나토공습은 1999.3.18 랑부예협상의 결렬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미국·나토의 코소보분쟁개입에 대해 내정간섭이라고 규탄해온 유고정부는 미국이 강요하는 랑부예협상에 합의할수 없었다. 랑부예협상안은 코소보의 자치권인정과 코소보의 평화정착을 위한 평화유지군파견이었다. 유고정부는 처음부터 코소보의 자치권인정에는 동의했다. 문제는 평화유지군의 성격이었는데 다국적군이 유엔산하일 경우만 인정하겠다는 유고정부와의 입장과는 달리 미국은 반드시 나토군이 파견돼야한다고 주장했다. 더해 코소보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전영토 어디든 나토의 군사작전이 가능해야한다는 무리한 요구조건을 달았다. 결국 러시아·중국이 유엔을 통한 문제해결을 주장하며 나토의 군사개입을 반대했지만 미국·나토는 유엔안보리에서의 표결이 무산될것이라 판단해 유엔의 절차없이 나토공습을 감행했다. <인도적개입>을 내세운것과 달리 나토의 무차별공습과 오폭으로 인해 대량학살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세계적으로 미국·나토에 대한 규탄이 쏟아졌다. 1999.3.24부터 시작된 공습으로 인해 5.17기준 민간인500명이 사망하고 4500명이 부상당했다고 유고정부는 밝혔다. 나토는 유고에 히로시마원폭의 위력을 넘어서는 1만개이상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초기 대형목표물에서 소규모목표물로까지 공습대상을 확대하며 심각한 민간인학살을 자행했다. 8.26보도에 따르면 나토가 전쟁을 시작하기 전 1년간 코소보사망자수가 2000여명이었는데 나토가 유고공습시 발생한 사망자는 코소보에서 약4000명, 세르비아에서 약2000명으로 추산되며 독일군주둔지역에서만 1달새 250여명이 학살됐다. 세계각국과 유엔은 나토의 공습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고 특히 중국은 베오그란드주재중대사관이 나토공격으로 피폭되면서 초강경자세로 공습중단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나토는 <평화유지군>·<코소보군>등으로 간판만 바꾸며 현재까지 주둔하고있다.
2021.5 미군은 아프간(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을 시작했고 8.15 아프간친미정부는 반미무장세력 탈레반에 항복하며 정권을 내줬다. 바이든은 <아프간에서의미군임무는끝났다>·<국익이없는곳에서싸우는실수는반복하지않겠다>며 당초 아프간전쟁·점령의 의도가 아프간에 대한 지배·착취에 있다는것을 드러냈다. 2001 미국은 <9.11테러>의 <배후>로 빈라덴과 알카에다조직을 지목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간 <9.11테러>관련 협력증거가 없고 탈레반정권의 미국과의 협상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0월 아프간침공을 감행했다. 미군은 나토를 아프간전쟁에 동원했고 약20년동안 아프간지역을 지배하며 끊임없이 분쟁과 학살을 일으켰다. 나토는 <9.11테러>직후 동맹자산을 극대화하고 미국과의 유착을 강화했으며 10월 북대서양이사회는 나토역사상 처음으로 조약5조, 즉 가입국들중 1개국가이상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을 경우 동맹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피습동맹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한 규정을 발동했다. 유엔안보리도 결의안들을 발효하며 미국중심의 <대태러전쟁>에 부역했다. 2001.12 유엔안보리결의안에 의거해 ISAF(국제안전지원군)를 6개월간 운영하기로 결정하며 아프간친미정부지원활동을 명목으로 한 군사적개입이 시작됐다. ISAF는 초기에 카불주변지역에서의 군사활동에 한정됐으나 2003.10 유엔안보리결의안을 통해 아프간전지역에 걸쳐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2003.8 나토군은 ISAF로부터 지휘권을 무기한 인수해 군사작전을 직접 주도했고 미군은 나토와 별개로 아프간에 병력을 투입해 <대테러전>명목의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아프간에서의 미군·나토군의 심각한 군사적만행은 나토군의 침략적성격을 재삼 보여준다. 미국은 탈레반축출후 미CIA와 협력해온 하미드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앉히고 아프간마약경제를 장악하며 아프간민중을 경제적, 성적으로 착취해온 범죄집단이자 탈레반공격에 협조해온 <북부동맹>에게 공직을 대거 배분했다. 그러면서 역내 에너지사업장악을 추진하고 아프간인접 구소련국가에 13개미군기지를 세우며 이지역에서의 침략책동을 본격화했다. 2006.9 나토가 이끄는 아프간평화유지군은 탈레반을 상대로 <눈사람작전>대규모군사공격을 감행해 탈레반200명을 사살했고 10월 라마단폐막축제때는 나토공습으로 민간인60명이상이 그자리에서 학살됐다. 이같은 학살사건은 미군·나토의 아프간주둔기간내내 발생했고 외국군에 의한 민간인의 인권말살, 감옥안에서의 고문·구타·학대·사망사건은 비일비재했다. 미국·나토가 아프간에 <풍요로운시장경제>를 언급한것과 달리 실제 전쟁후 1년만에 아편생산량은 180t에서 3000t으로 증가했고 2018 세계헤로인생산의 93%에 해당하는 9000t까지 마약생산이 급증하며 아프간은 세계마약시장으로 전변됐다. 최근 에브라힘라이시이란대통령이 아프간에서 마약류경작이 크게 증가한것은 이나라를 점령했던 미국·나토탓이라고 언급한 이유다. 한편 미브라운대왓슨연구소자료에 따르면 아프간에서의 총사망자수는 24만1000명으로 이중 아프간민간인7만1344명, 아프간군인·경찰7만8314명, 반미무장게릴라8만4191명이 사망했다. 미군을 제외한 절대다수가 아프간민중이며 오랜전쟁으로 인한 궁핍·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를 더하면 훨씬 많은 수가 학살됐다.
2010 중앙아시아·북부아프리카에 불어닥친 <아랍의봄>은 미국의 주도하에 일어난 <색깔혁명>의 일환이다. <색깔혁명>은 미CIA의 지원을 받은 NED(전미민주주의기금)등이 반미국가내 친미세력을 키우고 친미반정부활동에 자금을 투여하며 사회내분을 조작해 미국식<민주주의>를 확산시키며 친미정권을 세우기 위한 의도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말한다. 2010부터 이집트·예멘·알제리·시리아·바레인·요르단·이라크·리비아등으로 <아랍의봄>이 확산된다. 한편 아프리카최대산유국 리비아는 2003 미국과의 협상결과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완전히 폐기한 상태였다. 2011.2 리비아 카다피정권이 <아랍의봄>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유엔안보리는 경제제재를 가했고 국제형사재판소에 리비아건을 직접 회부했다. 유엔안보리는 그후에도 거듭 반리비아결의를 채택하더니 2011.3 유엔안보리결의통과 2일만에 나토는 대대적공습을 개시했다. 공습은 <카다피정권으로부터민간인보호>·<비행금지구역설정>등을 내세웠다. 실제로는 과도한 군사력사용과 무차별파괴로 리비아민중들을 학살하고 리비아전국토를 초토화시켰다. 나토군은 약5개월간 무려 7500번공습하고 2만여번출격했다. 그결과 공습2달만에 민간인 약 4718명이 사상됐다. 나토는 초반 <민간인보호>에서 이후 카다피정권붕괴로 목적을 변경했고 카다피정권붕괴후엔 <리비아철수시기는시민위협이사라질때>라며 계속 주둔기간을 늘리면서 무차별공습을 심화하더니 2011.11 <리비아는마침내자유를얻었다>며 작전을 종료했다. 리비아민중들이 미국·나토의 군사적침략과 정치적지배로 인해 <자유>를 얻지못했다는것은 10년간의 내전과 이후 계속되고있는 정치불안으로 확인된다. 카다피정권이 사라진 곳에 군벌들이 난립하며 민중들의 고통이 가중된 근원은 분명 미국·나토에 있다.
나토의 반러·반중·반북책동과 핵전쟁위협
2022.2 시작된 우크라이나전은 나토의 동진과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의 러시아계에 대한 학살, 우크라이나정부에 의해 돈바스침공이 임박했던 상황에 따른 필연적결과로,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이라고 명명하며 사실상의 예방전쟁을 실시한 이유다. 실제 미국·나토는 공공연히 러시아인근에서 대러침략군사연습을 감행했고 우크라이나신나치군대를 훈련시켰으며 러시아인근 나토가입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대러침략책동을 벌여왔다.
우크라이나전이 시작되자 나토는 불가리아·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등 러주변국에 신규나토병력을 증파하고 미국을 비롯한 나토회원국들은 천문학적규모의 침략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쏟아붓고있다. 러시아가 4월 미국·나토를 향해 <대리인(우크라이나)을통해러시아와의전쟁에참여하고있다>고 경고하고 우크라이나무기지원에 대해 <3차세계대전>·<핵전쟁>을 언급하며 강경하게 나온 이유다. 나토는 우크라이나전이 한창인 6월 나토회원국·파트너17개국이 참여한 대규모항공연습 람슈타인레거시22를 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전역에서 실시했다. 이연습에는 나토군3000명·전투기50대·대공미사일방어체계17개등이 동원됐다. 나토연합군공군사령관 제프해리지안은 <러시아의우크라이나침공이후현재의안보상황을고려할때나토에게이같은대규모훈련은그어느때보다중요하다>며 대러침략전쟁연습임을 분명히 했다. 같은시기 나토는 16개국·7000여병력을 동원한 대규모해상연습 발톱스도 전개했다. 발톱스에는 당시 나토정식회원국이 아닌 핀란드·스웨덴까지 참가해 러시아에 대한 침략책동을 강화했다.
나토는 2022.6.29 마드리드정상회의을 시작했다. 정상회의시작전인 6.1 토니블링컨미국무장관과 옌스스톨텐베르그나토사무총장은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나토정상회의에서 새전략개념채택을 예고하며 <EU와인도·태평양지역파트너들과의관계강화>·<새전략개념은중국·러시아와같은권위주의국가들에대응하는내용을담을것>이라며 나토의 대러·대중군사기구로의 변모를 드러냈다. 이보다 앞서 2021.6 브뤼셀정상회의에서 바이든이 <중국이우리의안보,번영,가치에야기하는도전에맞춰새전략개념을만들것>이라며 나토중심의 반중전선을 언급한 사실은 나토가 미국의 침략정책에 충실히 따르고있다는것을 보여준다. 마드리드정상회의기간 나토는 러시아의 <3차세계대전>경고에도 불구하고 스웨덴·핀란드의 나토가입을 사실상 확정했고, 반중·반북전선강화를 위해 인도·태평양지역 친미세력·친미국가수반들을 결집시켰다. 새전략개념은 <(중국은)우리의이익,안보,가치에도전하고있다>·<중국·러시아의전략적동반자관계가깊어지고있다.국제질서를약화하려는양측의시도는우리의가치와이익에반한다.>고 명시했다. 러시아에 대해선 <나토회원국안보와유럽과대서양지역의평화·안정에가장심각하고도직접적위협>, 북등에 대해선 <이란과북은핵과미사일프로그램을지속적으로개발하고있다>·<시리아,북,러시아는비국가활동세력과함께화학무기사용에의존해왔다>고 적대의식을 드러냈다. 나토가 현시기 반러침략기구에서 반러·반중·반북침략기구로 탈바꿈한것은 우크리아전의 전유럽으로의 확전과 남코리아전·대만전을 불러오는것으로 나토가 핵전쟁소굴임을 입증하는것이다. 중국측이 나토의 침략책동에 극도로 경계하며 마드리드정상회의에 참여한 남코리아·일본을 비판하고, 정상회의을 앞두고 러시아가 핀란드·스웨덴과 가까운 백해(White Sea)내에 세계최대규모의 핵잠수함2척을 부상시키며 정치·군사적대응을 한 이유다.
나토의 과거와 현재는 미국·나토가 미치는 곳마다 어김없이 전쟁이 발발했다는것을 보여준다. 미국·나토의 세계를 위협하는 핵전쟁책동에 맞서 반제자주세력이 핵·미사일무력을 강화하고 정치적으로 단결하는것은 당연하다. 제국주의침략세력이 반제자주세력과 세계민중들에 의해 격퇴되고 몰락하는것은 정의며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