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 항쟁의기관차〉 김영삼문민파시즘에 맞선 완강한 학생운동과 통일운동

남의 반파쇼투쟁은 전두환군사파쇼정권의 정권연장기도를 파탄내고 <호헌철폐>의 구호를 들고 직선제개헌을 이뤄냈지만 직선제를 통해 군사정권을 계승하는 정권이 집권하는것은 막지못했다. 반파쇼민주화투쟁역량은 직선제쟁취와 함께 파쇼세력의 기만에 넘어가 버렸고 파쇼세력은 대선을 통한 정권연장에 성공했다. 항쟁은 반드시 새로운 정권수립을 위한 선거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결코 선거를 통해 민중의 항쟁이 승리한 역사는 없다. 파쇼세력은 항상 자기들에게 유리한 선거판을 만들었다. 이제 더이상 단순한 방법으로 장기집권하는것이 어렵다고 본 파쇼세력은 정권연장을 위해 김종필·김영삼을 끌어들여 3당야합을 하고 다시 선거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어냈다. 선거직전인 1992.9 지난 반공반북이데올로기전을 되풀이하는 공안사건으로 <중부지역당>사건(민족해방애국전선사건)을 획책한다. 노태우는 1987 대선에서도 <KAL기폭파>사건을 조작하고 대선투표직전 그범인이라며 <북공작원>을 입국시키는 쇼를 벌였다. 노태우는 1980년대말1990년대초 국제정세와 맞물려 <북방>외교노선을 취하면서 이전군사파쇼와 다소 다르게 나갔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기보다 이전사회주의국가들이나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사회주의권과 북을 압박했다. 김영삼은 민주화투쟁경력을 내세워 자신을 <문민>으로 치장했다. 1990년대 신자유주의, 미국중심의 일극화이자 일체화인 <세계화>에 나섰다. 그런 김영삼도 1993 취임사에서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수 없다고 말했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나 1994 김일성주석의 서거이후 김영삼은 확실히 등을 돌렸다. 을사5적에 버금가는 우리민족의 반통일5적으로, 그중에서도 앞자리에 꼽힐만큼 파쇼적으로 통일운동을 탄압했다. 1994 박홍서강대총장이 학생운동에 <주사파>5만명이 암약하고있다는 발언으로 민주화운동·통일운동을 가장 선두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이는 학생운동에 흑색선전을 가하며 김영삼정부의 학생운동·통일운동탄압을 촉진했다. 1997 급기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가 나서 학생대중조직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는 흑색선전에, 대학생들이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선출한 대학생대표자들을 마구잡이로 연행·체포·구속하는 파쇼적폭거를 자행했다. 1997.12 김영삼은 자신의 퇴임전 전두환·노태우를 석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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