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항쟁의기관차 〈2025.4 항쟁의기관차〉 〈총포성없는전쟁〉, 조미대결전의 시작 

〈2025.4 항쟁의기관차〉 〈총포성없는전쟁〉, 조미대결전의 시작 

조선은 1985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들어갔고 1992.1 IAEA(국제원자력기구)핵안전협정에 서명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조선군사시설에 대한 사찰의무를 강요했다. <냉전>종식후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군사연습의 규모와 범위가 줄어들었지만 코리아반도에서의 핵전쟁연습은 <냉전>시기보다 호전성과 침략성이 더욱 노골화됐다. 1993.3 <팀스피리트> 미<한>합동군사연습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조선은 김정일최고사령관명의로 중대방송을 내고 <팀스피리트>가 선제타격을 위한 침략적예비전쟁이며 핵시험전쟁이라고 규정하며 전국·전민·전군의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구체적으로 전체조선인민군과 인민경비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에 대해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전체주민들은 주체적전쟁관점으로 무장해 경제건설에서 혁신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어 NPT에서 탈퇴했다. 1993.5.29 일본열도를 향해 중거리탄도미사일<화성7>을 발사했고 5.30 <화성8>·<화성9>를 연달아 발사했다. <화성8>은 괌북쪽 약100㎞ 떨어진 서태평양해상에 떨어졌다. <화성9>는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약400㎞ 떨어진 해상에 떨어졌다. 미국은 조선의 영변핵시설을 타격하겠다고 대응했지만 클린턴정부가 전쟁시뮬레이션을 돌리자 미측이 참패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미국이 조선에 회담을 제안했고 6.2~11 뉴욕에서 조미회담이 진행됐다. 1994.6.15 카터전대통령이 특사로 조선에 방문했다. 김일성주석은 카터를 통해 전격적으로 남북수뇌회담을 제안했고 합의됐다. 7.8 김일성주석의 서거와 남북수뇌회담의 불발에도 불구하고 조미대화는 계속 진행돼 1994.10.21 제네바기본합의가 채택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팀스피리트>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한편 김영삼이 김일성주석서거이후 곧 전쟁이라도 일어날듯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조선은 <동족끼리조문은못할망정비상경계를펴고총부리를대느냐>고 맹비난했다. 클린턴정부는 조미간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남북관계에서는 남측이 대대적인 반조선망동을 벌이게하는 교활함을 보였다. 조선이 경제난·식량난을 겪으며 소련·동구처럼 붕괴될것이라고 본것이다. 조미기본합의서의 경수로건설도 태만했다. 대자연재해까지 겹친 최악의 상태에서 조선은 <고난의행군>·강행군을 시작했다. 조선은 이를 두고 <총포성없는전쟁>이라고 한다. 1994부터 <팀스피리트>는 연합전시증원연습으로 명칭만 바꿔달고 이전시기보다 더 위험하게 강행됐다. 1998 미국은 선제타격을 주요골자로 하는 <작계5027-98>을 채택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군을 주력군으로 보고 군을 강화해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선군정치로 3년간의 <고난의행군>·강행군을 결속짓고 1998 군사적공세를 재개했다. 1998.5 파키스탄사막에서의 수소탄·원자탄시험에 비공식으로 참가했고, 8월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궤도에 안착시켰다. 미본토에 핵미사일공격이 가해질수 있음이 확인되면서 조미대결국면은 결정적으로 전환됐다. 1999.3 클린턴정부는 <금창리>사건으로 조미기본합의의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려했지만 오히려 정치적타격을 입었고, 10월 페리보고서에 따라 대조선정책을 <고립압살>에서 <평화공존>으로 바꿨다. 미국이 조선의 군사적공세에 굴복하면서 2000 6.15남북공동선언, 10.12조미공동성명이 발표될수 있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