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3.4 항쟁의기관차〉 라틴아메리카민중의 자주와 해방을 향한 전진

〈2023.4 항쟁의기관차〉 라틴아메리카민중의 자주와 해방을 향한 전진

스페인 식민지화와 독립전쟁

아시아인들은 약4만년전부터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대륙에 이주한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적발굴에 따르면 2만2000년전 원시적수렵채집인들이 페루를 통과했으며 9000여년전 큰 동물들을 따라 아메리카대륙전체에 아시아인들이 유입된것으로 보인다. 수천년간 아메리카원주민들은 외부와 단절된채 살아왔다. 1492경 유럽인들이 확인한 대륙의 모습은 유럽과 문화적발전단계가 같다는것이었다. 이시기 핵심작물인 옥수수는 미북부에서 칠레까지 넓은 지역에서 경작됐고 농지경작형태도 지역별특성에 따라 다양했다. 집단형태도 소부족에서 아스테카·마야·잉카와 같은 제국까지 여러모습으로 형성됐다. 이같은 사실은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발견>한것이 아니라 침략했다는것을 증명한다. 

1492 크리스토퍼콜럼버스의 아메리카상륙이후 스페인은 황금·향료·노예에 광분하며 무자비한 살육과 살인적인 노동착취를 감행했다. 그로인해 2년동안 아이티원주민의 25만명중 절반이 사망했고 1650보고서에 따르면 순수아라와크족이나 그후손이 1명도 남지않을정도로 씨가 말랐다. 한편 콜럼버스의 침략이후 스페인인들은 대거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해 내륙까지 침략을 감행하고 사금약탈과 대농장에 원주민노동력을 동원했다. 그러다 1500년대초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농업이 급속히 발전하자 원주민노동을 대체할 흑인노예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스페인국왕은 점령지에 총독을 임명하고 엔코미엔다제도를 도입했다. 엔코미엔다제도는 침략자에게 원주민을 <돌볼> 책임을 부여하고 원주민은 침략자에게 공납·노동을 바쳐야하는 제도다. 이는 끔찍한 노예제와 다르지않았다. 일례로 히스파니올라섬의 인구는 20년만에 수백만에서 2만9000명으로 줄었는데 이지역에 전염병발생기록이 없다는것에서 순수 학살·학대·착취로 인해 원주민들이 사망했다는것을 확인할수 있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식민체제는 3가지특징이 있다. 우선 경제구조·사회조직·이념이 대단히 봉건적이었다는점이다. 또 유럽인·혼혈인·흑인에게 각각 다른 법적지위를 부여하고 행동·생활양식을 규제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식민체제가 스페인국왕과 식민지지배자들간의 갈등에 뿌리를 두고있다는점이다. 국왕은 식민지내 영주계층의 성장을 억누르기 위한 여러법·제도를 제정했고 원주민노동력·공납을 둘러싼 두세력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다 스페인의 쇠퇴와 함께 식민지지배자들이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된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광산·대농장·목장등을 통해 부를 축재해온 크리오요와 스페인에서 태어난 페닌술라르간의 분열이 가속화됐다. 식민시기대부분 크리오요들은 여러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이는 크리오요들이 라틴아메리카독립운동에 나선 이유중 하나다. 

침략자에 대항한 원주민들의 저항이 꺾이고 라틴아메리카가 스페인식민지로 전락한 이래 1700년대가 되면서 키토폭동·레알델몬테은광광산노동자파업·세금철폐봉기·누에바그라나다반란등 폭압·착취에 대항한 각종투쟁들이 전개됐다. 더해 18세기 계몽사상과 미국독립혁명·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크리오요들이 점차 라틴아메리카독립투쟁에 나선다.

스페인령 남아메리카에서는 베네수엘라에서 남쪽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2개흐름의 해방투쟁이 전개됐다. 이흐름은 스페인군의 최후보루였던 페루에서 합류했다. 크리오요귀족출신의 시몬볼리바르는 1809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1811 베네수엘라의회가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작성한 공화국헌법초안은 자치특권·원주민공납은 폐지하되 흑인노예제는 존치시키고 시민권은 유산계층에만 부여하는식으로, 한계가 뚜렷했다. 이후 여러전투에 승리하며 자메이카에서 아이티로 건너간 볼리바르는 물라토신분의 아이티대통령 알렉상드르페시옹에게 물질적지원을 받는 대신 노예해방에 앞장설것을 약속했다. 1819 볼리바르는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노예제폐지와 혁명참여병사들에게 토지분배를 담은 베네수엘라헌법초안을 제출했다. 의회는 볼리바르를 공화국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이내용들을 상당히 반영한 헌법을 채택했다. 오늘날의 베네수엘라·콜롬비아·에콰도르·파나마지역이 스페인지배에서 해방됐고 1821 볼리바르의 주도로 그란콜롬비아가 수립됐다. 이어 1824.8 페루를 해방시켰다. 

남부지역해방운동의 지도자는 산마르틴이다. 현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로 가는 전략적통로를 돌파해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산티아고로 향했다. 1818 마이투전투에서 또 승리하며 칠레를 해방시키고 뒤이어 리마도 해방시켰다.

한편 포르투갈령 브라질은 프랑스의 포트투갈침공과 맞물려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해방을 맞이했다.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식민지화

1797 미국·라틴아메리카간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1811 스페인식민지와의 교역이 미전체무역량의 16%를 차지했다. 라틴아메리카를 두고 1812 영미전쟁이 일어났지만 1820년경에는 교역량이 20%로 증가했다. 1803 프랑스가 아이티·루이지애나에서 철수했고 1820년대 영·미동맹이 모색되는 와중에 라틴아메리카각국의 독립은 스페인을 역내에서 몰아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1823.12 미국은 먼로선언을 발표했고 남아메리카에 외채상환·배상금지불등을 빌미로 침략해오는 영국·프랑스를 막겠다며 183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남아메리카곳곳에 미군부대를 상륙시키며 제국주의적야욕을 드러냈다. 한편 19세기 영토팽창과정에서 멕시코와 2차례전쟁을 벌이며 애리조나·뉴멕시코·캘리포니아를 병합했다.

1800년대후반 들어 미자본의 라틴아메리카투기가 본격화됐고 카리브의 이권장악을 목적으로 아이티내전에 개입했다.

1895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지배권이 사실상 확정됐다. 베네수엘라와 영국령기아나는 남아메리카북부지역 오리노코강어귀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다퉈왔다. 1880년대 들어 베네수엘라는 영국과 국교를 단절한뒤 1893~94 미국에 문제해결을 요청했으며 1895 베네수엘라정부는 미국의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미기업들에 광산지역토지를 조차하며 굴욕적으로 나왔다. 1896 베네수엘라는 배제된채 영·미간 이문제가 논의됐고 1901 영국은 헤이폰스포트조약을 체결하며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권한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898 미국·스페인전쟁으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이 완전히 확고해졌다. 

미국은 1904 큰몽둥이정책(Big Stick Diplomacy)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침략정책을 정당화했다. 1898~1932 미국은 카리브해인근의 도미니카공화국·니카라과·아이티·파나마·온두라스·멕시코·과테말라·코스타리카를 장기적으로 통치하거나 단기적으로 침공했고 이지역을 식민지화했다. 한편 1903.11 콜롬비아내 반란을 유도해 파나마를 명목상 독립시키며 운하를 장악했다. 1887~1914 쿠바·서인도제도에 대한 투자가 5000만달러에서 3억3600만달러로 7배 증가했고 중앙아메리카에 대해서는 2100만달러에서 9300만달러로 4배가 늘었으며 1929 미국의 대라틴아메리카 총<투자>액은 해외총<투자>액의 35%인 54억달러에 달했다. 이시기 향후 초국적기업으로 변모할 미기업들이 라틴아메리카에 전면적으로 진출했다. 

라틴아메리카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은 날로 증폭돼 장기적으로 미자본의 손실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1920~30년대 미국은 유화책을 실시했다. 일례로 1920년대 멕시코내 미국인투자보호를 위한 군사개입을 포기했고 1933 니카라과와 아이티에서 미군을 철수했으며 플래트수정안을 폐기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불러왔다. 쿠바에서 풀헨시오바티스타를 조종해 쿠바내 독재체제를 형성했으며 1934~41 15개국과 상호무역협정을 체결하며 경제적약탈을 심화했다.

2차세계대전후 사회주의가 확산되자 미국은 냉전을 내세워 이지역에 대한 지배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미트루먼정부는 1946 칠레·볼리비아·아르헨티나의 내정에 개입했으며 1947 리우조약으로 라틴아메리카는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1948 <집단안보체제>를 앞세운 미주기구(OAS)가 설치됐다. 더해 군사적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1 군사방위원조법을 통해 라틴아메리카국가들의 군대창설에 3850만달러를 투입했다. 이후 카리브해주변지역에 대한 군사<원조>금액은 5억달러가 넘었으며 이금액에는 수천명의 라틴아메리카군장교들의 훈련비용이 포함됐다. 미국은 미정책에 반하는 각국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쿠데타를 본격화했고 군사파쇼권력들을 지지·조종했으며 이것이 통하지않을때는 직접 침략했다. 

1990년대말에서 2000년대는 라틴아메리카를 신자유주의경제체제로 편입시키는 방법을 통해 무한대한 약탈을 추구했다. 미주도의 서반구공동시장에 라틴아메리카를 편입시켰는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대표적이다. 한편 클린턴미행정부시기 마약밀매저지명분으로 전개된 플랜콜롬비아를 통해 콜롬비아군부에 대한 반혁명전쟁지원에 수십억달러를 투입했다. 1996 주콜롬비아미대사 마일프레켓은 기밀문건에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에 대한 <마약밀매상>이라는 평판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대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 콜롬비아군부가 만들어낸것이라고 밝혔다. 표면적임무는 <반마약작전수행을지원>하는것이지만 실제임무는 <콜롬비아군에게대게릴라전교범훈련을제공하는것>이라고 한미군특수부대교관은 실토했다. 

친미군사파쇼에 의해 억압받는 민중들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지배전략중 하나는 군사파쇼권력의 강화에 있다. 1959 쿠바혁명승리이후 수천명의 라틴아메리카군장교들은 미군기지및여러시설에서 대게릴라전쟁에 필요한 훈련과정을 이수했다. 1946 미국이 세운 아메리카학교(SOA)는 개교이래 5만6000명이상의 라틴아메리카군인들을 훈련시켰다. 유엔진실위원회에 따르면 SOA졸업생들은 엘살바도르에서 수많은 학살과 악행을 지휘·명령했고 SOA에서 사용된 고문기술에 대한 매뉴얼이 파라과이의 <공포의문서고>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미군은 SOA를 서반구안보협력기구로 이름을 바꾸며 계속 운영하고있다. 

CIA(미중앙정보국)는 라틴아메리카군대와 반게릴라프로젝트를 사실상 지휘하고있다. 1954 과테말라개혁정부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CIA는 정부주요인사에 대한 <암살검토>문건을 작성했으며 1960 드와이트아이젠하워미대통령은 <카스트로제거>문서를 인가했다. 1961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반파쇼봉기가 일어나자 린든존슨미대통령은 카스트로식 <공산주의>정부의 출현을 막기 위해 라틴아메리카에 일방적으로 개입할 권리가 있다며 강변했다. 존슨정부기간 미국은 1963 브라질에 대한 <원조>를 최소화하고 친미주지사에 대한 자금지원을 시작하며 브라질민주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 1964.4 등장한 브라질군부는 15년간 야만적인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아르헨티나군부는 1966.6 정부를 붕괴시키고 군사독재를 시작했으며, 미국은 이정권에 3년간 1억3500만달러를 투입했다.  

미국은 살바도르아옌데가 칠레대선에서 근소한 차로 낙선한 1958부터 15년간 아옌데의 당선을 막기 위해, 1970 당선후에는 아옌데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칠레에 수백만달러를 쏟아부었다. 초반에 군사쿠데타가 실패하자 닉슨미행정부는 경제<원조>를 90% 삭감하고 차관제공을 거부하며 경제제재했다. 미CIA는 칠레의 아옌데의 대통령취임을 방해하고 피노체트가 민주정부를 전복할수 있게 조종했다. 한편 미CIA는 콘도르작전을 통해 1970~80 남아메리카독재자들이 진보·민주세력을 제거하는것을 지휘했다. 

이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야욕에 의해 군사파쇼권력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으며 1976중반에는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볼리비아·우루과이·파라과이등을 포괄한 야만적인 군사파쇼블록이 형성됐다.

자주와 민주를 향한 투쟁

친미세력과 파쇼권력에 대항한 라틴아메리카민중의 투쟁은 근래에 올수록 격화됐고, 일부나라에선 일정한 성과들을 쟁취했다. 특히 1920년대 수립된 라틴아메리카각국의 공산당·사회주의정당들은 민중을 해방투쟁에로 추동했다. 1922.3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공산당이 결성됐고 1930 중간세력중심의 자유주의혁명으로 부르주아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해방국면에 1931 브라질흑인전선은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대규모시위를 조직했지만 자유주의정부는 진보세력과 좌파야당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했다. 1945.10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공산당을 탄압하고 투표권확대를 거부했는데, 공산당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1945선거에서 50만표이상을 득표했다. 군부세력은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공산당소속의원들을 제명했으며 노동자연맹을 불법화했다. 그럼에도 민중운동은 계속 발전해 변혁을 촉구했다. 

아르헨티나에선 1916 급진당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정부정책은 보수적재정정책과 온건한 사회개혁을 결합한것으로, 미국의 경제적개입과 지주층을 비롯한 기존권력을 유지한채 중간층의 이권을 도모하는 개량적성격을 띠고있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1916·17 파업에 돌입했는데 영국과 지배세력이 군을 동원해 파업을 분쇄하도록 아르헨티나정부를 압박했다. <비극의한주간>은 1919.1 발생했다. 금속공장에서 시작한 파업이 총파업으로 확대됐는데 정부가 경찰·군대를 대동해 노동자들을 대량학살한것이다. 1930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로 인해 경제대미예속은 더욱 심화됐다. 각성한 노동자들은 1930년대 노동자총연맹을 조직했고, 1943 조합원수는 30만~35만명에 달했다. 후안도밍고페론의 개량주의정책이후 1955 군부반란으로 인해 정치적혼란이 가중되고 대미예속성은 더욱 심각해졌다. 1969봄 노동자·학생의 분노가 폭동으로 전화됐고 수많은 집단들이 도시게릴라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혼란상을 틈타 1970.6 군정보·반란진압작전전문가였던 로베르토레빙스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군사통치하에 3만여명의 아르헨티나민중들이 우익암살단에 의해 학살됐다. 인권단체들은 공산당과 연계돼 군사독재에 맞섰고 청년들 역시 군부의 학교침탈등에 맞서 싸웠으며 지역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조직들은 토지점거투쟁을 전개하며 파쇼정권에 대항했다. 

안데스지역에선 농장주들에게 탄압받던 원주민들이 중심이 돼 투쟁을 전개했다. 20세기초 원주민무장운동(카시케들)이 안데스고원지역전역에 확산됐다. 1921 아이마라봉기, 1927 차얀타봉기등 폭력투쟁으로 공동체토지·문화적전통을 지키려했다. 페루에서는 1900초 조직적노동운동과 파업이 발생했고 1차세계대전기간 광부·부두노동자·섬유노동자들은 식품가상승에 분노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원주민운동의 이념으로 인디헤니스모를 들수 있는데 페루지식인들은 잉카제국을 원시적형태의 사회주의사회라고 여겼다. 호세카를로스마리아테기는 인디헤니스모와 맑스주의의 결합을 시도했으며 1928 페루공산당을 창당했다. 

볼리비아에서는 1932~35 파라과이의 차코전쟁에서 볼리비아가 패배하자 볼리비아군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분노가 팽배해졌다. 1942 군부가 광산노동자·가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카타비학살이 발생하자 개혁세력들은 민족주의혁명운동(MNR)을 조직해 대규모시위를 이끌고 개혁정부를 수립했다. 3년후 정부수반인 괄베르토비야로엘이 암살됐지만 6년간의 투쟁을 통해 민족주의혁명운동이 농촌과 도시 거점들을 결집시켰다. 개혁정부는 초반 민중중심정책을 시행하다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결국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배제하고 광산노동자의 복지혜택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변질됐다.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격화되고 민병대가 조직되자 개혁정부는 미국식훈련을 받은 정규군재건에 동의했고 이는 결국 1964 군부의 권력장악으로 이어졌다. 1982에 이르는 장기간의 군부통치에 환멸을 느낀 민중들은 1985선거에서도 유권자의 2/3가 투표에 참여하지않았다. 1986 신자유주의책동에 맞서 광산노동자들은 수직갱도점거·단식투쟁을 전개했고 전국여성농민연맹은 전국적동조파업·점거시위로 연대했다. 

1901 칠레 북부광산지대 이키케에서 최초의 대규모파업이 2달동안 일어났으며 1907 초석노동자들의 파업이 단행됐다. 정부는 군을 투입해 2000여명을 학살했다.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1909 칠레노동자연합이 설립됐고 3년후 사회주의노동당이 창설됐는데 이당은 1922 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1930 사회당·공산당·급진당은 인민전선을 구성했고 대통령후보인 급진당출신이 1938·46대선에서 승리했다. 냉전의 영향하에 1946집권한 곤살레스비델라는 우파로 돌아서 공산당출신각료들을 축출하고 공산당을 불법화했으며 북부사막지역에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공산당원과 좌파활동가들을 수감했다. 그럼에도 1953·58 사회당·공산당을 포함한 좌파정당들은 인민행동전선을 결성하며 연대를 복원했다.

무장투쟁으로 쟁취한 쿠바혁명

미국의 쿠바예속화는 1800년대말부터 본격화됐다. 1896 미회사들은 쿠바에 5000만달러를 투입했고 설탕산업을 지배했다. 1892 쿠바혁명당을 창당한 호세마르티는 해방전쟁을 수행중에 사망했지만 그럼에도 쿠바혁명은 확산됐고 해방군은 게릴라전술을 통해 큰 승리를 거뒀다. 해방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스페인체제의 붕괴와 혁명정부수립을 우려한 미국은 1898.2 아바나항에서 미선박 메인호를 폭발시키며 군사개입의 구실을 조작했고 쿠바혁명군을 완전히 무시하며 3년간의 전쟁성과를 가로챘다. 미국은 쿠바지도자들을 평화협상에서 배제하며 쿠바식민지배를 예고했다. 

미국은 1899.1~1902.5 쿠바를 점령했고 플래트수정안을 헌법에 포함할것을 강압했다. 플래트수정안은 독립국 쿠바의 외교권과 해외자금조달권리를 제한하고 미국에 관타나모해군기지유지권리를 부여했으며 미국의 쿠바내정간섭을 허용했다. 이후 미국은 쿠바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1906·20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직·간접적으로 통치했다. 1933 아프리카계쿠바인공산주의자 레온알바레스가 이끄는 20만노동자가 학생시위에 가담하면서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평의회를 구성했다. 정권운영능력이 없던 혁명평의회는 1주일만에 라몬그라우산마르틴에게 정부주도권을 넘겨줬다. 그라우는 플래트수정안을 폐지하고 여러사회개혁을 실시했지만 결국 미국의 압박에 의해 1934.1 망명을 했고 권력은 폴헨시오바티스타이살디바르에게 넘어갔다. 권력을 사실상 장악한 바티스타는 쿠바공산당불법화·노동자파업폭력진압·조합철폐등의 파쇼통치를 감행했다.

1953 피델카스트로세력이 몬카다병영을 습격하며 무장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카스트로의 혁명운동은 역대 혁명전통을 계승하고있었다. 카스트로가 호세마르티의 사상을 강조해온 이유다. 몬카다병영습격에 실패한 카스트로는 <역사는나에게무죄를언도하리라>는 재판변론으로 일거에 민중적영웅으로 부각됐다. 19개월간 구금돼있는 동안 <7.26운동>이 결성됐고 이들은 반바티스타조직과 정치동맹을 결성했다. 1955 사면된 카스트로는 시에라마에스트라산악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정부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무장투쟁과 민중항쟁이 결합된 혁명전쟁의 결과 1958 카스트로가 승리했다. 

카스트로는 혁명승리이후 1959.2 공화국헌법에서 입법권을 행정부에 편입시키고 바티스타추종자들을 공개적으로 제거했으며 토지개혁·소득재분배·농업다양화·경제독립등의 경제목표를 달성하고 정치적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더해 정유공장을 비롯한 미자본을 몰수했고 이에 미CIA는 반카스트로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금제공·군사훈련등을 감행했다.

1961.3 미침략군대가 피그만에 상륙하며 쿠바침략을 단행했지만 카스트로혁명정부에 의해 격파됐다. 침공 1개월후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를 따를것을 선언했다. 미CIA는 친미세력을 이용한 정권전복, 정유시설·항구습격, 첩보원침투, 카스트로암살작전등으로 혁명정부를 붕괴시키려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쿠바는 소득분배·보건·교육·실업률지표·식량배급·자택소유등 전반에 걸쳐 뛰어난 성과를 기록했다. 이는 1960~85사이 쿠바경제성장률이 라틴아메리카에서 2번째로 높으며, 1980 카리브해다른지역의 이민자들이 전체인구의 20%에 달하는 반면, 쿠바이민자들은 2%에 불과하다는것을 통해 확인된다.

항쟁 없이 세상을 바꿀수 없다

1958 칠레대선에서 인민행동전선(인민연합)의 살바도르아옌데가 1위인 보수당측과 비교해 3만3500표차로 아쉽게 낙선했다. 외국자본의 대량유입과 외국차관에 따른 이자·부채상환등으로 사회적재부가 대거 유출되고 경제위기·민생파탄은 계속 심화됐다. 한편 미국은 인민행동전선을 견제해 기민당(기독교민주당)에 자금을 투입했고 보수정당이 결집한 결과 기민당이 1964 집권했다. 기민당정부하에서 15개거대경제그룹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빈부격차는 더욱 심각해졌다. 1966 구리광산노동자들의 잇따른 파업을 군대로 진압하고 임금을 동결시키며 반민중성이 노골화됐고 이에 맞선 노동자들은 공산당계열노조의 지도에 의해 갈수록 강화됐다. 1970선거결과 아옌데가 36%득표로 승리했다. 2위는 35%, 3위는 28%를 득표한, 박빙의 결과다. 아옌데는 당선직후부터 미국·친미군부에 의해 여러어려움에 봉착했다. 인민연합은 의회다수파가 아니었고 사법부·감사원은 아옌데정책에 반대했으며 경제단체·외국회사·군경장교·교회등도 반인민연합에 포섭됐다. 반인민연합정치조직 <민주연대>는 대부분의 언론을 장악하고있었다. 미정부는 아옌데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조직했고 경제제재를 심화했다. 인민연합내부의 노동계급과 중간층간의 분열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아옌데집권 첫해 노동자소득은 50%나 증가했고 여러복지정책들이 시행됐으며 인플레이션은 1년새 12.8%p가 감소하며 실질소득이 30%나 증가했다. 괄목할 성과에 민중들은 1971.4 지방선거에서 인민연합에 50%이상을 몰아주며 화답했다.

집권2년차부터 미국은 칠레의 차관, 수입·수출을 봉쇄했고 그결과 외환보유고가 고갈됐다. 경제침체로 인해 집권첫해성과들이 무너졌다. 1972하반기 아옌데정권은 전면적정치·경제위기에 봉착한다. 1962~70 아옌데당선을 막기 위해 1100만달러를 쏟아부은 미CIA는 1970~73 칠레경제를 흔들기 위해 800만달러를 사용했다. 아옌데정적들은 경제위기를 기화로 사보타주를 일삼았고 미국의 조종하에 각종파업·시위가 조작됐다. 아옌데는 결국 1973.3 의회선거감독을 위해 내각에 군장성들을 입각시키는데 동의하는 과오를 범한다. 한편 혼란속에 치러진 의회선거결과는 아옌데정부에 대한 칠레민중의 지지를 확인시켜줬다. 집권당이 의석을 잃었던 오랜 경향과 달리 인민연합은 1970 36%보다 높은 4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칠레장교들이 반혁명교육을 받고있었고 1973 미국은 통상적군사원조를 2배나 늘렸으며 미국에 의해 군부가 장악됐고 6월 쿠데타가 발생한다. 쿠데타진압후 노동자들이 공장점거·무기분배를 요구했지만 아옌데는 어리석게도 군에 의존했다. 군은 <불법무기>를 색출한다며 공장들을 습격했는데도 아옌데는 군대를 해산하지않았다. 많은 지역의 실권이 군부로 넘어갔고 결국 1973.9 아우구스토피노체트에 의해 아옌데정권이 전복된다. 민중의 힘을 믿고 투쟁으로 전진해야만 민중정권은 공고해질수 있으며 선거로는 결코 세상을 바꿀수 없다.

혁명전쟁에 승리한 니카라과

니카라과는 역사적으로 미국의 군사적개입으로 주권을 강탈당하고 진보세력에 탄압이 집중돼 그세력이 미약했다. 미국은 19세기말 우파민족주의정부를 축출하기 위해 1909 반란을 조작하고 허수아비정부를 세우며 니카라과에 대한 식민지배를 본격화했다. 1912~25 미국은 대리정부를 세워 니카라과를 통치했다. 그러면서 1916 브라이언·차모로조약을 비롯한 여러예속적조치를 통해 운하건설에 대한 배타적권리와 정치적개입이 허용됐다. 

아우구스토세사르산디노는 자유주의투쟁에서 노동자투쟁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원칙들을 언급해온 진보적활동가였다. 맑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미군철거와 진보적사회개혁을 주장했다. 산디노는 1927~33 7년간 게릴라전을 통해 미해병대·니카라과국가경비대에 맞서 싸웠다. 니카라과국가경비대는 1927 미해병대에 의해 조직·훈련된 군대였다. 미해병대철수와 국가경비대해체를 촉구하며 투쟁해온 산디노를 학살한 자가 국가경비대수장 아나스타시오소모사가르시아다. 40년이상 니카라과민중들을 파쇼탄압한 폭군 소모사가 이렇게 등장했다. 

소모사는 파쇼준군사조직 청색셔츠단을 조작하고 1936 선거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잡았다. 미국은 국가경비대장교배출을 위한 군사학교설립을 지원했는데, 출신학생들은 아메리카학교에서 교육·훈련을 받으며 미국의 <사냥개>로 변모했다. 1956 소모사가 암살된뒤 그아들들이 권력을 이어받아 1979까지 직·간접적으로 니카라과를 통치했다. 1970 소모사가문은 니카라과 농업생산의 25%, 산업의 상당부분을 장악하며 사회적재부를 독식했다.

1961 FSLN(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 조직됐다. FSLN은 농촌봉기·비밀정치조직을 핵심전략으로 장기적인 민중전쟁을 준비했다. 한편 1972 지진에 대한 국제원조대부분이 착복되고 1978 니카라과민중의 피를 미국에 판 상업적혈장거래사실이 공개되면서 소모사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격화됐다. 소모사정권의 살인적탄압에 맞서 1978.8 FSLN은 의사당을 습격해 하원의원대부분과 공무원2000여명을 인질로 잡았다. 총파업과 청년들의 봉기가 거세게 타번졌다. 9월 FSLN이 5개도시에서의 봉기를 기획하자 군은 5개도시폭격을 감행하며 도시들을 탈환했다. 이과정에서 5000여명이나 사망한다. 1979.6 FSLN은총파업을 선언하며 최후공격에 착수했다. 7월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한 FSLN은 혁명평의회와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혼합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소모사와 그주변세력의 막대한 재산을 국유화해 국영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FSLN정부에 의해 사회가 변모하고 괄목할만한 경제적성장을 이룩했지만, 미국의 압력과 농업생산의 80%, 제조업의 75%를 장악하고있는 자본가계급에 의해 정치·경제적위기가 계속 상존했다. 

1979 미CIA에 의해 콘트라무장반군이 탄생했다. 레이건행정부는 반군에 4000만달러를 지원했고 CIA는 콘트라파벌들을 통합해 <니카라과민주주의의힘>을 조작했다. 1981 반혁명활동의 규모가 대폭증가하면서 혁명정부를 흔들었고, 미국·아르헨티나고문단은 소모사주의자들을 훈련시키며 니카라과에 대한 테러공격을 지원했다. 그결과 니카라과군인·민간인이 살해되고 사회제반시설들이 파괴됐다. 더해 베트남참전자들을 용병으로 계약하고 1981에는 온두라스에 니카라과민족해방전선 산디니스타를 파괴하기 위한 비밀전쟁기지를 만들었으며 군정보국316대대를 조작하며 수많은 민중을 고문·학살했다. 

1983.3 대니카라과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됐지만 니카라과군·민병대는 반혁명세력의 공격을 분쇄했고 FSLN정부는 엄혹한 조건속에서도 경제안정·사회개혁확대·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했다. 미국의 콘트라반군에 대한 대규모지원이 계속되는 속에서도 1984.11 대통령·부통령·의원선출선거에서 FSLN이 67%를 득표했으며 1985.1 다니엘오르테가사아베드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6 오르테가는 콘트라반군의 <전략적패배>를 선언했다. 

민중봉기와 선거전술의 결합

1900년대 들어서 집권한 베네수엘라친외세정권은 외국회사의 국내사업양도권을 부활시키고 외국정유회사들의 경제적이권을 보장했고 자유주의지식인들은 임금노동자의 착취와 민간투자에 기반을 둔 경제전략을 신봉했다. 1920년대 들어 중산층까지 반정부정서가 확산됐고 1928 학생·노동자가 중심이 돼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며 4월 청년장교·군사학교생도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는 실패하고 친미정권의 파쇼화가 심화되는 속에 사회혼란이 가속화됐다. 1936 친미정권을 계승한 로페스콘트레라스는 공산주의세력을 <반국가운동세력>으로 규정했고 공산당등 주요야당을 불법화했다. 1929 반독재시위를 이끌었던 핵심인사중 로물로베탕쿠르는 민주행동당을 창설했는데 이당은 경쟁상대였던 공산당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으며 1941~45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했다. 1945 베탕쿠르를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베탕쿠르정부는 사민주의정책을 시행하며 노동조합을 장악하고 원유회사등에 과세하며 증세정책을 시행했다. 베탕쿠르정부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우익군부세력들은 1948.11 무혈쿠데타를 통해 정부를 붕괴시켰고 정부의 주요인사를 체포·구금했다. 베탕쿠르는 당지도부와 함께 국외로 망명했다. 군사정권은 1949.1 노조탄압을 시작으로 노동자연맹지도자를 체포했고 활동을 불법화했다. 불법화된 공산당은 반정부투쟁에서 주도적역할을 하며 비밀저항운동을 전개했다. 국내에 남아있던 민주행동당성원들은 1949 지하조직을 결성했고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포함한 저항운동단체들과 연합해 반독재투쟁을 전개했다. 군사정권은 1952 제헌의회선거결과를 무효화하며 1958까지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단결권·파업권을 억압하고 비밀경찰을 조작해 저항세력을 폭압했다. 반파쇼세력은 1957 애국평의회를 조직해 주요정당들을 통합했고 1958 애국평의회는 총파업을 선언하며 민중항쟁은 절정에 치닫는다. 끝내 군사정권은 붕괴됐고 임시정부는 모든 민주적자유의 회복, 정치범·망명자사면, 모든 정당의 합법화등을 담은 포고령을 발표했다. 

베탕쿠르는 국내로 돌아와 온건주의자·자본가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58 푼토피오협정을 체결한다. 이협정은 3당연립을 표방하고있지만 사민주의적인 민주행동당과 사회기독당인 독립선거정치조직위원회가 정치의 실질적주도권을 장악했고 진보세력의 정치적진출을 억압했다. 이후 베네수엘라는 친미보수와 친미개혁간의 권력양분하에 민중의 정치·경제적권리는 계속 박탈된다.

베네수엘라의 대미예속성은 1971 외국투기자본총누적액이 55억7000만달러, 이에 따른 이윤유출이 연평균 6억7200만달러에 달해 <외국독점자본의조세특례국>으로 전락한것으로 확인할수 있다. 경제위기·민생파탄이 심각한 와중에 베네수엘라민중들은 1989.2 IMF구제금융에 따라 노동자임금인상분의 절반을 삭감시키고 버스요금을 비롯한 생활물가를 급등시키는 정부발표에 격분하며 카라카스항쟁을 일으킨다. 페레스정부가 폭력적으로 항쟁을 진압한 결과 사망자수가 400~1000명에 달했다. 정부에 대한 반감은 중산층과 하급군장교들에게 확산됐고 1992.2.4 우고차베스프리아스중령이 전군의 10%를 동원해 좌익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차베스는 민중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1990년대 들어 빈곤율은 거의 2배가 증가해 국민62%가 빈곤선이하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던 심각한 상황에서 차베스는 1998 대선에 승리한다.

차베스는 볼리바르혁명을 통해 교육·주거·의료등 전분야에 걸쳐 근본적변혁을 이뤄냈고 볼리바르써클이라는 대중조직을 형성했으며 민중자치를 위한 꼬무나를 조직하며 민중정권을 공고히했다. 변혁적조치가 철저히 단행됐기에 미국의 심각한 경제제재와 반혁명세력지원에도 정권을 공고하게 유지할수 있었다.

2002.4.11 친차베스세력과 반차베스세력간의 무력충돌로 친차베스세력50여명이 사망했고 차베스는 유배됐다. 차베스가 사령관을 역임했던 특전단과 친차베스군부가 반란을 재빨리 진압, 주도자들을 체포하고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카라카스시가지를 점령하면서 위기는 정리됐다. 차베스는 2007재선후 지지자들에게 <사회주의혁명만세>·<사회주의는사랑이다>라고 선언했다. 

제국주의지배정책을 뚫고 전진하는 라틴아메리카민중

2013.3.5 차베스서거후 집권한 니콜라스마두로대통령에 대한 미국·우익세력의 정치·경제적위협은 심각한 수준이다. 2018.8 마두로의 장외연설중 폭발물드론으로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2020년에는 친미우익정치인 후안과이도가 <임시대통령>을 선언하고 이를 미국이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미출신용병들이 마두로암살을 목적으로 베네수엘라에 잠입하려다 적발되기도 했다. 민중정권은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경제위기속에서도 500만호주택건설목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여러민중정책을 시행하며 민중생활안정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있다. 

2006 볼리비아의 첫원주민대통령으로 취임해 13년간 집권한 에보모랄레스대통령은 미국의 조종하에 감행된 대선부정시비로 2019 망명한지 1년만에 볼리비아로 귀환했다. 모랄레스는 망명하면서도 정치적의지를 꺾지않았고, 이는 2020.10대선에서 모랄레스가 이끄는 사회주의운동(MAS)당의 루이스아르세가 당선된것으로 확인됐다. 

초국적자본의 먹잇감이자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지배전략의 <린치핀>으로써 21세기초까지 정치·경제적부정부패에 찌들었던 콜롬비아에서 2022.8 도시게릴라출신의 구스타보페트로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고 2023.1.2 브라질의 이스아니사우룰라다시우바대통령이 공식 취임했다. 페트로의 당선으로 <핑크타이드>라 불리는 2000이후의 중남미좌파정권물결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룰라의 취임으로 <핑크타이드>가 완성됐다고 평가된다.

라틴아메리카 좌파정권의 반미정신과 단결의지는 라틴아메리카민중을위한볼리바르동맹(ALBA)의 창설과 발전을 통해 확인할수 있다. 2001 차베스가 최초로 제안한 라틴아메리카경제공동체 알바는 2008 <국제정치·경제분야에관한정치선언>을 발표하며 국방·안보분야로 영역을 확대했고 2011.5 알바국방주권학교를 설립하며 라틴아메리카민족의 자주를 위해 복무했다.

2023.3 차베스서거10주기에 기해 베네수엘라에서 알바회원국간 회의가 개최됐다. 회의참석자들은 <비인간적자본주의체제에맞선저항과투쟁은우리역사에서계속됐다>고 언급했다. 라틴아메리카민중은 미제침략세력의 지배책동을 단호히 돌파하며 자주와 해방을 향해 전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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