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4.2 항쟁의기관차〉 미국의 침략적인 약탈정책과 대만전을 불러오는 디리스킹

〈2024.2 항쟁의기관차〉 미국의 침략적인 약탈정책과 대만전을 불러오는 디리스킹

브레튼우즈체제와 마샬계획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세력은 명실상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각국의 공산당·사회주의세력이었다. 미국·영국은 1943까지 서부전선을 형성하기로 소련과 합의했으나, 소련의 패전을 의도로 2전선형성에 태만하다가 2차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1944 뒤늦게 전선을 형성했다. 프랑스등 유럽대다수나라들내의 레지스탕스투쟁·파르티잔전투를 이끈 세력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근로민중이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날무렵 대다수동유럽국가들에 사회주의정권·진보정권이 수립되고 유럽전역에 공산당을 핵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며 프랑스의 쎄큐리떼쏘시알과 같은 선진적민중정책이 시행된 배경이다.

2차세계대전중이던 1944 국제통화체제인 브레튼우즈체제가 형성됐다. 금융자본집단은 금1온스당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그외 다른나라통화는 달러에 고정하며 미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본위제를 결정했다. 금융자본집단은 여러차례의 경제공황과 1차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통화량조종과 전쟁투기로 금융독점화를 거듭해왔다. 은행가출신 프랭클린루스벨트미대통령은 1933 취임직후 개인의 금소유를 엄격히 통제하고 1934 대통령령으로 사실상 전통적의미의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그러면서 달러·금교환비율을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절하했다. 이때 해외의 금이 미국으로 집중돼 1년새 미국의 금보유량은 96%가 급증했다. 이런 배경하에 금융자본집단은 브레튼우즈체제를 발동해 각국의 중앙은행이 금태환을 독자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미국만의 독점적인 금태환을 실시하면서 세계적으로 황금의 화폐기능을 없앴다. 더해 WB(세계은행)·IMF(국제통화기금)·IBRD(국제부흥개발은행)를 출범시키면서 미국을 위시로 한 제국주의세력의 세계경제패권장악을 본격화했다.

1947.6 마샬계획이 수립됐다. 마샬계획은 전후유럽의 부흥을 위해 미국이 전면적원조를 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됐다. 실제로는 2차세계대전후 경제가 파탄난 서유럽에 잉여자본을 투입해 미국의 경제공황을 모면하고 유럽을 정치·경제적으로 간섭·예속하며 서유럽으로의 사회주의확산을 막기 위한 의도였다.

미국은 <정치적개혁과외부감독을받는조건하에> 마샬계획을 제시했고 1947.7부터 4년간 총130억달러를 유럽에 투입했다. 영국·프랑스와 같은 대표적인 제국주의국가들에 1·2위로 많은 액수를 투입한데 이어 분단된 서독에 3번째로 많은 재원을 쏟아부으면서 전시경제를 형성했다. 한편 마샬계획원조금액의 70%는 미국의 잉여농산물·생산품수입에 투입됐다. 미국은 수출시장을 확대해 경제위기를 모면했다.

마샬계획이 사회주의세력의 고립·붕괴를 목적으로 했다는것은 여러방면으로 확인된다. 미국은 소련·동구의 분열을 의도로 소련에는 일부러 까다로운 조건을 달면서 마샬계획을 제시했고 동유럽에도 제안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동유럽국가중 유일하게 마샬계획참여를 추진했다가 무산됐다.

반사회주의책동은 마샬계획자금의 사용처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금액일부는 미패권전략을 위반하는 정권의 전복을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 전체예산중 관리비로 책정된 10%의 절반이 미CIA(중앙정보국)정책조정실을 통해 비밀첩보활동자금으로 사용돼 <조직적정치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그중 일부는 악명높은 우크라이나파시스트 스테판반데라를 추종하는 OUN-B무장테러단체 <나이팅게일>을 지원하는데 투입됐다. 이들은 1949 <베를린위기>당시 우크라이나지역소련군배치도·준비태세와 같은 소련의 군사정보를 미국측에 빼돌리는 스파이로 암약했다.

마샬계획에 대항해 1959 소련중심의 코메콘(СЭВ)이 조직됐다. 코메콘은 사회주의국가들간 경제·과학·기술협력을 목적으로 했다. 2차대전이후 경제회복을 위한 상호지원·무역활성화·과학기술성과교환에 중점을 두다가 1960년대 국제사회주의분업체계를 형성하며 경제개발·공동투자계획조정을 목표로 했다. 소련의 수정주의화에 따라 코메콘이 제대로 발동하지못하며 발생한 대표적사건이 1962.10.14 쿠바미사일위기다. 이후 미하일고르바쵸프의 반사회주의적<개혁>·<개방>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코메콘에 적용해 운영하려다 실패했다. 소련해체직전인 1991.6 코메콘의 모든 회원국은 조직해산에 관한 의정서에 서명했다.

유가와 금리 조작으로 소련동구타격

소련의 경제문제는 가장 취약한 부분인 농업에서 먼저 발생했다. 20세기초까지 세계최대식량수출국이었던 소련의 농업은 니키타흐루시쵸프때부터 계획경제가 무너지고 산업·인프라건설에만 집중하며 자본주의적으로 농업을 천시하면서 취약해졌다. 1960년대중반부터 식량위기가 본격화되더니 1980이후 세계최대식량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소련정부는 1960년대초부터 위기극복을 위해 농업분야에 나름 투자를 꾸준히 늘렸으나 역부족이었고 식량수입량은 1970 220만t에서 1984 4600만t으로 급증했다. 특히 1963 식량부족이 심각해 소련은 금보유량의 1/3수준인 372.2t을 팔았고 1965 다시 335.3t을 팔아 식량을 수입했다. 관료주의가 심각했던 간부들의 부정부패도 농업파탄의 주원인으로 작용했다.

소련이 탈출구로 삼은것은 석유다. 1960 시베리아에서 대형유전이 발견되자 1970년대전반기 석유를 통해 국고를 마련했다. 한편 1971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됐고 달러가치가 폭락했으며 2차례 중동정세의 격변으로 석유가가 치솟았다. 소련이 보유한 <오일달러>는 식량수입에 따른 경상수지적자를 보존하고도 남았다. 소련은 미국과의 핵무기경쟁에 돌입하는 한편 군비를 대대적으로 확충하며 1979 아프간(아프가니스탄)전쟁에 뛰어들었고, 미국은 계기때마다 소련을 군사·경제적으로 소모시키는데 집중했다.

1980년대초 미국은 <석유무기화전략>을 채택했다. 아프간전쟁을 계기삼아 중동산유국을 자기편에 끌어당긴 미국은 1981.4 사우디(사우디아라비아)에 방문해 <석유무기화>를 논의했다. 한편 1985부터 소련의 석유채굴량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맞춰 사우디는 석유생산량2배확대를 선언했다. 석유가는 대폭락했고 소련의 석유수출수익은 급감했다.

한편 흐루시쵸프때부터 계획경제는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오시프스탈린때까지 엄격하게 지켜졌던 경제계획들이 흐루시쵸프때에는 관료들이 상부에서 제기한 계획을 두고 흥정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관료주의·부정부패가 계속 심화됐다. 생산물은 부족한데 화폐는 꾸준히 발행되면서 통화량과잉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유가폭락으로 소련은 외환부족에 시달렸고 연쇄적으로 동구유럽사회주의국가들은 국내수입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미·서방자본주의국가에게 대규모 외채를 빌려야했다. 그결과 1988 소련·동구의 외채규모는 2060억달러에 육박했고 1990 소련은 외채원리금상환에 에너지수출로 얻은 수익전액을 투입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1980년대초 미국이 기준금리를 20%까지 폭등시키자 취약할대로 취약해진 동유럽의 경제가 완전히 파탄났다. 미국중심의 자본주의진영이 <냉전>시기 경제를 무기로 삼아 소련·동구를 붕괴시킨 사례는 <신냉전>시대인 오늘 중국을 상대로 <디리스킹>을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미국의 금리인상과 신자유주의경제체제로의 전환

뉴욕연방준비은행장출신 폴볼커는 1979.8 연준(연방준비제도 Fed)의장이 되면서 고금리로 정책을 전환한다. 1971.8 금본위제가 폐지된직후 1온스당 35달러였던 금가격이 120달러로 폭등했고 그결과 인플레이션공황이 발생했다. 1979 미경제는 베트남전쟁과 <오일쇼크>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미카터미대통령은 미대선을 앞두고 <달러가치안정>을 위해 노력하고있다는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편 카터이전부터 민주당은 내부적으로 뉴딜·케인즈주의의 정반대인 신자유주의로 방향전환을 했고 카터정부들어 신자유주의의제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카터가 <매파>·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볼커를 임명하게 된 배경이다.

볼커는 취임2달만인 10.6 연준정책금리를 10.94%에서 13.77%로, 이듬해 4월까지 17.61%로 끌어올렸다. 이에 따른 경기침체로 인해 카터는 낙선했고 로널드레이건이 당선됐다. 신자유주의주창자 레이건의 집권기에 볼커는 더 과감하게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10%대 물가상승율을 잡겠다며 1980.7 정책금리를 19.7%로, 기준금리는 1981 19%까지 끌어올렸다.

긴축으로 인한 경기후퇴로 1982 실업률은 최고조에 달했고 430만명가량이 빈곤상태로 추락했으며 특히 흑인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겪었다. 금리인상과 물가·임금인상억제, 실업증가에 따른 폐해는 자동차·철강과 같은 제조업, 중소기업·농업에 집중됐다. 1981~83 5700억달러 생산손실이 발생했는데 이중 57%가 실직을 당하거나 임금이 삭감된 노동자들에게 흡수된 반면 기업수익손실은 25%에 그쳤고, 나머지는 대부분 중소기업자본가·농부들에게 집중됐다. 반면 금융·보험·서비스업·하이테크분야는 호황을 누렸다. 고금리에 따른 추가수입은 1982 1480억달러에 달했는데 대부분 금융자산을 소유하고있던 금융세력에게 집중됐다. 소수금융세력이 이익을 독점하고 나머지는 불황·파산에 시달리면서 빈익빈부익부는 더욱 심화됐다. 미경제는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의 전환이 본격화됐다.

한편 초고금리에 따른 강달러는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에 투입됐던 재원을 미국에 집중시켰다. 미국·서방에 외채를 끌어다 쓴 동유럽·라틴아메리카국가들은 엄청난 이자상환부담을 떠안았다. 특히 달러화평가절상은 멕시코등 라틴아메리카국가들이 영국 리보금리와 연동해 빌린 채무상환액이 급증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은행들간 단기자금조달금리인 리보금리는 이당시 전세계은행간 거래에서 단기차입기준이었다. 1982 멕시코가 국가부채에 대한 이자지급을 하지못하자 채권자들은 신규대출을 중단했고 기존채무에 대한 회수를 요구했다. 뒤이어 브라질·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필리핀등에 대한 대출 역시 중단됐다. 3세계부채위기는 상업적대출의 중단을 가져왔고 국제금융자본의 흐름은 미국으로 집중됐다. 미국은 고금리정책으로 다른 나라의 재원을 약탈하면서 겨우 인플레이션을 잡고 국가파산상태에 놓인 나라들을 상대로 신자유주의경제정책을 강요하며 착취·약탈구조를 더욱 공고히 했다.

플라자합의와 역플라자합의

다른 나라를 약탈해도 미경제위기는 계속됐다. 레이건이 주창한 신자유주의정책인 <레이거노믹스>에 의해 미국은 재정적자와 경상수지적자가 동시에 나타나는 쌍둥이적자문제가 본격화됐다. <레이거노믹스>의 경제이론은 인플레억제를 위한 통화공급제한, 감세, 국내소비지출통제, 정부규제축소를 핵심내용으로 한다. 이에 따른 레이건정부의 핵심경제정책은 부자감세였다. 한편 대소련대결을 핵심으로 한 대외정책에 의해 군비지출이 대폭 강화됐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어나며 재정적자가 심화됐다. GDP(국내총생산)대비 연방정부의 총수입비율은 1981 20.2%에서 1992 18.6%로 하락했으나 지출은 22.9%에서 23.5%로 증가했다. 레이건집권당시 1조달러미만이던 연방정부부채는 1992말 4조달러가 넘었다.

한편 레이건집권5년만에 누적된 무역적자규모는 4230억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경상수지적자규모는 2520억달러를 기록했다. 달러대비 일본의 엔화, 독일의 마르크화 가치는 1984말에 1973이전수준으로 떨어졌다. 강달러가 불러온 당연한 현상이었다. 일·독의 차·기계·전기제품이 미국시장에 쏟아져 들어왔다. 미의회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보호주의적압력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한편 3세계부채위기로 인해 미국내에 자본유입이 증가했는데 1982 950억달러에서 멕시코채무불이행직후인 1983~86 순차적으로 870억·1160억·1440억·2280억달러가 미국내에 들어왔다. 레이건정부는 쌍둥이적자를 국채발행과 함께 자본수지흑자로 상쇄할수 있었다. 미국의 경상수지적자는 각국의 공적대외준비금과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잉여달러인 민간자금이 달러표시자산을 통해 다시 미국으로 환류되는 체계를 구축하면서 해결됐다. 이체계가 없었다면 달러를 찍어 적자를 보전하면서 달러가치폭락을 야기시켰을것이다. 볼커의 금리인상은 세계금융세력의 이같은 달러패권하에서의 국제금융통화체제를 조작하기 위한것이었다.

강달러로 인한 무역수지적자가 계속되자 미국은 달러가치를 인위적으로 절하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미재무부는 외환시장개입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사실상 쥐고있었다. 1985.2 G5(5개주요국)의 미·영·프·일·독은 달러화평가절하를 위한 <협력적개입>을 시작했다.

1985.9.22 미플라자호텔에서 열린 G5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합에서 달러화를 평가절하하고 엔화·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위해 각국가들이 직접 시장에 개입할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구체적실행계획은 플라자합의가 있기 1주일전 런던에서의 비밀회합을 통해 결정됐는데 <개입에대한토론요점>비공개문서에 따르면 환율조정목표치·전략·전체규모·운영통화·국가별할당규모등이 세밀하게 규정됐다.

9.23 유럽시장에서 독일중앙은행의 개입이 먼저 실시돼 1달러당 234엔에서 230엔으로 엔화평가절상이 단행됐고 12월에 엔화는 1달러당 203엔까지 절상됐다.

플라자합의후에도 미무역적자는 전혀 해소되지않아 1985 1500억달러에서 1986 1700억달러, 1987 1710억달러를 기록했다. 일·독의 대미무역흑자는 여전히 증가추세를 유지했다.

환율조작으로도 경기침체가 계속되자 이번에는 유가조작으로 경기부양을 시도했다. 미국은 사우디에 석유생산량증산을 압박했고 사우디는 결국 침체된 세계석유시장에 석유를 과잉공급하며 석유가를 1985 1배럴당 31.3달러에서 1986 10.4달러까지 폭락시켰다.

금리인상으로 동유럽이, 석유증산으로 소련이 경제적타격을 심각하게 받은 반면, 미국은 인플레압력에서 해소되며 금리인하가 가능하게 되자 달러가치를 계속 하락시켰다. 그럼에도 무역불균형문제를 해결하지못해 1987.2 플라자합의의 연장선상에서 루브르합의를 진행했다. 루브르합의는 달러화가치를 안정시키면서 대외불균형을 수정하기 위해 재정정책의 협조가 필요하다는것을 골자로 한다. 미재무부장관은 <독·일이세계수출품을더많이흡수하기위해재정확대정책을펴야한다>고 압박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국의 무역적자는 결국 감소됐고 일본은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게 됐다. 1986 수출은 실질가격기준4.9%감소, 민간기업경제성장은 1.2%를 기록, 제조업부문산출은 실질적으로 감소하며 대대적인 경기후퇴가 시작됐다. 일정부는 극단적통화팽창정책으로 이같은 상황을 역전시키려했으나 엔화평가절상속도조절에 실패하며 자산거품을 불러왔다. 거품을 잡기 위해 1989 이자율을 인상하기 시작했다. 거품경제기간 주식·부동산을 통해 자산가치가 늘어났던 <부의효과>는 자산가치급락으로 채무청산불능상태·부실채권양산·은행부실·신규투자불가등의 결과를 낳으며 장기불황에 들어서게 됐다.

미국이 만성적경제위기를 식민지·반식민지·손아래동맹국에 떠넘긴다는것은 1995 역플라자합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GDP대비 미정부의 순부채비율이 1980 21.7%에서 1993 46.4%까지 증가했다. 미금융 골드만삭스공동회장출신 미재무부장관 로버트루빈은 월스트리트의 달러화평가절상필요성을 강조했다. 1980년대를 경과하며 미국이 금융자본주의로 완전히 탈바꿈한 조건에서 플라자합의때와는 정반대의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즉 미국의 금융영역이 확장되고 제조업·일반산업도 금융화된 조건에서 달러화를 평가절상하고 엔화를 평가절하하는 역플라자합의를 통해 금융자본세력은 미국내 자본유입을 증가시키려고 했다. 역플라자합의는 금융자본세력이 미경제를 사실상 독식하며 구조적으로 변화한 미경제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것이었다.

<워싱턴컨센서스>, 금융세력의 약탈정책

<워싱턴컨센서스>가 등장했다. 1989 미정치경제학자 존윌리엄슨은 라틴아메리카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경제개혁처방>으로 <워싱턴컨센서스>를 제안했다. 윌리엄슨은 2000 한 언론에서 당시 라틴아메리카에 자급자족적, 폐쇄적 경제체제가 유지되고있고 스스로 별다른 노력을 하지않은채 외채탕감만을 요구하고있다고 착각하는 워싱턴사람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작성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워싱턴경제학자들이 동의할수 있는 경제<개혁>내용을 정리했다고 변명했다. 10가지정책목록은 구체적으로 재정<건전>성확보·공공지출우선순위정리·조세제도<개혁>·금리<자유>화·경쟁환율제도도입·무역<자유>화·외국인직접투자<자유>화·사영화·탈규제·사적소유보장제도확보를 내용으로 하고있다. 그러면서 <레이거노믹스>의 극단적형태인 <시장근본주의>로 인식되는것은 잘못됐다며, <워싱턴컨센서스>가 신자유주의와 동일하지않다고 역설했다.

윌리엄슨주장의 기만성은 <워싱턴컨센서스>10가지정책사항자체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내용을 담고있는것으로 드러난다. 공공분야축소와 무한경쟁을 주창하는 <워싱턴컨센서스>는 1990년대초 IMF·WB·미정치경제학자들·미행정관료들의 논의를 거치면서 정립됐다.

경제위기모면을 위한 고금리·강달러정책으로 라틴아메리카·동유럽등의 재원을 약탈한 미국이 다음수순으로 밟은것이 <워싱턴컨센서스>의 적용이었다. 극도로 취약해진 개발도상국나라들에 신자유주의경제질서를 주입하며 경제적예속을 더욱 심화하려는것이었다. 미경제체질은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완전히 변모했고 소련·동구사회주의진영은 붕괴직전에 놓여 힘이 없을때 잉여자본을 이용해 개발도상국을 더욱 효율적으로 약탈할수 있는 방도를 수립한것이 바로 <워싱턴컨센서스>다.

<워싱턴컨센서스>의 약탈적본색은 1994.12 멕시코를 필두로 시작된 라틴아메리카국가들의 경제공황을 통해 곧바로 탄로났다. 강달러로 인해 취약해진 멕시코는 1990년대초부터 <개방>화한 결과 경상수지적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됐다. 1980년대 미재무부는 해외자본을 미국에 집중시키기 위해 1984 미국채·회사채를 보유한 외국인들에게 부과하던 30%이자세의 철폐를 제시했다. 1985 채권시장활성화를 위해 외국인들이 재무부채권을 익명으로 매매할수 있게 허락했다. 이같은 조치들은 라틴아메리카투기자본의 유출을 가속화했다.

미국에 의한 재원유출이 심각했던 멕시코는 제품경쟁력부족으로 무역적자가 계속 확대됐고 외채의 원리금상환부담도 컸다. 멕시코는 누적된 경상수지적자를 해결하겠다며 자본<자유>화정책을 실시했는데 그결과 상대적으로 높은 멕시코이자율을 노리는 단기자금들이 멕시코로 유입되며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됐다. 뿐만아니라 1988이후 시작된 금융기관사영화정책으로 18개은행의 사영화가 단행됐고 과다대출에 따른 부실대출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은 미재무부와 IMF의 자금을 이용해 멕시코에 400억~500억달러의 차관을 투입하고 3번에 나눠 상환받기로 했다. 이금액은 미금융세력구제에 전적으로 쓰였는데 멕시코민중들이 집과 전재산을 잃는동안 시티은행8100만달러·JP모건4000만달러·뱅크오브아메리카1000만달러·체이스맨해트은행700만달러씩 챙겼다.

그외에도 <워싱턴컨센서스>는 동유럽의 사회주의붕괴와 경제예속화, 1990년대후반 아시아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신자유주의확산에 적용됐다.

<워싱턴컨센서스>는 신자유주의를 각국에 주입하기 위한 방법론도 제시했다. 방법론에 따르면 <구조조정>이 필요한 국가에 대선·총선등 선거가 끼면 좋다. 구조조정의지가 없는 정권을 그렇지않은 정치세력으로 대체하려는 의도에서다. 그러면서 집권핵심세력의 부패고리를 폭로하며 현정권의 선거패배를 유도할것을 제시하고있다. 정권대체세력은 서로 다른 지지계층에 기반을 둔 중도성향의 정당2개가 연합할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고있다. 이는 어느한쪽의 저항도 없이 신자유주의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의도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방법론이 정확히 적용된 대표적사례가 남코리아라고 분석하고있다. IMF사태당시 대선이 있었고 김영삼정부가 김현철비리로 인해 극히 취약해졌으며 야권에서 완전히 다른 지지층을 갖춘 김대중의 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민련이 <DJP연합>을 출범했으며, DJP공동정권하에 <워싱턴컨센서스>의 핵심사항이 남에 적용되며 신자유주의경제체제가 주입됐다.

<워싱턴컨센서스>에 대한 세계민중의 분노는 2000 들어 심화됐고 2008금융위기를 거치며 더이상 이정책을 내세울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9 영국총리 고든브라운이 <<워싱턴컨센서스>의종말>을 선언했지만, 금융자본세력의 약탈정책은 방식만 바꾼채 계속 심화됐다.

중국식<개혁>·<개방>

1978 등소평중국가주석은 1950년대말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1966~76 <문화대혁명>의 경제·민생적후과를 극복하기 위한 방도로 <개혁>·<개방>을 내세웠다. 10월 중공회9차전국대표자대회연설에서 기술·제도·조직분야에서의 중대한 개혁을 강조하며 <그렇지않으면우리는현재생산기술과생산관리가낙후해있는상태에서벗어날수없다>고 강조했다. 12월 <사상해방>·<실사구시>·<일치단합>을 기치로 내건 등소평은 1979.3 4가지기본원칙인 <사회주의의길견지>·<인민민주주의독재견지>·<공산당의영도견지>·<맑스레닌주의와모택동사상견지>를 제시하며 <개혁>·<개방>의 사회주의적방향을 강조했다.

농촌개혁을 위한 제반조치를 취한뒤 기업개혁·소유제구조개혁을 시작하며 단일소유제형태를 다양한 경제형태·경영방식으로 전환했다. 1979.7 공산당중앙위원회·국무원은 광둥·푸젠의 대외경제활동에 더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고 1980.5 광둥성의 선전·주하이·산터우, 푸젠성의 샤먼에 경제특구설치를 결정했다.

일련의 성과를 바탕으로 등소평은 1982.9 중공산당12차전국대표대회에서 <맑스주의보편적진리를우리나라의구체적실제상황과결부시켜자신을걸어야>한다며 <중국특색의사회주의>건설이 역사적경험을 종합해 얻은 기본결론이라고 선언했다. 중공산당은 <중국특색의사회주의>건설을 <개혁>·<개방>, 현대화건설에서의 지도사상으로 규정했다. 12차대회후 중국은 <개혁>·<개방>을 전면적으로 전개했다.

1984.10 당중앙위12기3차전원회의에서 <경제체제개혁에관한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의결정>이 채택됐다. 이문건에서 사회주의경제는 공유제를 토대로 한 계획적상품경제, 기업활력증강을 경제체제개혁의 중심내용이라고 제기했다. 지침에 따라 <지령성계획>을 축소하고 <지도성계획>을 확대했다. 1987 생산영역에서 <지령성계획>공업제품은 개혁이전의 120종에서 60종으로, 유통분야에서 국가계획관리상품은 개혁전 188종에서 23종으로 축소됐고 시장의 상품판매가 활성화됐다.

대외개방속도도 빨라졌다. 1984.5 중공산당중앙위는 샤먼경제특구를 확대하고 14개연해항구도시개방을 결정했으며 창장삼각주·주장삼각주·샤장취안삼각주·랴오동반도·쟈오동반도를 연해경제개방구로 개척하면서 경제특구·연해개방도시·연해경제개발구와 내륙으로 점차 확대하는 대외개방구도를 형성했다.

정치·경제·군사적성과를 바탕으로 중공산당은 <1나라2제도>를 제시했다. 등소평은 1979.1.30 <대만이조국의품속으로돌아오기만한다면그곳의현실과현행제도를존중할것>이라며 중국통일노선을 밝혔고 1984.2 중국통일문제해결구상을 <하나의중국,2가지제도>로 요약했다. 1987.11 대만인의 대륙친지방문길을 개방하며 38년간의 양안단절상태가 끝났다.

1984 <홍콩문제에관한공동성명>, 1987 <마카오문제에관한공동성명>을 각각 영국·포르투갈과 체결하며 홍콩·마카오의 반환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됐다.

1987 13차당대회에서 중경제발전3단계전략적배치로 1990국민총생산액을 1980의 4배로 증가, 20세기말경 국민총생산액을 2배로 증가해 샤오캉(小康)사회수준달성, 21세기중엽 1인당국민총생산액의 중등발전국가수준도달을 제시했다. 당대회후 <개혁>·<개방>은 계속 추진됐고 1987.11 국무원은 <개혁>·<개방>실시지역에서 토지사용제도개혁시행방안실행을 허용했고 1988부터 3~5년사이 전국을 몇단계로 나눠 주택제도를 개혁하기로 결정하며 토지·주택국유화를 약화했다.

소유제구조에서 개인경영·사영경제가 확대돼 1987.1 당중앙정치국은 고용인원제한규정을 삭제하고 개인기업에 대한 관리강화·병폐제거를 유도할 방침을 제시했다. 1년뒤 사영경제를 <사회주의공유제경제의보충>으로 규정하고 그존재·발전의 허용을 헌법에 명시했다.

1980년대후반 인플레등 경제문제와 함께 일부중공산당지도간부들사이에서 심각한 부패현상이 발생했다. 미국등 서방에서는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기만적인 평화이행전략을 심화하고있었다. 이같은때 중국일부지역에서 변란이 일어났고 1989 <천안문사태>가 발생했다. 중앙정치국상무위는 베이징일부지역에 계엄령을 발동하기로 결정하며 <천안문사태>를 단호히 평정했고 다른지역에서의 반란도 효과적으로 진압하며 질서를 회복했다.

1989.6.23 당중앙위13기4차전원회의에서 장쩌민이 중앙위총서기로 선출됐다.

1992.1.18~2.21 등소평은 우창·선전·주하이·상하이등지를 잇달아 시찰하고 조사연구를 진행하며 <남방담화>를 발표했다. 담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대담하게 시험해야한다고 지시하며 <사회주의의본질은생산력을발전시키며착취를없애고,양극분화를없애며,종국적으로공동으로부유해지는것>이라고 밝혔다.

중국금융시장형성과 WTO가입

1990.4 중공산당중앙위원회·국무원이 상하이 푸둥지역개발·개방정책결정을 내리고 9월부터 푸둥개발의 실질적가동단계에 들어섰다. 이를 지렛대삼아 1990 11월 상하이증권거래소, 12월 선전증권거래소를 설립하며 금융시장형성을 본격화했다.

1993.12 중국무원은 <금융체제개혁에관한결정>을 통해 정책성금융과 상업성금융을 분리해 국유상업은행이 주체가 되고 다양한 금융기관이 공존하는 금융체계수립을 제기했다. 1997 15차대회이후 정경분리원칙을 앞세우며 대형기업그룹들을 설립하고 국유기업에 대해서는 회사제·주식제로 개조하는일을 진행했다.

중국의 금융시장은 국유금융기관이 과점체제를 유지하고있어 은행·증권·보험·투자신탁등 각영역에서 국유금융기관이 시장을 주도적으로 장악하고있다. 은행은 점차 과점체제가 약화되는 추세나 4대국유상업은행이 전체은행자산의 52%를 보유하고있고 보험업은 3대국유생명보험이 전체시장의 77%를 점유하고있으며 3대국유손해보험은 78%를 차지하고있다. 4대국유상업은행(중국농업은행·중국은행·중국건설은행·중국공상은행)은 2005.10 건설은행의 홍콩증시상장을 시작으로 모두 홍콩·상하이증시에 상장됐고 <지분구조다양화>를 위한 1차소유권개혁을 단행했다. 그럼에도 정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3대정책은행인 국가개발은행·중국농업발전은행·중국수출입은행은 1994 국가소유의 특수은행으로 설립됐다. 한편 자본주의적금융제도구축을 위한 주식제상업은행이 1986~96 10개가 설립됐고 2010말 13개로 확대됐다. 대부분의 지분은 정부가 보유하고있으나 일부 민간주주·해외전략투자자가 대주주인 은행도 있다.

1979 일본수출입은행이 베이징에 대표처를 설립하며 외자은행의 중국금융시장진출이 시작됐다. 1981 홍콩남양은행이 광둥성 선전에 영업점을 설치했다. 1982 중정부는 외자계은행에 대해 외국투자기업을 대상으로 한 외환업무, 경제특구내에서의 설립을 허용했다.

1994~97 외자계회사의 중국진출이 확대되며 외자계은행도 빠르게 성장했다. 경제특구외지역에도 외자계은행의 부속회사설립이 허용됐고 1996 푸둥지역에 한해 외국투자기업·해외국적자를 대상으로 한 위안화업무가 허용됐다. 2001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가입후 2006 <외자은행관리조례>를 시행하고 위안화업무취급지역과 고객에 제한을 두던 규정을 폐지했다. 그러면서 2008까지 74개외자계은행이 중국에서 영업을 진행했다. 외자계은행이 중국경제정책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비하다.

1997 홍콩이 반환됐다. 금융자본세력의 근거지인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홍콩을 통해 초국적자본의 중국진출이 가속화됐다. 홍콩을 통한 자본주의적영향을 <트로이의목마>에 비유하는 이유다. 한편 2019 홍콩반중시위는 그배후에 미CIA(중앙정보국)가 관리하는 NED(전미민주주의기금)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반미정권전복을 목적으로 한 <색깔혁명>의 일환이라는것이 밝혀졌다.

1999.5.7 미군이 유고슬라비아주재중대사관을 폭격해 중국인3명과 세르비아인14명을 학살했다. 비엔나협약에 따르면 대사관은 다른나라안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서 중대사관폭격은 중영토를 공격한것과 같다. 미국은 <오폭>이라고 주장했으나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조준>폭격이었다. 2011 공개된, 당시중국가주석 장쩌민의 미발간회고록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중국이 대사관안에 세르비아정보요원을 숨겨줬고 이를 파악한 미군이 대사관을 폭격했다. 중정부가 이사건에 대해 항의했으나 미국이 관련 증거를 제시하자 외교적타협을 통해 수습했다는것이다. 당시 중국은 미국의 사과와 2800만달러배상금을 받고 사건을 무마했다.

2022.8 미외교협회연구원 데이비스색스는 미언론 포린어페어스기고글에서 <과거위기때중국은미국과의건설적관계유지에가장중요한이해를갖고있었다>고 언급하며 중대사관폭파와 함께 1995 3차대만해협위기, 2001 중전투기·미정찰기충돌등을 그사례로 거론했다. 중국이 경제성장과 국제고립탈피를 위해 시도해온 WTO가입을 앞두고 대미굴욕을 감수한 셈이다.

<베이징컨센서스><뉴노멀>

<워싱턴컨센서스>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개념이 <베이징컨센서스>다. 2003이후 중국은 대규모 대외원조를 집행하며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동남아시아국가들과 수교체결·원자재확보의 성과를 거뒀다. <베이징컨센서스>는 2004 골드만삭스고문·중칭화대겸직교수 조슈아레이모가 <워싱턴컨센서스>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처음 제시했다. <베이징컨센서스>는 정책·제도·기술등의 혁신을 통해 고도성장·경제발전 달성, 삶의 질을 높이는 지속가능하고 평등한 발전 추구, 독립성과 자결권을 확보해 자국경제에 대한 통제권유지와 패권국과의 관계조절을 원칙으로 정리하고있다. 중정부가 이개념을 공식적으로 채택한것은 아니다.

시진핑중국가주석은 부패척결을 통해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중국경제의 <뉴노멀(새로운표준)시대>를 공식화했다. 시진핑은 2012.12 쓰촨성당위원회부서기 리춘청에 대한 엄중한 기율위반혐의조사를 시작으로 반부패투쟁인 <호랑이때려잡기>를 시작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리춘청은 저우융캉의 지시를 받아 약4000만위안에 달하는 뇌물을 받고 타인에게 부적절한 이익을 제공했다. 저우융캉은 장쩌민의 정치적후원아래 2007~18 국가최고지도부인 9인상무위원회의 구성원이자 중국의 검찰·사법·공안부문을 총괄하는 중앙정법위서기를 겸임한것으로 알려져있다. 대대적인 부패척결투쟁은 곧 장쩌민계를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14 장쩌민이 <부패척결행보가지나치게빨라선안된다>며 반부패투쟁을 가로막은 이유다. 장쩌민가계·세력이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고위급정치인자식들이 월가의 금융자본집단과 연결된 사실은 시진핑의 반부패투쟁이 곧 중국내에서 암약하는 시오니스트·초국적자본세력을 정리하는 과정이라는것을 보여준다.

2014 시진핑은 5월 허난성업무시찰때 처음으로 중국경제의 <뉴노멀시대>를 공식화했다.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최고경영자회의에서 중국경제의 <뉴노멀시대>특징에 대해 고속성장에서 중·고속성장으로 전환, 경제구조의 최적화·업그레이드화, 혁신에 의한 견인을 언급했다.

11로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2009 즈비그뉴브레진스키는 중·미수교30주년기념학술행사에서 <G2회의>를 주창했다. 브레진스키는 데이비드록펠러와 함께 1973 <3극위원회>를 조직했으며 1997 <거대한체스판>전략을 내세운 대표적인 시온딥스세력중 1명이다. 특히 <거대한체스판>전략에 따라 중국의 대만·홍콩·신장·티베트·내몽골등에서 <분리독립>책동이 벌어지고있다. 브레진스키의 <G2>는 미국의 대항마로 중국을 지목하면서 사실상 반중의식을 심화하고 대중봉쇄를 본격화하겠다는 신호탄과 같다는것이 합리적추론이다. 2011 버락오바마미정부가 권력의 축을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옮기겠다며 <아시아로의회귀>를 선언하자 2012 왕지스베이징대국제관계대학원장이 <서쪽으로행진하자>를 주장했고 이후 1대1로구상이 발표됐다. 일련의 흐름은 중국이 미국의 대중봉쇄책동을 예견하고 이에 대비했다는것을 보여준다.

2014.6 시진핑은 중국·아랍국가협력포럼6차장관급회의에서 처음으로 1대1로(一帶一路)용어를 정식으로 사용했다. 1대1로는 당나라·명나라시기 육상·해상실크로드의 옛영광을 재현하고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한 대외정책통치이념을 포함하고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육상·해상실크로드를 양대축으로 아시아·유럽·아프리카와 주변해역을 포함하고 동아시아·유럽경제권연결을 목표로 출범했다. 중국은 1대1로의 핵심운영방식으로 정책소통·인프라연통·무역창통·자금융통·민심상통등 <5통>을 내세웠다. 이중 가장 기반이 되는것은 인프라연통으로 관련국에 도로·철도·항만·공항등 각종인프라건설을 위한 차관을 제공하고 중기업들이 현지에 진출해 직접 인프라시설을 건설하며 관련국과의 무역·교류를 확대해 <경제공동체>를 구축하는것인데 이를 <개도국공동발전모델>이라고 정의했다.

2023 1대1로10년을 맞아 중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152개국·32개국제기구가 200여건의 1대1로협력문서에 서명했고 참여국에 건설한 역외경제무역협력구에서 42만1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다고 밝혔다. 2030까지 관련국의 760여만명이 극단적빈곤에서 탈피하고 3200만여명이 차상위빈곤에서 벗어나며 전세계소득의 0.7~2.9%증가를 목표로 제시했다.

한편 2013 시진핑이 인도네시아에서 제시한 국제금융기구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가 2015.12 정식발효됐다. 중언론은 2022.10 AIIB가 설립7년에 가까운 기간 다자주의를 견지했으며 회원국은 초반57개에서 전세계적으로 105개경제체로 확장됐다고 밝혔다. 진리췬AIIB총재는 회원국대다수가 개발도상국이고 선진국도 다수 포함됐다며 <이런독특한장점이AIIB가남남협력과남북협력을이어주는벨트역할을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AIIB는 191개사업을 승인하며 850억달러이상의 유형자본을 유치하고 사회인프라발전에 긍정적역할을 했으며 33개역내외회원에게 혜택이 돌아갔다고 자평했다. 진리췬은 운영방식에서 공개·투명·우수선발기본원칙을 담아 기존 다자개발은행과 차별을 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후 중장기전략발전목표로 <지속가능성을핵심으로미래인프라를위해융자를제공한다>고 내세웠다.

1대1로와 AIIB는 매우 밀접하다. 2019.7 둥덩신우한과기대금융증권연구소장은 <중경제성장에따라중이주도하는금융기구인AIIB도점점인정받고있고국제적인기대도높아지고있다>며 <지금까지AIIB의대출은대부분1대1로프로젝트로갔다>고 언급했다.

서방에서는 1대1로정책이 <부채함정외교>라고 매도하고있다. 특히 2022 스리랑카가 국가부도사태에 빠지자 서방언론들은 일제히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려 항만·공항·도로등 대형인프라사업을 추진했지만 실적부진으로 빚더미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실제 스리랑카는 2010 중국으로부터 돈을 빌려 함반토타항구개발을 추진했으나 적자운영에 빚을 갚지못하고 99년장기임대방식으로 중국영기업에 항만운영권을 넘겨줬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저개발국가들이 줄줄이 도산한 진짜이유는 미국의 고금리·강달러책동에 있다. 일례로 파키스탄은 2022.4 109억달러의 외환보유고가 2023.1 30억달러로 추락했고 세계최빈국중60%가 과다부채직전상태에 놓였다. 고금리·강달러로 자본을 미국에 집중시키며 개발도상국·저개발국가를 상대로 <양털깎이>를 하는것은 역대로 미국이 반복해온 상투적인 약탈책동이다.

1대1로가 경제적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부채함정외교>라는 비난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2017.4 중국은 해외항만지주회사를 설립해 파키스탄과 과다르항사용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에 따라 중국회사는 2019~59 40년간 항만매출90%·인근경제자유구역매출85%를 갖기로 하면서 과다르항에 대한 독점적지배가 보장됐다.

경제중심의 방어적팽창주의로서의 1대1로가 군사적측면도 포괄하고있다는것은 지부티·솔로몬제도의 사례로 알수 있다. 미군·프랑스군기지가 있는 홍해입구의 작은 나라 지부티에 중국이 해외군기지를 건설했다. 2015부터 지부티에 중해군기지건설이 논의됐으며 2016.3 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면서 중국은 지부티를 군사기지를 넘어 경제기지로 전환시켰다. 지부티에서 에티오피아를 연결하는 철도, 아프리카동부 케냐와 아라비아반도 예멘을 연결하는 인터넷통신망등을 건설하며 지부티를 1대1로사업의 아프리카거점으로 활용하고있다. 남태평양의 솔로몬제도는 2019 대만과 단교하며 중국과 수교했고 중국은 솔로몬제도에 1000억달러자금을 지원했다는 외신보도가 나왔다. 2022 솔로몬제도는 중국과 안보협정을 체결했다. 그러자 미국가안보회의는 성명을 통해 <방문국(솔로몬제도)들과인도태평양지역과태평양지역에번영과안보,평화를보장할수있는양국간파트너십강화방안을논의할것>이라고 언급하며 협정체결방침철회를 강압할 의사를 드러냈다. 앞서 호주는 고위급인사를 보내 소가바레솔로몬제도총리에게 협정에 서명하지말것을 압박했다. 미국은 솔로몬제도에 고위급대표단을 급파하며 대중견제를 심화했으나 2023~25 중·솔로몬제도는 경찰협력이행계획을 포함한 9개외교협정에 서명하며 군사·경제적관계를 공고히 했다.

상하이협력기구와 브릭스

2001 SCO(상하이협력기구)가 출범했다. 1996.4 중·러·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정상들이 <국경지대의군사적신뢰강화를위한조약>을 체결하며 상하이5국을 형성했다. 2001.6 우즈베키스탄이 합류하며 SCO로 정식화됐다. 2017.6 인도·파키스탄이, 2023.7 이란이 가입했다. SCO는 테러리즘·분리주의·극단주의를 <3대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공동대응과 중앙아시아·유라시아의 안전보장확립, 회원국간 정치·경제·군사등의 협력강화를 목적으로 하고있다. 20여년간 중·러주도하에 영토불가침·내정불간섭·다자적국제질서를 강조하고 군사적신뢰구축·대테러공조·미국및나토확산견제·경제통합을 진행하며 중요한 다자안보협력기구로 발전했다. 현재 정회원국9개에 몽골·벨라루스가 참관국으로 활동하고있다.

SCO는 중앙아시아에서 미국·나토확산을 효과적으로 견제해왔다. 2001 미국은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에 아프간<대테러작전>을 위한 병참기지를 설치했다. 2005에는 <색깔혁명>의 일환인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과 우즈베키스탄의 반정부시위가 발생했다.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것이 확실하자 SCO는 이를 극히 경계하며 2005 정상회의에서 미군기지철수를 촉구하기 시작했고 그결과 2014 키르기스스탄내 미군기지가 철수했다. 한편 2018 미국이 이란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여러경제제재를 가하자 SCO회원·참관국들은 2022.3~8 SCO참관국 이란과의 무역규모를 2021 동기간대비 31%나 확대했다. 이란은 2023 SCO에 가입했다.

2023.7 SCO정상회의에서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은 <러시아는외부의압력과제재,도발에자신있게저항하고있으며계속해서맞서싸울것>, 시진핑은 미국을 겨냥해 <일방적인제재와보호주의반대>를 언급했다.

2009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브릭스(BRICs)가 본격화됐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브릭스그룹에 참여하며 BRICS로 통칭됐다. 브릭스5개회원국은 전세계의 경제31.5%·인구41%를 차지하고있다. 2014 자체은행인 NDB(신개발은행)를 만들어 500억달러자본을 조성했다. 방글라데시·이집트·아랍에미리트등도 NDB에 참여해 2015에만 약300억달러이상을 대출했다.

2023.8 남아공에서 열린 15차정상회담에서 아르헨티나·이집트·에티오피아·이란·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연합6개국을 새회원국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중·러가 회의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회원국확대를 주장해왔고, 회의를 앞두고 실제 22개국이 공식적으로 가입신청을 했다. 신청국대부분이 국제정치에서 존재감을 자랑하는 중견국가들이며 미국의 대러제재에 동참하지않은 나라들로 확인된다. 한편 인도·브라질등 친미성향국가들은 협력확대를 <경제적차원>에만 한정하기를 주장했다. 특히 인도는 회원자격으로 <경제제재를받지않아야한다>를 내세우며 이란·베네수엘라를 배제하려했다. 브릭스가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15차정상회의에 대부분의 아프리카국가정상급인사들을 포함해 총69개국대표단이 참석한것을 통해 확인된다.

<디커플링><트럼프노믹스>

2008 금융위기이후 미국의 통화·금융패권은 크게 흔들렸고 미·서방이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한 반면 중국은 2009에도 9%의 성장률을 달성했다. <세계공장>을 자처한 중국은 당시 미국의 3번째수출상대국으로 2010기준 미 수출의 7%, 수입의 19%를 차지했다. 한편 미국의 전체무역적자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 24%에서 2006 28%, 2007 31%, 2009 45%로 계속 증가했다. 또 중국은 미채권의 최대보유국으로 미전체국채발행액의 11.5%를 차지하고있었다. 중국은 2000~08 미재무부채권보유가 5배 증가해 5000억달러를 기록했는데 동기간 미국의 대중적자는 약3배증가한 2500억달러에 달했다.

도널드트럼프미정부는 2018.6 중제품에 대해 25%관세부과를 결정, 2019 중화웨이제품을 금지하고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며 대중고립화를 시작했다.

2020.9.7 트럼프는 <중국은우리가준돈을군사력강화에쓰고있다.따라서<디커플링(decoupling)>은흥미로운단어>라고 언급했다. 트럼프의 <디커플링>을 <트럼프노믹스>와 연결해서 보면, 단순히 중국을 고립시키는데 초점을 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다. <트럼프노믹스>는 세금감면·규제철폐·보호무역을 표방했고 세계무역체제를 바꾸겠다는 의지부터 WTO탈퇴까지 내세웠다. 트럼프정부무역대표부대표 라이트하이저는 보수주의에 대해 언급하며 <일자리창출이중요하고생산이우선>·<생산을늘리기위해보호무역이나보조금활용을두려워하지않는다>고 정리했다. 2018.9 미국방부<미제조업·방위사업기지·공급망복원력에대한평가와보강>보고서를 통해서 트럼프정부는 중국에 대해 <미국의동맹국·우방국에대한무역지배력을이용해그들국가에대한정치적지배력을강화함으로써미국의시장접근성과제조업경쟁력을악화시킨다>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2020.11대선을 앞두고 <내행정부하에서우리는미국을전세계제조업의초강국으로만들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트럼프정부의 대중견제목적이 미국의 제조업강화와 전략물자에 대한 대중의존도약화며, 대중침략이 아닌 미국자립도강화라는것을 보여준다.

바이든<정부>는 트럼프식<디커플링>개념을 침략적대중경제봉쇄로 변질시키다가 이후 <디리스킹>으로 대체했다.

<디리스킹><디스트럭션>

바이든<정부>는 2021.3 잠정국가안보전략보고를 통해 <경제적안보>가 곧 <국가안보>라고 규정하고 이해 6월 <혁신경쟁법>을 통과했다. <혁신경쟁법>에는 기존의 <수출통제개혁법>·<2019국방수권법>·<외국인투자위험심사현대화법>이 망라되며 경제와 군사가 밀접히 연결됐다.

2022.5 미국주도하에 남·일·호주등13개국이 참여한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가 조직됐다. 핵심내용은 <공정하고탄력있는무역>·<안정적공급망재편>·<탈탄소및인프라구축>·<조세협력및반부패>이지만 본질은 미국의 대중의존적공급망해결과 첨단기술에 대한 대중패권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친미세력을 결집한것이다.

<반도체동맹>이라 불리는 칩(Chip)4는 미를 중심으로 남·일·대만등 <반도체강국>들을 결집해 결성됐다. 남이 메모리반도체, 대만이 반도체위탁생산, 일본이 소재·장비분야를 맡은 <전략공동체>를 표방하고있다. 미국의 칩4정책에 의해 네덜란드는 반도체장비의 대중수출제한조치를 내리며 2023.9.1부터 실행하고있다. 네덜란드는 반도체제조공정에서 가장 복잡하고 핵심적인 공정에 사용되는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기업 ASML을 보유하고있는데, ASML은 노광장비시장의 80%를 점유하고있다. 2022 ASML매출중 중시장비중은 15%나 차지하고있었다. 미국의 반중봉쇄정책에 의해 중국만이 아니라 친미국가내 기업들도 타격을 받고있는것이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미국이 중국산업에서의 약한고리인 반도체를 겨냥해 중국을 군사·경제적으로 타격하고 고립·봉쇄하기 위한 의도로 칩4를 결성했다는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집요한 반중책동은 IMEC(인도중동유럽경제회랑)추진으로도 드러난다. 2023.9.9 미백악관은 인도 뉴델리에서의 G20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인도·사우디·아랍에미리트·프·독·이탈리아·EU(유럽연합)정상들과 IMEC을 출범시켰다고 발표했다. IMEC에 포섭된 이탈리아는 같은해 12월 1대1로에서 탈퇴했다. IMEC형성을 목적으로 바이든은 아랍의 맹주이자 수니파인 사우디와 이스라엘간 수교를 추진했다. 미국은 사우디에게 핵프로그램지원까지 검토하며 관계정상화를 밀어붙였다. 사우디는 5000억달러가 투입되는 네옴시티사업성공을 위해 이스라엘과 수교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미국의 의도는 팔레스타인반시오니즘무장세력 하마스의 이스라엘폭격으로 분쇄됐다. 2023.10.7 팔레스타인전이 개시된뒤 2024.2기준 팔레스타인인이 2만6000명 넘게 학살된 사실은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결코 수교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준다.

2023.3 EU 우르줄라폰데어라이엔집행위원장은 중국방문을 앞두고 중국과 관련해 <디리스킹(de-risking)>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폰데어라이엔은 <중국으로부터<디커플링>하는것은가능하지도,유럽의이익에맞지도않는다>·<<디커플링>이아닌<디리스킹>에초점을맞춰야한다>고 언급했다. 4월 미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설리번이 <우리는<디커플링>이아니라<디리스킹>을지지한다>며 대중경제봉쇄정책을 <디리스킹>으로 정리했다. 이어 5월 G7정상회의에서 미국은 <디리스킹>책동을 본격화했다.

<디리스킹>이자 <신워싱턴컨센서스>다. <디리스킹>을 주창한 설리번이 비슷한때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미국의새경제리더십>을 주제로 발표하며 <워싱턴컨센서스>를 폐기하고 <신워싱턴컨센서스>를 내세웠다. 작은정부에서 큰정부로 회귀하고 IMF·WTO·WB등 국제경제기구를 통하지않고 미국이 직접 나서며 친미국가중심으로 <좁은마당>을 형성해 반미국가들을 상대로 <높은울타리>를 치겠다는것이 <신워싱턴컨센서스>의 핵심내용이다. 국제경제기구들이 미국중심의 약탈구조형성에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못하자 <신워싱턴컨센서스>를 주창하기 시작한것이다. 국제정치기구에서 유엔(국제연합)상임이사국에 중·러가 있어, 미국의 거수기로서의 유엔역할이 축소되자 G7을 띄우는것과 같은 방식이다.

2023.8 바이든미<정부>는 대중국투자통제행정명령을 또 발표했다. 내용은 첨단반도체에 더해 양자컴퓨팅·인공지능등 3개기술분야에 대한 투자제한이다. 바이든은 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민감기술및제품에서중국등의발전위험에대처하기위해국가위기상황을선언한다>며 침략적대중제재를 심화했다.

미국은 중국을 궁지에 몰아넣으며 결국 전쟁에 나설수밖에 없게 만들어 중국에 <침략자>오명을 덧씌우려는 극히 기만적인 반중침략책동을 벌이고있다. <탈위험>이라는 <디리스킹>의 본질은 <디스트럭션(destruction)>이다.

심화되는 군사·경제적위기와 임박한 대만전

미국의 대중경제봉쇄·반중침략책동은 필연적으로 대만전을 불러온다. 중국의 <헝다사태>등 부동산문제와 이에 따라 연쇄적으로 발생한 지방부채문제는 중국의 관련정책상오류에 근본원인이 있지만 이를 촉진한것은 미국의 반중정책이다. 2021.12~2023.6말 중주식·채권시장에서 빠져나간 자금규모는 무려 1880억달러(251조3000억원)에 달한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자료에 따르면 2023.9 중국의 자본순유출규모는 전월대비80%가까이 증가한 750억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2016말이후 7년만에 최대규모다. 2023.8.7~10.19 중국의 주식매매제도인 선강퉁·후강퉁을 통해 중증시에서 빠져나간 자금은 221억달러로 사상최대다. 금융세력들은 중증시에서의 자본유출이 전례없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분석했다. 2023 3분기 외국인직접투자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중테크에 대한 투자도 급감했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벤처자금총투자액은 2021 329억달러에서 2022 97억달러, 2023 12억달러로 빠르게 급감했다. 고금리정책에 더해 미국의 반중책동으로 인한 불안감증폭으로 외자유출속도가 가속화됐고, 이에 대한 후과가 중경제의 취약한 부분인 부동산과 지방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는 분석이다. 2024.1.11 미증권거래위원회가 비트코인의 ETF(현물상장지수펀드)상장을 승인하며 외자유출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국제금융협회는 <지정학적위험>·<투자심리변화>로 인해 2024 중주식·채권시장에서 650억달러의 외국인투자금이 빠져나갈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은 외자유출을 막기 위해 2023.8 외국기업대상으로 세부담완화·비자발급절차간소화등 24개조치를 내놨고 9월 상하이자유무역시범지구·링강지구의 외국인투자자가 투자관련자금을 자유롭게 송금할수 있도록 허용하는 규칙을 시행했다.

한편 중국은 미국채를 대량매각하고 금수매를 확대하고있다. 2023.11기준 6개월간 계속 순매도세를 유지한 결과 중국의 미국채보유규모가 14년만에 처음으로 8000억달러선을 하향돌파했다. 9월기준 7781억달러로 집계됐다. 중국은 2001 WTO가입후 <세계공장>을 자처하며 값싼 노동력으로 상품생산을 해 미국에 수출했고 미국채를 대량매입했다. 쌍둥이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중국의 국채매입 덕분에 저금리를 유지할수 있었다. 트럼프정부들어 <무역전쟁>이 본격화되며 중국은 미국채를 대량 매도했으나 2019까지 미국채보유규모를 1조달러이상 유지하며 보유국순위1위를 기록했다. 바이든<정부>들어 빠른 속도로 국채를 매도한 결과 중국의 미국채보유는 10여년만에 40.9%나 급감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이자부담증가를 목적으로 국채를 매도하고있다고 말하지만 미국채가격하락은 중국이 보유한 미국채가격도 하락한다는 의미이기에 부정확한 분석이다. 왕유신중국은행연구원선임연구원은 <지정학적갈등이증가하는상황에서달러화표시자산을너무많이보유하면위험에더크게노출될수있다>·

<금이나원유등의전략자산을늘리면자산안정성이높아질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는 전쟁준비를 하고있는것이다. 이는 미국채매도와 함께 금보유량을 계속 늘리는것으로도 확인된다. 2023 3분기 전세계중앙은행은 분기기준 역대3번째로 많은 337t의 금을 매입하며 금보유량을 계속 늘렸다. 2023.1~9 전세계중앙은행이 매입한 금800t중 중인민은행이 사들인 금만 181t이다. 2022.11부터 본격적으로 금을 매입하기 시작한 중국은 2023.9까지 243t의 금을 사들이면서 보유량이 2192t으로 확대됐다. 금매입이 확대된 주요인은 우크라이나전발발이후 미국이 달러를 무기로 러은행들을 스위프트(국제은행간통신협회)에서 퇴출시키자 이를 대비해 달러의존도를 낮추기 위한것이다.

2022 우크라이나전으로 시작된 3차세계대전의 불길이 2023 팔레스타인·중동을 거쳐 2024 동아시아로 번지고있다. 동아시아전의 주전장중 한곳이 대만이다. 미국은 일군국주의무력과 필리핀을 동원해 남중국해에서 대중침략적군사연습을 계속 전개하는 한편 대만분리독립세력인 민진당을 배후조종해 <대만독립>을 부추기고 중국의 <1국양제>에 도전하며 중주권을 침해하고있다. 2024.1.13 라이칭더민진당후보가 총통에 당선됐다. 미민주당측은 2023.5 <중국이대만을침공할경우TSMC를폭파해야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반중침략적흉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바있다. 이미 유엔가입을 시도하고있는 대만이 미국과 수교를 맺는다면 중국은 대만전을 결행하지않을수 없게 된다.

침략과 약탈 없이는 존재할수 없는 미제국주의는 그자체모순으로 인해 반드시 파산몰락한다. 미제침략세력이 동아시아전을 개시하며 3차세계대전을 본격화하는것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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