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 항쟁의기관차〉 김대중·노무현, 개혁10년의 한계와 기만

김대중정권은 1987 6월항쟁의 영향아래 수립된 정권이긴 했지만 거듭된 좌절과 실패속에 수립된 개혁정권이었으며 군사파쇼세력의 잔재 김종필과의 연합으로 힘들게 당선됐다. 김영삼시기에는 민족회의가 범민련중심의 통일운동과 거리를 둔 기회주의경향을 보였다면 김대중정권에서는 민화협을 조직해 기회주의통일운동세력을 흡수하고 정부차원에서 이들을 통제하려했다. 김대중정부는 악명높은 사상전향공작을 준법서약으로 바꿨는데 이는 양심수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교활하고 악랄한 사상전향과 다름이 없었다. 김대중은 중앙정보부를 계승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를 없애지않고 개혁하는선에서 그체제를 유지하는데 노력했다. 1990년대부터 줄곧 유엔인권위에서 보안법(국가보안법)의 개폐를 권고했고 개혁정권들은 이에 부응해 보안법개정을 약속했지만 <대한민국>국회에서는 이를 이행하지못했다. <국가인권위>가 2003~04 작성한 <국가보안법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김대중정권5년간 보안법구속자가 1058명이었다. 개혁정권의 여대야소 국회에서도 보안법은 유지됐다. 반민중적이고 반민주적인 정치·언론지형은 파쇼시대의 유물로 계속 이어졌다. 개혁정권의 기회속에 진보적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는 성과도 있었지만 그이상을 넘지못했다. 개혁정권시기의 이른바 <개혁>은 군사파쇼정권이 때때로 쓴 유화책·기만책과 별반 다르지않았다. IMF(국제통화기금)신자유주의구조조정의 <설거지>를 맡은 김대중은 노동자·민중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실업과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정과 저임금이 강요됐다. 민중들의 분노가 <정권퇴진>투쟁으로 이어질무렵 역사상 첫남북수뇌회담이 성사됐다. 민중의 든든한 대중지반을 갖지못한 개혁정권은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파쇼체제속에서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결국 2004 노무현은 탄핵안통과로 사상초유의 대통령직무정지상태가 된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발언에 새천년민주당이 나서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했다.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며 압승하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을 기각하면서 사태는 종결됐다. 선거결과는 민의를 반영하고있었지만 그힘으로도 그해말 추진된 보안법철폐투쟁에서는 개정의 성과를 내지못했다. 노무현정권에서 2003 대북송금사건으로 김대중정권의 박지원장관이 구속되고 정몽헌현대아산회장이 끝내 투신자살했다. 노무현은 2007.10 정권말에 가서야 겨우 남북수뇌회담을 했고 노무현 자신이 그토록 강조한 검찰개혁에는 손도 대지못했다. 결국 2009 정치검찰의 강박을 이겨내지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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