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6일 오후 11시30분경 민중민주당 장광선미국위원회(준)위원장이 타계했다. 향년 74세다.
장위원장은 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진보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장위원장은 미주조국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다.
2017년부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민중민주당미국위원회(준)위원장으로 암투병중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아래는 약력과 민중민주당추모사다.
약력
1946.8 전남 장흥 출생
1972.5~74.8 미국농업연수생
1980.5~81.4 미국중부지역 김대중구출위원회, 미국중부지역 5.18진상규명·전두환군부독재타도위원회 조직
1981.5 독립신문 편집장
1981.5~89.8 한국수난자가족돕기 간사
1981.12~84.6 해외한민보 편집장·논설위원
1982.5~89.9 미주민주국민연합 총무
1984 재미한국청년연합 활동
1989.7 국제평화대행진 활동
1990.8~94.5 재미한겨레동포연합 재정부장
1995~필라델피아 녹두회 활동
2017~민중민주당 미국위원회(준) 위원장
장광선위원장의 한생은 조국과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장광선위원장의 한생은 조국의 자주통일과 민중의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다바쳐 희생적으로 투쟁한 정의롭고 숭고한 삶이다. 고인은 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1980년 광주민중학살을 계기로 진보운동을 시작한 후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애국의 열정과 무한한 헌신으로 조국과 민중을 위해 분투했다. 40여년간 조국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비록 이역만리 미국에서 영면하게 됐다는 비보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슬픔이며 조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고인의 삶과 투쟁은 미주통일운동역사에서 길이 빛날 것이다. <남의 독재체재하에서 감히 입밖에 낼수 없었던 민족자주·조국통일에 대해 외치고 <북바로알기사업>을 전개하며 조국분단의 직접적 원흉인 미국의 심장부에서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미주청년운동을 개척하고 우리나라의 자주통일을 위해 특별한 기여를 했다. 1990년대 김영삼<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주운동내 개량주의바람이 불자 그 누구보다 가슴아파하며 원칙적인 투쟁을 전개한 분도 고인이다. 특히 생의 마지막시기 암투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민중민주당미국위원회(준)위원장을 흔쾌히 맡으며 민중민주당의 미국평화원정단과 조직실천활동에 힘과 용기를 준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4.27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의 기치따라 민족자주의 길로 나아가야 할 남측정부가 여전히 외세와 공조하며 미남합동북침전쟁연습을 벌이고 막대한 혈세를 탕진하며 전략자산들을 사들이고있다. 트럼프정부도 말로는 대화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변함없이 선제핵타격·고립압살책동을 자행하고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이 일본군재무장과 군국주의재침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침략정책과 경제보복을 자행하고있다. 남측내에서도 자유한국당이 친미주구세력답게 민족분열과 전쟁위기를 고취시키며 연일 망언·망동하고있다. 조국의 정세가 준엄할수록 우리는 고인을 더욱 안타깝게 추억하게 된다.
<투쟁으로 성취하는 경험은 책상위에서가 아니라 민중이 딛고선 흙에서 이루어진다>는 장광선위원장의 가르침을 우리는 심장 깊이 새기며 고인이 앞서 개척한 그 길을 따라 일체 흔들림 없이 전진할 것이다. 고인의 육체적 생명은 다함이 있어도 정치적 생명은 우리 민족과 민중의 가슴속에 다함없이 살아있을 것이다. 어떤 시련과 난관에도 절대로 굴함없이 애국과 혁명의 한길에 헌신분투한 고인의 뜻을 따라 우리당은 반드시 조국의 자주통일과 민중의 민주주의를 앞당겨 실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