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백은 항일민족해방운동을 하던 여느 인사들처럼 3.1운동에 참가하며 활동하다가 1928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에서 활동중 체포돼 남경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성시백은 이시기 김구등 임시정부인사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범석·김홍일등과도 가까웠다. 정향명은 중국시기부터 사용했던 성시백의 가명이다. 남의 한자료에 의하면 해방이후 그는 부산을 거쳐 서울을 들렀다가 1946.2 평양에 도착했다. 성시백은 1946.8~11 남에서의 남조선공산당과 인민당·신민당의 3당합당과정에 박헌영의 독단과 오류를 겪으며 이에 대한 상황을 북로당(북조선노동당)에 보고했다. 1946.11 남로당(남조선노동당)결성뒤 성시백은 박헌영의 파벌싸움에 떨어져나간 인사들에 대한 조직사업을 위해 서울에 머무르게 됐다. 북의 보도에 따르면 성시백은 서울에 있으면서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의 신문들을 경영하며 서울만이 아니라 영어·중어·프랑스어로 된 화보<해방조선>과 <조국통신>을 발행해 국제우편으로 세계 여러나라들에 배포하는 선전사업을 벌였다. 그는 북·중국과의 무역업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당시 남에서의 사업은 남로당이 지도하고있는만큼 성시백은 조직을 꾸리는 방식의 조직운동은 하지않았다. 1946.12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포기한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는데 얼마뒤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주석을 만나고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성시백은 이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또 성시백은 공산당내에 반박헌영파인사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북로당과 연계시켜 활동을 계속할수 있도록 도왔으며 그결과 이들도 1948.8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할수 있었다. 노동신문은 김일성주석이 1948.4 남북연석회의당시를 회고하며 성시백의 활동이 컸다며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고 보도했는데 남의 한자료에서 이무렵 성시백이 서울에 있는 북로당의 전권대표격이었으며 북로당의 대표성을 갖고 남의 각정당과 지도자들을 만나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설명했다. 한편으로 성시백은 광복군·조선의용군의 인맥으로 남국방부와 각병종사령부등 군부계통에도 정보조직을 갖고있었으며 그외에도 정부와 경찰, 정보계통, 미군부대들과 서울주재 미군총사령관, 장개석의 영사관, 그리고 일본·홍콩등 해외에까지 정보조직선이 있었다. 성시백은 1948 남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남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도 사업했다. 국회내의 소장파의원들은 미군철수와 남북협상에 관한 국회동의안을 준비하고있었다. 성시백은 개별인사들이 이를 개인적인 정치적입장으로 호소하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었을때 조직적행동에 나서야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남로당계열과 선이 닿아있던 일부인사들이 성급하게 국회동의안을 제출하자 남당국이 이를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조작해 모두 함께 체포했다. 1949 춘천지역 8연대소속 2개대대가 월북한 사건과 공군기나 해군초계정등의 월북등도 성시백의 활동에 의한것이었다고 한다. 남자료에 의하면 1948.8 이승만정부수립이후 수사당국은 중경임시정부요인들중에서 정치권에 나오지않고 고향이 이북이면서 별이유 없이 남쪽에 와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오제도검사를 수사책임자로 성시백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했다. 직접적으로는, 북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성시백은 박헌영수하의 남로당요직에 있다가 투항변절한 자들이 밀고해 체포됐다. 남당국이 성시백사건의 1차조사로 체포한 인원만 112명이었다. 2차조사는 전쟁으로 중단됐다. 성시백은 1950.5.15 체포돼 그로부터 25일만인 6.9 육군형무소에서 사형을 언도받았고 전쟁이 발발한지 이틀만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하기 하루전인 6.27 새벽5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북에서는 성시백에게 첫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했으며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가묘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