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5.2 항쟁의기관차〉 총반격전,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2025.2 항쟁의기관차〉 총반격전,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1949.12.30 미백악관국가안보회의는 코리아반도와 대만섬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대아시아정책 NSC-48을 채택했다. 이내용은 1950.1.5 트루먼대통령과 1.12 애치슨국무장관에 의해 발표됐다. 조선은 이를 기만책으로 보면서 1950 미제는 새 전쟁도발책동을 더욱 발광적으로 벌였으며 2.16 미극동사령관 맥아더가 이승만을 도쿄로 불러들여 <북벌>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고 7월이전에 전쟁을 도발할것을 계획했다고 봤다. 또 이승만은 <5.30선거>에서 패배해 수세에 빠지게 되자 전쟁도발로 정치적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다면서 <국군>의 대대적인 배비변경이 실시되고 38°연선의 모든 국군부대들이 공격진지를 차지했으며 주일미군도 조선출동준비를 갖춰 임의의 시각에 전쟁이 일어날수 있는 위험한 정세가 조성됐다고 기술하고있다. 한편 중국인민해방군의 하이난도해방작전이 진행중이던 4.12 NSC-48이 NSC-68로 수정됐다. 그에 기초한 미육군성의 코리아반도전쟁계획 SL-17이 6.19 미합참본부에 제출됐다. SL-17에 의하면 조선인민군이 <한국>군을 공격하는경우 신속하게 후퇴해 부산방어선을 구축하고 인천에 상륙해 반격, 북진한다는것이었다. 실제 전쟁은 SL-17전쟁계획에 의거해 진행된셈이다. 1950.6.10 남언론의 한보도에 따르면 6월중으로 존슨(미국방장관)·브래들리(미합참의장)·덜레스(미국무부고문) 3인이 도쿄에서 맥아더와 회담하고 미국의 극동방위문제와 대일강화의 구체적안을 작성해 본국정부에 제출할것이며 트루먼과 애치슨이 이에 대한 최종결정을 내릴것으로 알려졌다. 6.17 덜레스가 방<한>해 38°선을 시찰하고 이승만을 만난뒤 도쿄로 향했다. 6.18 존슨이 일본에 도착했다. 6.20직후 이들의 회합이 이뤄졌다. SL-17전쟁계획이 검토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조선은 1950.6.25 새벽 10여만명의 <한국>군이 38°선전역에서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 모험적인 <전격전>으로 공화국북반부를 단숨에 삼키려고 시도하면서 해주·금천·철원등 여러방향들에서 38°선이북지역으로 1~2㎞까지 침입해들어왔다고 기록하고있다. 김일성수상은 6.25 내각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우리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와 영예를 수호하기 위하여 적들과 단호히 싸워야합니다, 적들의 야만적인 침략전쟁에 우리는 정의의 해방전쟁으로 대답하여야합니다, 우리인민군대는 적들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즉시 결정적인 반공격전을 개시하여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여야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김일성수상은 6.26 방송연설<모든힘을전쟁의승리를위하여>를 통해 무엇보다도 인민군용사들이 공화국북반부에서 실시된 민주개혁의 성과들을 사수하며 남반부동포들을 반동통치에서 해방하며 인민공화국의 기치밑에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정의의 투쟁에서 용감성과 헌신성을 발휘할것을 호소했다. 1950.3~4 김일성수상은 스탈린서기장과의 회담에서 외부의 군사지원을 받지않고 주체역량으로 조선의 통일을 실현할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서울해방작전이 신속히 전개돼 3일이면 승리할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이 무력개입을 감행할 시간을 갖지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정신을 차릴때쯤이면 전체 조선인민은 새로운 통일정부를 열렬히 지지하게 될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서울해방>으로 이승만을 항복시키고 <대한민국>국회를 소집해 조선의 최고인민회의와 연합하는 방식으로 전조선적입법기구를 수립하는것이 계획이었는데 이승만이 빠르게 도피하고 국회의원다수가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계획대로 되지못했다고 본다. 3일간의 서울해방전투로 전국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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