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 오스만제국의 청년투르크당이 혁명에 성공하고 새황제를 세웠다. 청년투르크당의 극단적인 투르크민족주의는 아랍민족과 다른 민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랍인인 후세인은 1차세계대전에서 1914말 오스만제국이 독일편에 서자 이기회에 아랍단일국가를 세우겠다는 구상을 갖고 영국과 접촉했다. 영국은 오스만제국의 배후를 교란시키고 1차세계대전에 참여한 인도이슬람교도병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메카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측의 맥마흔과 아랍측의 후세인은 아랍민족이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면 영국이 지원한다는 조건에 합의했다. 후세인은 시리아 알레포에서 예멘의 아덴까지 하나의 아랍국가(Arab State)를 수립하고 영국이 승인해줄것을 요청했다. 후세인의 3남 파이잘은 아랍민족주의비밀단체들을 찾아다니며 봉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시리아지도자들은 파이잘에게 북위37°이남지역 가운데 지중해에서 페르시아경계, 페르시아만, 아라비아에 이르는 지역의 아랍민족을 규합해 독립국가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이조건을 영국이 받아들이면 봉기에 합류하겠다고 밝혔다. 아랍군은 1916.6.10 봉기해 1918.10.1 시리아수도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 그후 파이잘을 아랍국가의 국왕으로 세우고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정했다. 지금의 시리아·이라크·팔레스타인지역·시나이반도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1916.1.3 <사이크스·피코협정>으로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나눠갖기로 합의했다. 수니·시아의 차이나 부족성이 강한 아랍무슬림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요인은 고려하지않았다. 오스만제국이 멸망하자 프랑스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파이잘을 내쫓았다. 영국은 파이잘을 영국점령지역인 이라크의 위임통치수반으로 임명했다. 파이잘은 이후 투표를 거쳐 1921 이라크국왕이 됐다. 이지역은 프랑스령시리아와 영국령이라크로 분단됐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지역도 전쟁자금을 제공한 유대인에게 내줬다. 한편 후세인은 전쟁중이었던 1916.10 스스로 아랍국왕에 올랐고 헤자즈왕국을 건설했다. 베르사유조약과 세브르조약을 인정하지않았던 후세인은 영국측에 아랍단일국가건설의 약속이행을 요구했지만 영국측은 지원을 중단하며 조약수용을 강요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터키에서 케말파샤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성공해 1923 술탄제를 폐지하고 1924 술탄의 칼리프지위도 박탈하자 후세인은 스스로 칼리프를 선언해 나섰다. 아라비아반도중부에 있던 네지드가 이에 반발했고 네지드의 이븐사우드는 1926 헤자즈를 정복하고 1932 네지드와 헤자즈를 통합해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을 선포했다. 당시 트란스요르단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가 통치했으며 현재에도 요르단의 왕가를 잇고있다. 파이잘의 후손은 이라크왕가를 이어가다가 1958 이라크의 군사쿠데타로 단절됐다. 부족국가수준의 제한성이 뚜렷한 아랍민족이 제국주의국가들에 의존해 독립된 단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구상은 실패를 면치못했다. 1952 이집트에서 나세르를 지도자로 하는 자유장교단이 봉기해 친영세력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건설했다. 같은 시기 중동의 이란에서도 모사데그총리의 석유자원국유화정책등 민족주의경향이 전반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다. 나세르는 1954 이슬람원리주의의 무슬림형제단의 암살시도를 제압하고 1956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1956말 영국·프랑스를 수에즈운하에서 철수시키며 정치적위상이 부상했다. 이집트는 1958 시리아와 아랍연합공화국을 수립했다. 아랍사회주의·범아랍주의는 아랍민족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려는 범민족주의운동으로 전개됐지만 이스라엘을 앞세운 제국주의침략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좌절되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