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5.4 항쟁의기관차〉 대규모로 확대된 대조선침략연습

〈2025.4 항쟁의기관차〉 대규모로 확대된 대조선침략연습

베트남전으로 막대한 정치경제적부담에 시달린 미국은 1970.2 <닉슨독트린>을 공식화했다. <아시아주둔미지상군의단계적철수>에 따라 1971.3 주<한>미군7사단병력2만여명을 전격 철수했다. 그러면서 신속기동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미<한>합동군사연습의 방향을 전환했다. 1971~75 <프리덤볼트>연습이 진행됐다. 1976.6 역대최대규모의 대조선침략연습이자 대표적인 야외기동훈련인 <팀스피리트>가 첫실시됐다. 여기에는 1975 헬싱키조약을 계기로 유럽에서 대규모군사연습을 할수 없게 된 미국의 사정이 고려됐다. <한국>을 대체훈련지로 선택하고 <팀스피리트>를 매년 벌이면서 20만~30만병력과 다양한 핵투발수단을 동원했다. 군사분계선인근까지 기동했고 연습에는 연합해상작전·야전기동연습·연합상륙작전·공수낙하연습은 물론 핵폭격모의연습까지 포함됐다. 1985부터는 화학전연습이 추가됐다. 유엔사해체결의에 따라 1978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됐고 <팀스피리트>연습주관 역시 유엔사에서 <한>미연합사로 이관됐다. 이후 규모·강도는 더 심화됐다. 1976.8 벌어진 <판문점>사건은 미국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8.16 5차블록불가담운동정상회의에서 조선은 주<한>미군철군문제와 미핵무기철거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고, 8.17 유엔성원국들은 <한국>에서의 모든 군사장비철수와 군사연습·도발행동중지촉구를 담은 대미결의안을 9월 열릴 31차유엔총회에 상정했다. 8.18 미국은 <폴버니언>작전에 따라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서 사전논의 없이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며 조선을 강하게 자극했다. 불법적인 벌목을 중단할것을 요구한 조선인민군경비대원에게 배럿소위가 도끼를 던졌고 이를 대원이 받아 다시 던지면서 배럿이 즉사했다. F4·F111·B52폭격기, <미드웨이>항모등을 동원하는 대규모무력시위와 전투준비태세<데프콘3>이 발령됐고 코리아반도는 또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미백악관에서 워싱턴특별대책반이 소집됐으며 미국무부와 함께 <이사건의결과로빚어지는어떠한사태에대해서도그책임은조선에있다>는 공동성명을 당일 발표했다. 조선은 대규모소개작전과 선제기습타격준비를 갖추면서 전면전태세에 돌입하며 맞섰다. 미국의 구두메시지에 8.21 조선측은 김일성주석이 지시한 유감표명을 전달했다. 미국은 잘못을 인정한것이 아니라며 반발하더니 하루만에 태도를 180° 바꿔 <긍정적인조치>로 인정한다며 뜬금없는 <사과설>을 조작했다. 전면전은 피했지만 갈등은 지속됐다. 이사건으로 유엔총회결의안통과는 무산됐다. 한편 1970~80년대 소련사회주의의 변질과 중국사회주의의 <개방>노선으로 <냉전>종식은 예견됐다. 조선은 전략적으로 자체역량을 키워나갔다. 무엇보다 핵은 평화를 지키는 자위력, 민족해방을 위한 동력이었다. 1970년대 조선은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에 미사일을 판매하며 서방에 조선의 미사일을 일부러 노출시키면서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1982.6.12 삼지연에서 열린 조선노동당중앙군사위회의에서 김정일후계자의 영군체계가 확립됐는데 이는 핵무장완성과 관련됐다고 분석한다. 김일성주석은 <1930년대나1950년대와는달리군사과학기술이고도로발전한시대인것만큼현시대의발전추세와군사사업에정통하고무비의담력과천재적예지,세련된영군술을겸비한김정일동지의영군체계를새로운높은단계에서세우는것이너무도당연>하다고 강조했다. 1991 소련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소미대결전은 조미대결전으로 전환되며 전쟁국면은 심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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