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4.12 항쟁의기관차〉 〈대북국지전〉도발과 〈대남자작극〉실패

〈2024.12 항쟁의기관차〉 〈대북국지전〉도발과 〈대남자작극〉실패

김용현은 9.6 국방장관으로 취임한직후부터 계엄의 명분이 될 국지전을 지속적으로 도발해왔다. 구체적으로 10.3·9·10 총3차례의 평양무인기공격과 대북전단살포, 10.15 중화기사격, 10.17 다연장로케트발사연습과 11.27 <도발원점궤멸>을 내용으로 하는 백령도해상사격훈련, 11.28 <오물풍선>원점타격지시로 국지전을 도발했다. 평양무인기공격에 대한 김용현과 군의 입장은 여전히 <확인해줄수없다>지만 김용현의 지시와 여인형방첩사령관의 기획에 따른것임이 군내부에서 확인됐다. 11.28 조선에서 32번째 <오물풍선>이 내려왔을때 김용현은 <경고사격후원점타격>을 지시했으나 김명수합참의장이 따르지않았고 이에 김용현이 <합참개념없는놈들>·<쟤빼>라고 폭언하는등의 사실이 폭로됐다. 이같은 도발은 조선이 비난담화와 성명을 연이어 내면서도 어떤 물리적인 군사행동도 하지않으면서 파탄나게 됐다. 계속되는 폭로에도 조선은 침묵을 유지하고있다. 도발이 통하지않자 윤석열반란무리는 군인들을 <북한군>으로 위장시켜 한동훈을 암살하고 체포된 조국·양정철·김어준을 호송하는 부대를 습격, 구출하는 시늉을 하다가 도주하는 <대남자작극>을 시도했다. 12.12 미하원의원 셔먼은 <미국만의정보수집능력이있다>·<만약한국군이한국내한장소를공격해서사건이발생했다고해도미국은북의공격이아니라는걸알고있을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는데, 다음날 국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전체회의에 증인출석한 김어준은 <특정장소에북한군복을매립한다.일정시점후에군복을발견하고북한의소행으로발표한다.>는것이 <암살조>임무였다고 폭로했다. 또 김건희가 최근 <OB>들과 연락하거나 극우유투버들에게 한동훈여당대표를 공격하도록 선동했다고도 밝혔다. 김어준이 말한 <암살조>는 HID로 알려졌는데 이조직의 전신이 1945.11 미군정청국방총사령부정보과다. 이후 조선경비대총사령부정보국을 거쳐 육군본부정보국으로 개편됐으며 현재는 평시 <한국>내 임무가 없고 유사시 조선에 투입돼 요인암살과 폭파임무등을 수행하는 극비부대다. 박근혜<정권>당시 정보사령관었던 노상원은 <비선>으로 윤석열·김용현과 연락하며 계엄에 깊숙이 개입했다. 7.24 정보사는 이례적으로 국가종합전자조달사이트에 긴급소요요구로 <훈련영화피복제조>입찰공고를 내고 HID부대용으로 사용할 <북한>군군복제작에 나섰으며 11월 약500벌, 계엄3주전 60벌을 사들였다. 2014.7이후 정보사는 물론 <한국>군의 모든 부대에서 이를 입찰공고한적이 없었다. 계엄2달전부터 노상원은 <휴민트>담당대령과 HID담당대령을 데리고 <호남지역출신제외>·<시키면다하는인원>·<몸이건강하고힘좀쓰는인원>등의 선발기준을 갖고 요원선별작업을 치밀하게 진행했다. 12.3반란당시 계엄성공이후 담당할 임무인 임무명<계엄상황관리TF>를 요원들에게 줬다. 1차임무는 케이블타이로 손발을 묶고 두건을 씌워 선관위직원들을 납치하는것이고 2, 3차 임무는 알려지지않았다. 특수인원5명포함 소령·중령장교들 위주로 38명이 경기도 판교에 대기했고 납치용민간차량까지 준비했지만 계엄실패로 개시되지못했다. 부승찬민주당의원은 기시감이 들었다며 <1952금정산공비사건>을 언급했다. 부승찬은 당시 이승만정권이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을 풀어서 무장공비로 위장하고 계엄령선포했다, 국회의원들 잡아들여서 개헌을 했던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대북도발과 <대남자작극>은 둘이 아니다. 윤석열의 <대북국지전>과 <대남자작극>을 통한 전시·사변조작을 기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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