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2020.11 항쟁의기관차〉 수탈과 기형적발전의 고리로

〈2020.11 항쟁의기관차〉 수탈과 기형적발전의 고리로

17~18세기 조선에서는 도시등 인구가 많은 지역이나 교통운수가 편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곡물·채소·공예작물·인삼등 상업적농업이 발생발전했으며 한편으로 관청수공업이 쇠퇴하고 민간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상업이 형성됐다. 17세기에는 화폐의 주조·유통이 전국화되고 일상화되면서 상업자본의 형성을 촉진했다. 장시는 15세기 전라도일대에서 발생발전해 16세기 충청·경상·경기도 일대로 확대됐으며 17세기이후에는 전국적인 장시망이 형성됐다.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1770당시 전국장시는 총1064개소에 달했다. 상업자본이 축적돼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일부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광업과 금속가공업등 일부산업분야에서는 공장제수공업의 수준까지 이르렀다. 사회적생산이 발생발전하면서 이뤄진 상업자본·산업자본의 형성은 일제의 침략·지배에 의해 왜곡됐다. 1876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으로 부산등 2개항구를 개항한 이후 다른제국주의국가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 해운·전신·어업·해관·철도·광산등의 각종이권이 침탈당해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저애되고 정치경제적침략·수탈의 도구로 활용됐다. 우리나라의 첫철도는 1899 일본자본가들이 설립한 경인철도합자회사가 미국인이 가지고있던 철도사업권을 매수해 건설한 인천노량진간의 경인철도다. 철도건설을 위한 토지를 강제수매하고 이완용의 대한운수회사등 조선인회사들과 한일합자회사들이 철도공사에 참여했다. 일제침략의 도구로 시작된 항만·철도등의 운수·물류는 생산분야에서의 정상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고 8.15광복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않았다. 미국의 원조에 의지한 경제에서 정상적인 유통산업의 발달은 이뤄질 수 없었다. 전쟁은 물류산업이 특수를 누리는 기간이었지만 세계해운사업과 그와 연관된 산업일부일뿐 남경제전반에는 오히려 파괴적이었다. 결국 민생파탄에 4.19항쟁이 벌어져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항쟁을 제압하는 박정희군사쿠데타가 발발한다.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은 이승만친미정권을 무너뜨린 민생파탄문제를 해결하지않으면 안됐다. 미일남3각동맹의 정치군사적목적까지 고려해 일본의 차관을 남경제에 도입하는 안을 추진했고 서독과도 1961.12 상업차관을 합의했다. 세계은행의 IBRD(국제부흥개발은행)가 남의 교통·운수에 대한 전반조사를 실시하고 차관제공을 결정한다. 박정희는 1967대선을 위한 유세에서 고속도로건설의 비전을 피력했고 이후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 경인·경수고속도로를 최초로 내고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후 2년5개월만인 1970.7 완공했다. 원래 도로는 혈관처럼 물자·사람의 원활한 흐름으로 사회경제활동전반에 활력을 주게 된다. 박정희정권은 수출위주경제·도시중심산업화추진을 목적으로 했기에 결과적으로 이농을 촉진하고 동서간지역격차만 키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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