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소식 비정규노동열사 한성영 

비정규노동열사 한성영 

투쟁속에 자리잡은 삶
조심스러웠다. 산자에게서 죽은자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때로 잔인한 일이다. <평생동지>이자 동반자를 잃은 김인자씨에게 한성영동지와의 만남부터 함께 걸어온 길에 대해 들었다. 어려운 시기를 부부로, 동지로 겪어냈기에 김씨의 생활과 투쟁 속에 한동지가 더욱 깊게 남아있었다. 동지들은 한동지가 <몸을 아끼며 활동해야 한다는 말도 밀쳐내며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남김없이 바쳤던 그의 끝나지 않은 투쟁을 동지들이 이어가는건 당연하다.  

투쟁현장에서 만났을 법한 두사람의 첫 만남은 <새로운 기독교운동>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이뤄졌다. 2008~09년쯤 한동지는 기독교인터넷신문 <당당뉴스>기자로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김씨는 기독교계 소위 좌파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다. 2010년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 첫 총회에서 한동지가 사무국장을 맡게 됐다. 공부하고 글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활동가로서의 역할은 또다른 배움의 시간이었다. 활동가선배 아내와 경기대 법학과출신 남편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점차 동지적 관계로 나아갔다.

마침 집이 같은 고양시였다. 당시 김씨는 운동권내 정파문제 때문에 지쳐있고 우울한 상태였다. 어느 날 한동지는 <나한테 좀 기대세요>라고 말했다. 마술도 하고 성대모사도 하면서 연인에게 웃음을 되찾아줬다. 지하상가에서 산 2000원짜리 귀걸이와 반지로 프로포즈를 했다. 소박하게 맺어진 인연답게 두사람의 일상은 늘 낮은 곳에 있었다. 노점노동자들, 용산철거민들과 투쟁하면서 2011년 첫 살림을 탑차에서 꾸렸다. 공원내 전기를 사용하다 공원관리인에게 제지를 받았을 정도로 빈곤한 살림이었다. 이해 11월3일 혼인신고를 했고 7년이 지나서야 혼인식을 치렀다. 

비정규노동자에서 노동조합활동가로  
시작은 시설노동자였다. 2011년 한성영동지는 경기 고양시 롯데마트 주엽점에서 냉동기기 전기분야를 담당하는 도급계약직이었다. 원청인 롯데마트는 하청업체를 바꾸면서 한동지만 고용승계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인사에 개입했다. 평소 부당노동행위에 맞서왔던 그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사용자측에게 비정규직 계약해지는 손쉬운 일이었다. 한동지는 롯데마트 원·하청, 고양시, 고양노동청을 상대로 복직투쟁을 벌였다. 고양시에서 첫 비정규직투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노동조합설립이 절실했다. 당시 한동지는 <고양파주지역에 18개의 대형유통업체가 있지만 노조가 없어 비정규직이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다>고 했다. 고양파주일반노조 설립을 준비했다. 2011년기준 고양시 전체임금노동자의 56.7%가 비정규직으로 나타났다. 2013년 3월 <고양파주지역 비정규직문제해결을 위한 토론회>에서 <결국 우리 스스로 뭉치는 방법밖에 없다>면서 일반노조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일반노조를 통해 먼저 비정규직들을 규합하고 작은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는게 필요하>니, <지역단위의 일반노조>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2013년 전국사회서비스일반노조가 창립됐다. 이후 3년간 전국을 돌며 투쟁한 결과 장기요양기관노동자들 2000여명을 조직했다. 2018년 11월 전국 최초로 고양파주 시설원장들과 종사자들을 조직해 <요양서비스 질 향상을 위한 노사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현대판 고려장>으로 전락한 노인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들에게 저임금·고노동을 강요하는 한 질 좋은 돌봄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었다. 결성식에서 전국사회서비스일반노조위원장으로서 한동지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요양수가인상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한편, 노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으로 인력확충도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중민주사회 건설은 생존의 문제  
완강한 투쟁은 성과로 이어졌다. 한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조직사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요양시설에서의 집단감염과 사망률이 높아지며 조합원들과의 만남이 차단됐다. 그럼에도 고양파주 50여곳의 요양기관 체불임금투쟁을 전개하며 <무패행진>을 이어왔던 성과는 어디 가지 않았다. 2021년 1월 요양보호사들의 심야대기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한 첫 대법원판례를 이끌어냈다. 요양원측이 그동안 <휴게시간>으로 설정해 지급하지 않은 연장·야간 근로수당과 각 수당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1·2심 판결이 그대로 인용됐다. 

<휴게시간 임금 공제> 관행은 요양보호사들에게 <공짜노동>을 강요했고 임금수준을 동결하는 <꼼수>였다. 휴게시간 근무 외에도 휴무일에 연차휴가를 배정하거나 교육참석을 강제하면서 교육시간에 대한 임금미지급, 탄력적 근무시간제로 연장근무수당 미지급 등 노동착취사례가 차고 넘쳤다. 사측인 요양원을 대상으로 싸우는 동시에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정부와도 싸워야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2년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노인돌봄노동의 공적 성격을 고려해 요양보호사 표준임금 가이드라인 마련을 권고했지만, 보건복지부는 이를 거부했다.

요양보호사는 대표적인 저임금·비정규노동자다. 한동지의 아내이자 동지인 김인자전전국사회서비스일반노조위원장은 2024년 한인터뷰에서 정부가 요양보호사를 전문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2008년 장기요양제도를 도입하면서 정부가 요양보호사 급여를 190만원 정도 수준으로 맞춰준다고 했지만, 실제 급여수준은 100만원 정도에 불과하고 1년을 하든 10년을 하든 급여가 똑같다는 것이다. 요양보호사의 노동현실은 <존엄케어>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한동지가 염원한 노동자·민중중심의 민중민주사회 건설은 생존의 문제였다.

정규직전환을 이뤄낸 서울요양원투쟁
2024년 12월 고양서울요양원투쟁이 승리했다. 1년6개월간 투쟁으로 정규직전환을 이뤄냈다. 수십건의 소송에서 대부분 승리한 한동지는 <체불임금전문가>로 정평이 났다. 한노동자가 한동지를 추천받아 상담한 것이 계기가 돼 시작한 투쟁으로 2023년 11월 고양서울요양원분회가 설립됐다. 요양원측은 이후 <조합원만 솎아 계약을 종료하는 부당노동행위>로 노조활동을 탄압했다. 재고용계약거부철회와 단체협약체결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지속했다.

전면파업 5일만에 임단협이 타결됐다. 서울요양원의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한 조건에서 정규직전환후 한동지는 40여명의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일이 계산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장기간의 투쟁으로 이뤄낸 승리임에도 단협타결은 끝이 아니었다. 악덕원장은 아들로 원장을 교체했고 투쟁당시 노조가입을 주도했던 간호부장은 오히려 조합원탈퇴를 주도했다. 조합원들은 조합비자동이체를 중단했고 4월19일 35명이 한꺼번에 탈퇴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을 갈라치기하며 착취의 사슬을 단단히 옭아매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동지의 헌신적 투쟁으로 이뤄낸 투쟁의 성과는 비정규직투쟁의 역사에 고스란히 남았다. 

노동자를 뜨겁게 사랑했던 민중민주당당원
한성영동지는 민중민주당경기도당당원이다. 전국사회서비스일반노조위원장을 하며 평일에는 요양기관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했고 주말에는 광화문 미국대사관앞에서 민중민주당당원으로서 철야시위를 했다. 그의 마지막 철야시위는 4월13일이었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섰던 한동지에게 한번은 어디 가냐고 물었다가 아내는 서운한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장례식장에서 열린 민중민주당추모식에서 아내는 이런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한동지가 평소 민중민주당청년당원들을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했다. 한동지는 미대사관앞 철야시위뿐아니라 평택 캠프험프리스기지앞 시위·반파쇼반제기자회견집회·세계반제동시투쟁 등에서도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다>. 김병동민중민주당경기도당위원장은 옥중에 부고를 듣고 한동지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투사>라고도 했다. <동지들을 아끼는 사람>이며 동지들의 어려움을 알면 함께 힘들어했고 동지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으로 기억됐다. 정세를 늘 궁금해하며 반민족적·반민중적인 사건들에 대해 분개했고 실천투쟁으로 극복하려 했다. 김위원장은 한동지가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으로 노동자들이 갈래갈래 찢겨지면서 벼랑으로 내몰리는 시기에 60대요양사들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완강하게 전개했다>면서 <시설설비하는 청년노동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노조확대사업을 꾀했다>고 전했다.

민중민주당당원들은 <동지>라는 신성한 이름을 가슴에 박아넣으며 <한성영당원염원실현 민중민주쟁취!>의 구호를 들었다. 4월26일 미대사관앞 철야시위장에서 정당연설회를 열고 한성영당원의 뜻을 계승해 반드시 민중민주사회를 실현하겠다고 결의했다. 한명희민중민주당전대표는 <특히 마지막 투쟁현장, 그리고 지금도 진행중인 서울요양원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던 힘이 넘치고 열정적이었던 선배동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면서 <사람이 죽으면 일이 남는다. 그 일은 결국 남아있는 동지들이 하는 것>, <한성영당원이 못다 이룬 자주, 민주, 통일의 새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한성영당원의 몫까지 더 열정적으로 더 힘차고 가열하게 투쟁하겠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밝혔다. 

<끝내 우리가 움켜쥘 해방의 깃발>
<깃발가>를 좋아했다. <투쟁속에 피어나는 꽃 해방>. 그 해방세상은 <투쟁으로 쟁취한 세상 민중민주참세상>이다. 5월1일 노동절, 민중민주당·전총 공동집회에서 고인의 노래 <깃발가>를 불렀다. 전국사회서비스일반노조 조합원으로 참가한 아내 김인자는 <21년전 114주년때 대학로에서 최초로 비정규직이 연단에 올랐다>, <21년이 지난 지금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가보안법, 비정규직법안이 노동자중심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면서 <끝까지 비정규직문제가 현실의 문제인 것을 알고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최재빈민중민주당경기도당당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진 사회적 구조, 이로 인한 심각한 차별, 하청업체에서 또 하청으로 실타래가 엉키듯이 엉켜진 하청구조, 심각한 산재 1위국가가 현실>이라고 분개했다. <기계에 몸이 끼어 죽든 말든, 건설현장에서 추락해 죽는다 해도 본사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현사회의 썩어빠진 구조에 신물이 난다.>며 <노동자들이 정권의 주인인 민중민주세상을 건설하는 사회변혁의 길>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당일 민중민주당당원들은 전국사회서비스일반노조와 함께 <2025 세계노동절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죽었으나 살아왔고 산자들을 불러들였다. 그의 뜻이 우리의 뜻이었고 우리의 투쟁이 그가 그토록 바랬던 <민중민주참세상>을 앞당겨 실현할 것이다. 모든 착취와 억압의 사슬을 끊어낼 단 하나의 투쟁은 반파쇼반제투쟁뿐이다. 한동지가 생전에 했던 말 그대로 <제국주의는 파탄날 것>이다. 비정규노동열사 한성영은 영원한 민중민주당당원으로 영원한 동지로 살아남아 해방의 날에 함께할 것이다. 남은 동지들은 최근 <비정규직열사한성영추모위원회>를 꾸렸고 49재가 되는 6월8일 그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하기로 했다.

2012.12 롯데마트주엽점 투쟁

2013.3 비정규직토론회

2020.1 고양시청앞 노숙농성

2020.9 고양시청앞시위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