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석과 북은 <조국해방전쟁>으로 미제의 코리아반도침략을 막고 해방된 코리아반도 북반부지역을 지켜냈지만 남반부를 해방시키고 조국을 통일하는것은 다음 과업으로 남겨두게 됐다. 전쟁직후 3개년의 전후복구건설을 거쳐 1956.3 조선노동당3차대회에서 평화통일노선을 천명하고 <조국의평화적통일을위하여>라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남과 북의 우리민족역량이 단결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북에서 파견한 박정호는 남에서 활동하다가 간첩으로 체포투옥됐는데 그는 재판에서 자신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지원하려한것이라고 밝혔다. 이승만은 조봉암과 진보당을 평화통일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처형하고 불법화시켰다. 이승만정권이 민중의 심판을 받은뒤에도 남에는 미군에 의해 박정희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미국은 금보유량이 줄어들어 달러패권의 위기에 처했고 자본주의경제공황의 주기가 줄어들면서 항시적인 경제위기에 시달렸다. 1960년대 미국은 쿠바미사일위기를 일으켰고 1964 통킹만에서의 충돌을 계기로 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을 저질렀다. 남베트남에서의 정국은 군사쿠데타의 난립으로 친미정권을 유지하기 힘든 조건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세력은 더욱 장성하고있었다. 이에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코리아에까지 전쟁을 확대하려했다. 중국은 1954~55, 1958 1·2차대만해협위기에서 미국으로부터 핵위협을 당하고 1964.10.16 핵시험에 성공한뒤 대륙간탄도미사일등 개발에 주력했다. 김일성주석은 1962.12 경제국방건설병진방침을 채택했다. <한손에는총을,다른한손에는낫과마치를!>이라는 구호를 들고 사회주의건설을 최대한으로 다그치면서 국방력을 더욱 강화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몇달뒤인 1963.2 대덕산초소를 찾고 <일당백>의 구호를 제시하고 인민군대의 간부화, 현대화와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의 4대군사노선방침을 세웠다. 모든 군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튼튼히 준비된 싸움군으로 키우는것과 함께 국방과학과 군수공업을 급속히 발전시켜 인민군대의 무장장비를 현대화하도록 했다. 1968.1 미국의 최신예정찰함3대중 하나로 알려진 푸에블로호가 원산앞바다에서 영해를 12.2km 침범해 정찰임무를 수행하다가 조선인민군경비함과 어뢰정에 나포됐다. 김일성주석은 대함·대공미사일의 대미공격력을 쥐고 <우리인민과인민군대는미제국주의자들의<보복>에는보복으로,전면전쟁에는전면전쟁으로대답할것입니다.미제국주의자들이우리의경고에도불구하고정세를격화시키며끝끝내전쟁의길로나간다면이번에는그들이더큰참패를당하리라는것을단단히각오해야할것>이라며 맞받아나가 그해 12월 미국의 항복서를 받아내고 코리아에서의 전쟁을 막았다. 1968당시 미국은 코리아반도와 베트남에서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전쟁전략을 견지하고있었다는 사실이 2009.3 미언론보도로 확인됐다. 당시 미국방부가 2개의 전쟁전략을 포기한 사실은 2012.1 미언론에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