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8~9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이후 코리아반도의 대결과 긴장은 더욱 격화됐다. 194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이후 소련군은 철군했다. 미군은 1948 제주민중항쟁과 여순군인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철군을 미루다가 1949.6 철군했다. 1950.1 미국은 <애치슨라인>을 선언했다. 대립과 갈등이 팽배한 이시기에 이런 선언을 한 미국의 의도는 분명했다. 미국은 전쟁의도가 없다며 코리아전쟁의 발발원인을 왜곡하는데 이를 이용했다. 1948~49 코리아반도에서 공식적으로 전쟁통일을 강력하게 주창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대만의 장개석을 만나 나토와 유사한 형태의 <태평양동맹>을 획책했다. 이승만은 정권강화를 위해 친일파를 기용하고 반민족행위특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국가보안법>으로 이남내진보정치세력을 말살하려했다. 전쟁의 기운이 밀려드는 가운데 1950.6.7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는 평화통일호소문을 채택하고 <남북인민들은닥쳐오는8.15광복5주년을통일로써기념해야한다>면서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6.15~17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회의를 38°선부근의 해주 또는 개성에서 개최할것을 제안하고 남측과의 협의를 위해 6.10 대표단3인을 파견했다. 이들은 6.11 38°선을 넘어 서울로 향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조국전선의 요청을 받은 최고인민회의는 남의 국회와 단일입법기관으로 통합하는 안을 제안하고 6.21까지 회신을 요청했으나 남국회는 답변을 보내지않았다. 한편 1950.6.18 미국무부고문 덜레스가 38°선을 방문하고 6.19 남국회개회식에 참여해 연설했으며 6.22 도쿄를 방문해 맥아더극동군사령관등과 회합했다. 한호석정세연구소소장은 인민군에게 내린 정찰명령서와 작전명령서에는 서울이남지역의 작전계획이 없었다,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후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민족반역자>이승만을 비롯한 9명을 체포하고 남국회를 소집해 평화통일방안을 추진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강이남지역장악이 늦어져 이승만과 국회의원들의 탈출을 막지못해 이계획이 실현되지못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6.25 유엔안보리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북의 침략으로 규정한 <결의초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은 유엔안보리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지위가 회복될때까지 회의에 불참할것을 선언한 상태였다. 6.27 트루먼은 코리아전의 <지원>을 선언했고 유엔안보리를 소집해 남군사원조결의안을 채택하고 6.30 맥아더에게 지상군파견을 비롯해 극동군전병력을 사용할 전권을 줬다. 7.1 지상군선견대 스미스특공대가 부산에 도착했고 이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전시총동원령이 내려졌다. 7.14 이승만은 <대한민국>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했다. 미군정이래 <대한민국>정부에 군작전지휘권이 넘어온적이 없어 이승만의 이양서한에 합법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1975 유엔군사령부해체결의안이 통과된뒤 1978.11 미남연합사령부를 창설해 군작전통제권등 실질적권한을 미남연합사령부로 이양해놓은 상태다. 유엔군에는 병력파견16개국·의료지원6개국과 공식적으로는 참전할수 없지만 병참으로서 역할을 한 일본과 <한국군>까지 포함하면 총24개국이 망라됐다. 코리아전은 유엔군을 조직한 첫번째사례자 현재까지 유엔군의 이름으로 파병한 유일한 사례다. 1991 북이 유엔에 가입했음에도 유엔사는 북을 대방으로, 여전히 판문점의 관리기능을 유지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