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아이젠하워의 <대량보복전략>은 국지적도발에도 핵무기사용을 불사한다는 극단적비용절감전략이었다. 1957 소련의 <스푸트니크>인공위성발사로 미본토타격가능성이 열리면서 이전략의 한계가 드러났다. 1961 취임한 케네디는 핵전쟁과 재래식전쟁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수준의 무력으로 대응하는 <유연대응전략(Flexible Response Strategy)>을 국가안보의 핵심기치로 정립했다. 이전략의 본질은 선택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 케네디는 취임 첫해 국방예산을 전년대비 약15%증액하며 재래식전력의 현대화를 단행했다. 특히 <모든형태의위협에대한대응>을 위해 육군3개사단을 추가 창설하고 베트남등지에서 부상하던 게릴라전에 대비해 <그린베레>와 같은 특수부대를 육성했다. 이는 단순한 군비확장이 아닌 전쟁의 단계적확대를 미대통령이 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케네디는 1962 쿠바미사일위기에서 이를 실전에 적용해 소련의 미사일기지건설에 대해 즉각적인 핵타격이나 전면적침공 대신 해상봉쇄라는 중간단계를 선택했다. 또 적의 선제공격이후에도 보복타격이 가능한 <2차공격>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니트맨>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폴라리스>잠수함발미사일(SLBM)을 실전배치했다. 1960년대초 미국의 핵탄두보유량은 약1만8000발에서 3만1000발이상으로 급증, 상호확증파괴(MAD)체제를 도모했다. 한편 케네디는 동맹국에 대한 안보공약에서 동맹국들에게 재래식방위분담의 확대를 요구했다. <한국>에도 코리아반도에서 국지전발생시 주<한>미군의 즉각적인 핵개입을 기대하기보다 <한국>군의 재래식억제력을 키워 전쟁의 급격한 확대를 막을수 있도록 요구했다. 이시기의 <베트남인에의한베트남전쟁>과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특수전>과 궤를 같이 한다. 케네디는 군사고문단파견(약1만6000명)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확대했으나 전투병파병을 거부하고 철수계획을 고려했다. 그의 사후 후임 존슨대통령은 <통킹만사건>을 조작해 의회의 선전포고를 유도했고 베트남전쟁을 저강도에서 고강도로,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만들었다. 1968 대선에서 베트남전의 종전을 공약한 닉슨이 당선됐다. 1969 괌에서 발표된 <닉슨독트린>은 미국안보전략의 근간을 <직접개입>에서 <방위분담>으로 급격히 이동시켰다. <아시아의방위는아시아인의힘으로>라는 원칙을 천명하고 핵위협에 대해서는 미국의 핵우산을 제공하되 재래식전쟁이나 게릴라전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책임을 진다는점을 분명히 했다. 자국이익우선의 현실주의로의 회귀로 평가됐다. 케네디가 <자유수호>라는 이념적가치를 내세웠다면 닉슨과 키신저는 <힘의균형>을 중시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달러금태환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됐고 1971.8 닉슨정부는 금태환정지를 선언하는 상황이었다. 중국과의 관계개선(1972)으로 소련을 견제하고 안보비용을 절감하며 베트남에서 <명예로운퇴각>을 추진했다. 키신저의 세력균형론은 특정국가가 압도적우위를 점하지못하도록 국가간 힘의 분포를 조정함으로써 대규모전쟁을 방지한다는 고전적유럽외교술에 뿌리를 두고있다. 키신저는 미국의 쇠퇴를 인정하고 소련·중국과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관리하려했다. 소련과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I)등을 통해 핵전력을 일정수준에서 억제하려는 목적에서 1975 헬싱키프로세스를 추진했다. 키신저는 1970년대초 주<한>미군철수와 남북대화권유등으로 코리아반도의 긴장을 낮추려고도 했지만 1976판문점미루나무사건으로 전쟁을 획책하기도 했다. 이사건은 1975 유엔사해체결의에 이어 블록불가담진영에서 주<한>미군주둔에 대한 반대여론이 형성되던 시기에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