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정권은 전두환군사정권의 잔재로 여전히 <하나회>신군부세력이 핵심을 이루고있었다. 당시는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소련이 해체되는 시대였으며 민주화와 함께 더이상 반공이데올로기가 작용할수 없는 정치적배경을 갖고있었다. 이런 시대적흐름에서 구사회주의권과의 수교등 <북방정책>을 추진하며 남북관계가 완화되고 상·하층민족통일전선이 형성·강화됐다. 전면적이고 노골적인 반북반공이데올로기선전이 없었을뿐 군사파쇼통치는 더욱 교묘하며 악랄했고 매판자본과 파쇼정권이 결탁하며 기형적인 정경유착은 심화됐다. 당시 <북방정책>과 남북관계의 핵심책사로 알려진 박철언은 노태우대통령비서실소속 정책보좌관으로 <6공의황태자>로 불리며 권력을 누렸다. 박철언은 1985~91 북방정책과 통일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수십차례 소련·중국·헝가리·체코·베트남등 미수교국으로 비밀출장을 다녔다고 한다. 또 그기간 42차례에 걸쳐 열린 남북고위급비밀회담에 남측수석대표로 참석했으며 북을 비밀리에 21차례나 방문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월계수회>를 조직해 1987.12 노태우당선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았다. 온갖 정치협잡의 중심에 있었다. 김영삼정권이 들어선뒤 1993.5이후 뇌물수수혐의로 1년4개월간 투옥됐다. 대외적인 북방정책과 남북관계의 개선에도 국내 통일운동세력과 사회단체들에 대한 탄압은 달라지지않았다. 1988 민주화이후 첫총선에서 민정당이 참패하고 야3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해 국회는 여소야대구도가 됐다. 12.12군사반란과 5.18민주화운동청문회, 일해재단등 <5공비리청문회>가 진행됐다. 국회밖에서는 전두환·이순자의 구속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11.23 전두환은 대국민사과후 재산헌납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은둔하는것으로 무마했다. 이어 노태우는 1988.11 법질서확립을 시사하는 담화를 한후 노동자파업을 강경진압하고 1989 문익환방북이후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이해 6.27 안기부는 <국내좌경실상자료집>을 내면서 <전체좌경조직>이 126개, <핵심세력>이 1만500여명으로 추산된다고 주장했다. 1990 노태우정권은 인위적인 정계개편인 3당야합으로 개헌선인 200석을 넘는 거대여당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위기는 무마할수 없었다. 1991 강경대열사사건이후 <분신정국>은 항쟁으로 가는 분위기였고 정권은 <유서대필>사건을 조작해 죽음으로 항거한 이들의 뜻을 왜곡하려했다. 노태우정권은 3당야합으로 김영삼등<민주화>세력을 끌어들여 정권유지를 획책했다. 국회는 대리정권의 일부였을뿐이다. 개량주의와 파시즘을 교묘하게 섞어 민중항쟁을 억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