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2.12 항쟁의기관차〉 도전과 난관을 뚫고 정세를 주도한 북의 전략 

〈2022.12 항쟁의기관차〉 도전과 난관을 뚫고 정세를 주도한 북의 전략 

1979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이 민중의 항쟁속에 막을 내렸다. 1980.5 전두환군부가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권력을 장악했다. 군사파쇼정권은 이어졌지만 오래갈수 없음이 확실했다. 남민중의 각성과 진출은 막을수 없는것으로 되고있었다. 1980.10 북은 조선노동당6차대회에서 1980년대말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경제건설10대전망목표·자주적평화통일·온세계자주화를 과업으로 제기했다. 1980년대 북은 미국에 평화협정제안을 했고 전두환정권과의 대화도 추진했다. 1987 6월항쟁으로 군사파쇼권력이 결정적타격을 받고 마침내 대통령직선제가 실현됐다. 대선에서 민주연립정권이 수립되면 남북관계에서도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날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진영의 후보단일화실패와 KAL기폭파사건등 <북풍>공작에 군사파쇼정권이 연장됐다. 한편 고양된 민주화의 열기는 자연히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남북간의 민족통일전선과 남내의 민족민주전선노선이 추진됐다. 북은 1980년대말 소련사회주의의 변질과 중국사회주의의 <개방>노선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1990.5.24 김일성주석의 시정연설은 1973 <조국통일5대방침>에서 천명한 단일국호에 의거한 <유엔가입>안을 단일의석의 <유엔가입>으로 조정했고 결국 남단독가입에 맞선 남북동시가입으로 됐다. 1991.12 소련이 붕괴했다. 그하루전 북에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됐다. 1985.12 북은 소련으로부터 경수로핵발전소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NPT(핵비확산조약)에 가입했다. 1980년대말 국제적으로 북의 핵개발의혹이 제기됐으며 남북정부간 대화를 통해 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상층민족통일전선의 북남고위급회담이 갖는 의의가 있었지만 남정권은 남북간의 하층민족통일전선을 불법화하면서 민중통일운동을 탄압했다. 비핵화공동선언합의로 1992 미남합동북침핵군사연습<팀스피리트>를 일시중단했으나 1993.3 재개했다. 북에서는 최고사령관의 준전시상태명령이 하달됐다. 이어 북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영변핵시설특별사찰요구에 대응해 3.12 NPT탈퇴를 선언했다. 탈퇴발효시일하루전인 6.11 북미고위급회담이 뉴욕에서 개최됐다. 그직전인 5월말 북의 공식적인 첫탄도미사일시험발사가 있었다. 1994 북은 미국과 협상해 미국의 경수로발전소건설지원과 대체에너지인 중유공급 나아가 북미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합의했다. 이 10년기한의 합의는 미국이 북의 붕괴를 전제로 한 거짓약속이었다. 허나 미국의 북핵개발의혹소동은 북의 핵개발을 기정사실화했으며 2003 북의 NPT탈퇴이후 핵무장화를 막을수 없었다. 이무렵 북은 탄도미사일시험발사를 했으며 1995 선군혁명노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무력을 전면적으로 강화했다. 1998 인공위성발사도 성공했다. 북의 정면돌파전은 멈추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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