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5.3 항쟁의기관차〉 대학살범죄로 시작된 공안정국

〈2025.3 항쟁의기관차〉 대학살범죄로 시작된 공안정국

1979.10.26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살됐고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이 일으킨 12.12쿠데타에서 미국은 내전발생시 조선의 <남침>이 우려된다며 진압병력이 출동하지않도록 방조했다. 1980.5.17 제주까지 포함한 비상계엄확대에 대한 반대시위가 광주에서 격화되자 전두환은 계엄군을 투입하고 광주민중을 학살했다. 미<한>연합사승인아래 5.27 최종진압작전으로 항쟁을 제압했다. 광주민중학살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전두환군부세력은 이후 진보·민주세력에 대한 전면적탄압으로 권력을 유지·강화했다. 7.4 계엄사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광주항쟁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이 광주항쟁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무기반납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제2의광주사태>를 준비했다며 계엄법·반공법·<국가보안법>위반으로 걸었다. 이사건에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인사들을 연루시켜 민주화운동진영전체의 와해를 기도했다.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의 폭압통치상징이었던 중정(중앙정보부)은 전두환군사파쇼정권에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로 이어졌다. 1981 <학림사건>을 조작해 비합학생운동조직으로 학원시위를 주도하던 전민학련(전국민주학생연맹)과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반국가단체>로 몰아갔다. 전민학련의 규약 어디에도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없고 구체적물증도 없었음에도 불법구금과 변호인및가족의 접견차단, 각종 고문과 여성피의자에 대한 강간위협등으로 강제자백을 유도했다. 결국 25명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같은해 공안당국은 부산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교사·회사원등 22명이 <공산주의혁명을계획>했다고 기소하면서 <부림사건>을 조작했다. 이어 학생·교사·대학강사등 10여명이 100일잔치에 모여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고 조작한 <아람회사건>, 16명의 친목모임회원들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유죄판결한 <횃불회사건>, 1982 전북 군산제일고 전·현직교사들을 최초의 5.18수배자 윤한봉과 엮어 간첩행위로 구속한 <오송회사건>등의 무리한 공안사건들이 줄줄이 조작됐다. 이과정에서 불법감금·폭행·고문이 수도없이 자행됐다.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한 <삼청교육대>사건은 전두환군사파쇼정권의 최대인권유린학살극이었다.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범죄전력이 없는 수만명의 시민·노숙인들을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군부대내 <삼청교육대>로 끌고가 조직적폭력아래 강제노역을 시켰다. 전두환정권은 사상·출판·집회결사의자유를 원천봉쇄하면서 민중저항을 억압했다. 1985부터 사복체포조<백골단>을 동원해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구타와 살인을 가리지않고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진압했다. 1987.1.14 서울대생 박종철이 대공분실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으로 살해되고 6.9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민주화요구와 야당의 개헌요구가 맞물리며 6월항쟁으로 폭발했다. 대중적개헌투쟁은 군사파쇼정권을 무너뜨리는 반파쇼민중항쟁으로 발전했으며 우리민중의 변혁적진출이 가속화되는 계기로 됐다. 6월항쟁초반 전국에서 매일 평균100회이상의 시위가 전개되고 1일기준 최대인파150만명이 투쟁에 참가한 사실은 우리민중의 민주화실현과 진보적발전을 향한 열망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미는 남민중의 투쟁을 더이상 군사파쇼로 통제할수 없게되자 기만적인 개량화조치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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