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2020.7 항쟁의기관차〉 진보지방정책의 역사적뿌리, 파리코뮌

〈2020.7 항쟁의기관차〉 진보지방정책의 역사적뿌리, 파리코뮌

1871 프랑스에 세계최초로 등장한 노동계급의 정권, 파리코뮌은 외세침략을 계기로 노동자·민중의 권력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결실이었다. 3.26 선거가 진행돼 코뮌평의회를 구성했다. 민중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코뮌평의회와 산하위원회의 간부들은 언제든지 해임·소환될수 있었다. 이는 민중주권이 실현되는 대의제를 의미한다. 코뮌은 의회형태였지만 시행정·구행정의 역할과 티에흐정부가 전복된 상태에서 정부기능도 맡았다. 재정·군사·사법·안보·식량공급·노동과공업및교환·외무·교육·공공사업·예술등 10개위원회를 설치했다. 재정위원회는 국가의 종교예산을 폐지하고 수도회의 자산을 몰수했다. 군사위원회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광범한 근로민중으로 조직된 국민근위대를 무장력으로 선포했다. 경찰등 낡은 폭력기구도 없앴다. 코뮌은 공장·기업소들에 노동자들이 관리하는 조직을 세우고 직접 운영하도록 했다. 노동보호를 위해 제빵공야간작업·사업장내사적재판관행·징계명목임금공제및삭감·여성노동자차별등을 금지했다. 사설직업소개소를 폐지하고 실업자들에게 직업을 알선했다. 노동시간상한선·최저임금제설정계획·전시이득몰수조치등이 검토됐다. 주택임대료면제·전당포에잡힌물건판매중지등 채무만기법을 폐지했으며 빈곤자구제를 정부의무로 정했다.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교육·종교의 분리원칙이 실행됐으며 초등교육을 무료·의무화하고 직업교육을 강화했다. 코뮌은 남녀각1개교씩 직업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의 평등원칙에 따라 직업훈련과 지적교양함양의 유기적통일을 도모하는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또 공창 제도·도박행위를 금지했다. 예술지원정책으로 <파리예술가연합>을 조직하고 연극부문에서도 연합조직등 예술가의 독자적인 창작활동을 존중하며 지원하는 프랑스특유의 정책기조가 마련됐다. 파리코뮌당시 주권은 여성과 외국인에게도 당연한 권리로 주어졌다. 코뮌은 자유혼인을 인정했으며 이혼등으로 독신인 여성은 물론 그자녀들에게도 연금을 지급했다. 맑스는 파리코뮌의 실패원인에 대해 첫째 티에흐정부에 대한 전격적공격지연, 둘째 코뮌의 재정확보조치실패, 셋째 코뮌구성의 선거를 절대화한점을 지적했다. 코뮌이 압도적으로 우세할때 티에흐군을 완전해산시키고 노농통일전선을 형성하며 프랑스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야했으나 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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