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4.9 항쟁의기관차〉 일본군국주의의 패퇴

〈2024.9 항쟁의기관차〉 일본군국주의의 패퇴

일본은 빠르게 동남아와 태평양일대 거의 전지역을 차지했으나 6개월여만에 뚜렷이 한계에 다달았다. 1942.4 루즈벨트는 태평양전쟁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중화민국·영국·호주·네덜란드·뉴질랜드·캐나다의 대표가 참석했다. 후에 영국령인도제국·필리핀대표가 추가됐다. 회의는 미·영연합사령부의 결정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갖지않았지만 이들사이에 효율적인 대응책을 추진할수 있었다. 연합군의 대응은 초기에는 상징적인 수준이었으나 점진적으로 강화됐다. 4.18 미군은 둘리틀중령의 지휘하에 도쿄·요코하마·요코스카·가와사키·나고야·고베·오사카등 일본각지를 B25미첼폭격기16대로 폭격했다. 피해의 규모를 떠나 일본군부에게는 충격을 주고 미국은 고무를 받았다. 일본은 일본토를 공격할수 있는 연합군측의 비행장들을 없애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다. 중본토의 저장성·장시성을 공격해 중화민국공군기지를 파괴했으며 미해군을 일본토에 접근할수 없는 지점으로 몰아내기 위해 그전초기지인 미드웨이해전이 추진됐다. 그에 앞서 호주로의 병참선을 끊기 위해 포트모르즈비를 장악하려했으며 이를 위한 산호해해전에서 미항모에 일시적인 타격을 주는데 그쳤다. 일본은 이해전이후 포트모르즈비에 대한 작전을 포기해야했다. 뒤이은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은 미드웨이를 장악하는데 실패하고 항공모함4척과 오랜시간 단련된 조종사들을 대거 잃으면서 해군작전능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미군은 해전이후 일본이 호주로의 병참선을 끊기 위해 비행장을 건설하고있던 과달카날섬에 대한 작전을 진행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1943.2까지 진행됐다. 루즈벨트는 일본군에 대한 무제한잠수함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경고·생존자구조작업 없이 추축국이 지배하는 해역의 상선·전함·여객선등을 모두 격침시키도록 했다. 일본의 잠수함전력은 상당했지만 실질적인 전투성과를 내지못했다. 반면 미군의 잠수함은 일본선박을 격침시키는데 최대한으로 활용됐으며 연합군은 이런 작전으로 일본의 물자수송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일해군은 석유부족으로 작전을 정상적으로 수행할수 없는 상황이 됐다. 1944.6 미군은 사이판섬에, 1944.10 민다나오섬북쪽의 레이테섬에 상륙했다. 바탄반도를 차단하기 위해 마닐라남부에서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1945.2.16 공수부대와 상륙부대가 코레히도르섬의 일본군요새를 공격했고 2.27 섬을 확보했다. 대륙에서는 일제에 항거하는 아시아민중들의 투쟁이 일제의 전략을 파탄냈다.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의 반일민족해방투쟁과 미얀마·말레이·싱가포르·필리핀의 반일항전이 전개됐다. 미얀마의 공산주의자들은 친일괴뢰정부산하<미얀마독립의용군>에 들어가 무장폭동을 준비했고 1944.8 반파쇼인민자유연맹을 조직해 이산하에 국민군과 유격부대들을 두고 일제의 군정기관과 군대를 습격, 철도·도로를 파괴했으며 강제동원과 전략물자약탈을 반대해 투쟁했다. 연맹은 1945.3.27 무장봉기를 하고 5.1 수도 양곤을 해방했다. 말레이와 싱가포르에서도 반일조직들을 묶고 투쟁했다. 1942말 말레이중부및북부산악지대에 유격부대들이 조직돼 무장투쟁을 벌였다. 필리핀공산당도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조직하고 루손섬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5.1 필리핀항일인민군은 일제침략군에 대한 총공격작전을 벌여 2월까지 루손섬의 중부와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을 해방했다. 미군은 일본토에 대한 전진항공기지를 얻기 위해 1945.2~3 일영토이며 태평양전쟁에서 요새화된 이오섬에 대한 작전을 전개했다. 5주간의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전투중 가장 치열하고 잔인했다고 알려졌으며 미군은 일본군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어 미군은 1945.4~6 오키나와를 공격했다. 일본은 본토에서의 <최후결전>을 준비하며 일본주민들에게조차 <옥쇄>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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