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 항쟁의기관차〉 실패가 예고된 〈2개전장동시승리〉전략

<관여와확대전략>을 안보전략으로 채택한 클린턴정부는 1994.5.20 상하원의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평화유지군이나전쟁이외의다른활동에참여하는군대를제외한)미군이국가군사전략에따라주요지역에서거의동시에전쟁을수행할수있는능력을발휘할것으로확신한다>고 선포했다. 소련이 붕괴되자 제국주의진영은 <냉전>이후 2개전장동시승리전략으로 조선·쿠바등사회주의국가들에 대한 고립압살과 반제이슬람무장투쟁세력에 대한 제거전략을 수립했다. 대국인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외적으로는 유화정책을 실시했지만 내적으로는 공산당유일지배체제와해, 유고슬라비아식해체를 염두하고있었다. 2개전장은 각각 코리아반도와 서아(아시아)를 의미하는것이었는데 2곳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생해도 이길수 있다는 제국주의적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당시 1994.10 걸프만위기가 장기화되자 이같은 상황에서 만일 조선이 도발하면 미국은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수 없을것이라는 우려가 미국내에서 제기됐다. 1994.10.11 워싱턴타임스는 <만일중동과코리아반도에서동시에전쟁이터질경우미국으로서는무기부족으로동시에전쟁을승리로이끌수가없음이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앞서 1990.8.2 발발한 걸프전에는 1991.1.17~2.28 미중심다국적군이 개입했다. 걸프전에 미군은 미사일발사대등 전체항공능력90%·폭탄60%를 전장에 동원했으나 미국의 능력이 크게 한계가 있음을 드러냈다. 이같은 우려에 당시 미국방장관 페리는 <지구반대쪽에있는2곳에병력과무기를동시에실어나를수송능력에문제가있>다고 인정했다. 한편으로 1991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1992 IAEA(국제원자력기구)핵사찰협상, 남북고위급회담으로 <팀스피리트>군사연습은 일시중단됐으나 당초협상과 달리 미<한>은 일방적으로 1993 <팀스피리트>를 재개한다. 이에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전국·전군·전민의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나흘뒤 3.12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를 선언했다. 약2달뒤 1993.5.29 조선은 처음으로 일본열도를 향해 <화성7>을 발사하고 다음날인 5.30 사거리2000㎞의 준중거리미사일 <화성8>과 사거리4000㎞의 중거리미사일 <화성9>를 발사시험했다. 화성7·8·9발사후 1993.6.2~11 뉴욕에서 조미양자회담이 진행됐다. 이에 질겁한 클린턴정부는 조선과의 워게임을 수행했고 시뮬레이션결과 개전24시간 230만명민간인사망, 개전1주일 남북·미군병력150만사망, 1994기준 화폐가치 3000억달러피해와 미국측의 참패가 예견됐다. 이같은 파멸적결과에 따라 미국은 대조선군사계획을 철회하고 1994.6.15 카터전미대통령이 미특사로 평양을 방문했다. 1994.10.21 제네바합의를 통해 외교적인 조미관계전환의 결정적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클린턴정부는 1994.10 조미기본합의대로 1997.8 경수로발전소건설착공식은 했으나 의도적으로 공사를 지연시키며 대북고립압살책동을 지속했다. 1998 갱신된 미<한>연합사의 대북전면적대비작전계획인 <5027-98작전계획>을 공개하며 노골적으로 대북적대시정책을 이어갔다. 클린턴임기기간 2개전장동시승리전략은 코리아반도와 서아시아에서 전쟁을 동시에 치를수 있고 승리할수 있다는 전략이었지만 조선의 억제력으로 코리아반도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지않았다. 클린턴임기기간 보스니아내전, 코소보공습등에 미군이 참전했지만 대규모지상전이 아니라 공군중심작전이었다. 클린턴정부에 이어 2001 부시정부가 들어서고 <9.11테러>가 조작된후 미정부의 안보전략은 <테러와의전쟁>으로 규정되며 2001~03 실제 아프간·이라크전에서 2개전장동시승리전략의 한계가 더 명백하게 드러나며 파탄났다. 이후 2012 오바마행정부의 공식전략문서에서 삭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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