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2~4 김일성수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건국후 첫외국공식방문으로 소련을 방문하고 3.17 소련과 경제적및문화적협조에관한협정을 체결했다. 알려진바에 따르면 김일성수상은 소련방문에서 3.7 스탈린서기장과 회담하면서 남조선의 반동세력은 절대로 평화통일에 동의하지않을것이라며 그들은 자기들이 우리를 공격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질때까지 분단을 고착화하려고하며 이제 우리가 공세를 취할 좋은 기회가 왔다면서 <우리군대는강하고,남조선에는강력한유격대의지원이(무력해방을)기다리고있다>고 피력했다. 이에 스탈린은 <대남공격은불가하다>며 북조선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아직 차지하지못했고 남조선에 아직 미군이 있다, 전쟁이 나면 미군이 개입할것, 아직도 38°선분할협정이 유효하다는것을 기억해야한다며 우리가 먼저 위반하면 미국의 (무력)개입을 막을 명분이 없게 된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12.16 모택동중국가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했는데 모택동의 대만섬점령을 위한 소련공군지원요청에 대해 스탈린은 군사지원은 배제하지않는다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개입할 구실을 주지않는것이라며 군사지휘관들과 군사고문들은 어느때나 파견할수 있지만 그밖의 문제들은 좀더 생각해봐야하겠다고 사실상 군사지원을 보류했다. 스탈린은 당시 통일과 영토완정의 과제를 가진 조선과 중국에 일관되게 미국의 개입을 우려해 군사지원을 거부했다. 김일성수상은 한편으로 인민군정치부주임 김일을 비밀리에 파견해 중국측에 중국인민해방군에 편성된 조선인부대를 인민군에 전속시키는 문제를 논의하고 군사행동을 취할 의향을 밝혔다. 모택동은 필요한 시기에 중공군2개조선사단을 북조선에 넘겨줄수 있으며 만약 코리아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면 <힘이닿는모든원조,특히상술한사단의식량과무기를제공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권고조선동지>에서 미국이 철수하고 일본인마저 돌아오지않는다는 상황에서 또한 <남조선에공격을할필요가없으며좀더유리한기회를기다린다>고 했다. 모스크바는 북조선이 침범받지않는다는 보증과 동시에 스티코프가 제출한 건의, 즉 미군이 남에서 철수하면 소련도 청진의 군사기지와 소련이 평양에 설치한 군용비행장을 철폐한다는 계획을 비준했다. 1949.9.24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정치국은 <조선인민이통일을고대하고있다는동지들의견해에동의하지만,때를기다려야한다.지금은(남조선에서)유격투쟁을강화하고남조선에서반정부운동이성숙되기를기다리는게좋을것으로생각한다.>면서,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은 <전쟁초기단계로시작되는것이므로,지금은때가아니라>는 의견을 담은 문서를 조선노동당중앙위정치국에 보냈다. 1950.3.30~4.25 김일성수상은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했고 스탈린은 김일성수상에게 <국제환경과국내상황은(소련이)조선의통일을위해더욱적극적인행동을취할수있도록바뀌었>다면서 북조선이 서울해방작전을 실행하는경우 미국이 무력개입을 하지않겠는가하는 문제를 검토해야한다는것과 함께 북조선의 서울해방작전이 중국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이문제와 관련해 김일성수상은 <모택동동지는조선을해방하려는우리의희망을언제나지지했습니다.모택동동지는중국혁명이완성되면우리를도와줄것이고,필요한경우병력도지원하겠다고여러차례말했습니다.하지만우리는우리힘으로조선의통일을실현하려고합니다.우리는해낼수있다고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극동방어선에서 코리아반도와 대만섬을 제외시켰다는 첩보를 갖고있었고 중국혁명은 승리했다. 실전화해야할 과제가 있었지만 원자탄시험도 성공했다. 미국은 핵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몇해안에 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할것이라고 전망하고있었다. 소련은 3차세계대전은 피해야했으므로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면서도 전쟁을 반대하던 입장은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