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6 국민당군대22만명이 후베이성·허난성경계의 중원해방구를 비롯해 여러해방구에 대대적공격을 개시하며 전면적내전이 발발했다. 장개석은 전쟁초 정규군200만명을 포함해 400여만군대가 있었고 미국의 압도적지원을 받고있었기에 3~6개월내 승리할수 있을것이라고 자만했다. 인민해방군(공산당군대)은 1946.7~10 국민당정규군22개여단 총30만명을 섬멸했고 11월부터 1947.2까지 41만명을 궤멸했다. 여러전선에서 국민당군을 타승하던 인민해방군은 종국적승리를 위해 광범위한 농민들이 적극 참군해야한다고 판단하며 선행과제인 토지문제를 해결했다. 1947.10까지 토지개혁운동을 통해 해방구내에서의 봉건착취제도가 혁파되면서 인민해방전쟁의 정치·경제적토대가 마련됐다. 한편 1946.12부터 국민당통치구역에서 미군폭력반대·전쟁반대운동이 일어나며 2전선이 형성됐다. 1947.10.10 중국인민해방군은 <장개석을타도하고전중국을해방하자>는 구호를 제시했다.
1948.6말 인민해방군총병력이 크게 늘고 무기장비도 개선되며 국민당군대와 대규모결전을 치를 역량이 완비됐다. 이시기 해방구는 전체면적의 24.5%를 차지했다. 1948.9 지난전투·랴오선전투등 중요전투들이 전개됐고 11월 화이하이전투가 시작돼 1949.1 55만5000명국민당군대를 전멸시키며 국민당정부근거지인 난징을 직접 위협했다. 비슷한 시기 핑진전투등을 통해 서·남쪽의 도주로를 차단했고 화베이지역을 해방시켰다.
1949.1 장개석은 <은퇴>를 선언했고 4.1부터 평화담판이 진행됐다. 국민당은 창장을 경계로 분단정권을 세우려고 했다. 4.21 모택동·주덕은 진군명령을 내려 4.23 난징을 해방시키고 국민당정부를 대륙에서 몰아냈다.
장개석은 후방기지로 삼은 대만에 들어와 파쇼권력을 수립했다. 50년간이나 일제식민치하에 있었던 대만은 1945 일본항복후 국민당정부가 진의를 파견하자 국민당군대를 해방군으로 여기며 열렬히 환영했다. 국민당군대의 반역본색이 곧바로 드러나 대만민중을 격분시켰고 1947 대만인들은 2.28봉기를 일으켰다. 국민당정부는 대만민중을 살육하고 1949 대만전체에 계엄령을 내리며 봉기를 진압했다. 계엄령은 1987.7에야 해제됐다. 장개석은 대만을 장악하고 정부를 유지할수 있었다.
반중침략책동과 <항미원조보가위국>
1950.1.5 해리트루먼미대통령은 대만섬에 대한 중국주권을 인정하고 대만에서 특권을 얻을 생각이 없으며 중국내부문제에 군사적관여의사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12일 딘애치슨미국무장관은 공식기자회견에서 미국은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태평양방어선을 확정했다고 말했다. 이는 1949.12.30 미백악관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한 1급비밀문서NSC-48에 명시된 결정이었다.
한편 1950.5.1 인민해방군은 중국최남단 하이난섬을 해방했다. 20일간의 격전끝에 하이난남단 싼야를 해방했고 국민당군패잔병은 대만으로 도주했다. 인민해방군주력부대는 대만과 마주보는 푸젠성에 집결했고 소련은 중국에 미그15전투기40대·폭격기및지원기116대를 보유한 소련공군106비행사단을 지원했다. 1950.3부터 상하이인근에 소련공군이 배치됐고 인민해방군은 1950말까지 14개비행사단양성계획을 추진했다. 대만섬상륙작전은 하이난섬을 해방한 인민해방군에게 결코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이때 미원동군사령부는 1950.5.29 미합참본부에 <미합참본부비상계획에중국의대만점령과소련서태평양진출에대한대비책을포함시켜야한다>는 군사상황보고서를 제출한다. 백악관국가안보회의는 1950.4.12 NSC-48을 폐기하고 NSC-68을 채택했는데 여기에는 소련봉쇄와 유럽·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진영의 확장을 저지·차단하기 위해 핵무력증강·군사비증액·군사동맹강화·전쟁능력향상의 내용이 명시됐다. 이에 따라 미육군성은 코리아반도전쟁계획SL-17을 1950.6.19 미합참본부에 제출한다.
한편 인민해방군은 대만해방전쟁을 1950.8 개시할 계획이었다. 당시 발행된 민주신보 1950.7.26보도에 따르면 임표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4야전군주력부대가 푸젠성으로 이동해 진의가 지휘하는 3야전군과 함께 대만공격준비에 들어갔다. 진의는 18개군단·50만병력을 동원해 대만해협도해작전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언급했다.
대만해방전쟁직전인 1950.6.27 트루먼은 코리아반도무력개입을 결정하고 미해군7함대에게 대만섬에 대한 인민해방군의 공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에 주둔중이던 7함대는 군함10여척을 대만해협에 파견해 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원천봉쇄하며 중국의 국토완정계획을 파탄시켰다. 1950.6.28 모택동은 중앙인민정부위원회8차회의에서 <미국이중국내정에간섭하지않겠다는국제협의를깨버렸다>고 맹비난했다. 미국은 1953.2.2에야 대만해협봉쇄를 해제했다.
1950.10 중국공산당은 <항미원조보가위국>기치를 들고 코리아전에 참전했다. 이를 두고 한군사전문가는 <1차중미전쟁>이라고 정의한다. 당시 소련은 중국에 공군을 파병하기로 했다가 철회했는데 그럼에도 중국은 항미원조결정을 내린다. 1950.10.13 정치국회의에서 출병하지않을경우 적들이 압록강변을 압박하며 동북지방이 매우 불리해진다고 진단하며 <참전은이익을극대화하고불참전은손해를극대화한다>고 결정했다. 한편 중국이 코리아전참전을 이미 예고했음에도 미CIA(중앙정보국)는 <제한적개입으로될것>이라며 경솔하게 판단했다.
미원동군총사령관 더글러스맥아더는 중국접경지역에 남코리아군만 투입하겠다는 당초 미당국과의 약속과 달리 미공군을 동원해 중국국경인근을 폭격했다. 맥아더는 미합참의 국경8km내에서 폭격하지말라는 명령을 무시하며 중국동북지역을 침략했다.
1950.10.8~19 중국은 동북병방군13병단을 주축으로 조선출병지원군을 편성해 1차로 12개보병사단·3개포병사단 총26만명을 팽덕회인민지원군사령원과 함께 코리아반도에 출병했다. 같은때 맥아더는 12만병력을 동원해 북진공격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1950.10.25 중국인민지원군39군은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벌어진 첫중미전투에서 미1기병사단8연대를 궤멸시키고 2000여명을 포획하며 승리했다. 여기서 인민지원군은 전투기7대·전차28대·
군용차량170여대·화포119문을 파괴·노획하며 미군을 38도선에서 190km 퇴각시켰다. 인민지원군의 압도적승리후 팽덕회는 <근접전과야간전으로싸우면얼마든지승리할수있다>고 자신했다. 1950.11 맥아더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의공격때문에북의한지역이라도포기한다면자유세계최대의패배가될것>이라고 광분했고 24일 대공세를 개시했으나 수십만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에 패배해 퇴각했다. 이를 두고 미합참의장 오마브래들리는 <미국역사상최악의군사적재앙>이라고 표현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매복전·기습전·포위전·우회전과 같은 다양한 전술로 공격하며 청천강·현리·송골봉·장진호등의 전투에서 무훈을 세웠다. 특히 송골봉전투는 인민지원군82집단군소속100여명이 미군2사단7000명과 1대70의 싸움을 전개했는데 전투원100명중 7명만 남을때까지 혈전을 벌이며 고지를 사수했다.
맥아더는 1950.8.2 대만에서 장개석과 회담을 통해 미국군을 중국본토해안에 상륙시켜 전역을 점령하겠다고 약속했다. 1951.4.7 동해에서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던 미해군2개항모전단을 대만해협에 이동시켰다. 4.11 미해군구축함 존볼함은 중국영해를 침범해 광둥성해안에서 5km 떨어진 앞바다까지 접근했고 미해군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은 광둥성 샨토우항상공에 접근해 위협비행을 실시했다. 이는 인민해방군의 발포를 유도해 중본토를 공격하려는 계획적도발이었다. 맥아더는 1951.3 <중국군이코리아반도접경지역에신규로대규모병력을집결시키고있다>며 중국과의 전면전과 원폭투하를 주장했고 1952.12 미육군성은 중국동북지방·소련연해주 수십개전략거점들을 핵공격으로 파괴할것을 주창했다.
1·2차대만위기와 핵무장
1954.8.11 1차대만위기가 시작됐다. 장개석권력이 1954.9 중국본토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대규모군사기지를 건설해 본토수복에 광분한것이 위기의 직접적원인이다. 대만군병력 5만8000명이 진먼섬에, 1만5000명이 마추열도에 주둔했다. 두지역은 푸젠성에서 약4km가량 떨어진곳에 위치한다.
중국당국은 진먼섬·마추열도에 집중포격을 퍼부었고 11월에는 다첸제도를 집중포격했다. 푸젠성·저장성인근 여러섬에서 인민해방군과 대만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인민해방군이 1955.1.18 이장산섬을 점령하며 대만통일전쟁의 결정적시기가 다가왔다.
중국의 대만해방을 막은것은 미국이다. 1955.1.29 미상·하원은 <대만결의안>을 의결하며 중국·대만전쟁에 대한 무력개입권한을 미대통령에게 줬다. 그권한에는 중본토를 핵공격할수 있는 권한이 포함됐다. 1955.3 미국무장관 존포스터덜레스는 중본토에 대한 핵공격을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미해군참모총장 로버트카니는 드와이트아이젠하워미대통령이 중군사력파괴를 위한 전쟁계획을 검토하고있다고 위협했으며 윈스턴처칠영국총리는 <중국본토에대한미핵공격반대>발언으로 핵위협을 확인했다. 이미 코리아전당시 미국은 중본토에 대한 핵공격을 수차례 위협했기에 중국입장에서는 미국의 핵위협을 무시할수 없었다.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는 1955.5.1 대만군이 점거하고있는 대만해협섬들에 대한 집중포격을 중지했다. 핵무장을 해야만 국토완정을 할수 있다는것을 재확인한 중국은 1955.7.4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정치국에서 핵무기개발사업지휘를 위한 정책담당자3인을 지명했다.
한편 미국은 1954.12.2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1955.3.3 조약을 발효시켰다. 대만은 미국에 지배받는 군사기지로 전락했다.
1958.8.23 2차대만위기가 발생한다. 인민해방군 포병부대는 대만해협 진먼섬·마추열도에 포탄5만발을 퍼부으며 집중포격했다. 상륙부대는 대만해협의 둥딩섬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미국은 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했고 최신형전투기들을 대만공군기지에 배치했으며 반항공미사일부대1개대대를 대만에 배치했고 203·155mm곡사포를 대만군포병부대에 제공했다. 더해 10~15kt급전술핵폭탄을 탑재한 함재기를 실은 항모를 푸젠성샤먼앞바다에 전개했다.
미국의 군사적압박에도 인민해방군은 공습작전을 멈추지않았다. 1958.9.22 인민해방군J5전투기100대가 대만공습에 나섰고 대만군은 전투기32대를 출격했다. 공중전에서 뜻밖에 대만군전투기들이 인민해방군전투기들을 격추하기 시작했다. 대만군은 미국이 투입한 AIM9공대공미사일을 보유하고있었다. 인민해방군은 20여기를 격추당한채 퇴각했다. 미국은 2차위기이후 중국에 대한 핵공격계획을 세우고 괌·대만·일본·오키나와·필리핀·남코리아에 각종전술핵탄을 다량배치하며 핵공격준비를 완료했다.
중국은 영토완정을 위해 1964.10.16 핵시험성공후 1966.7.1 전략미사일부대2포병부대를 창설했고 1980.5.18 미본토핵타격이 가능한 둥펑5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에 성공하며 핵무력을 완성했다. 중국의 핵무력강화에 미국이 매우 민감했다는것은 1960년대초 미정부가 중국의 핵시설들에 대한 <예방타격>공습계획을 검토했으나 린든존슨미대통령이 중국의 대만공격이 우려돼 공습계획 대신 특수부대를 중국에 침투시키는 급변사태계획들을 준비하라고 미CIA에 지시를 내린것으로 드러난다.
3차대만위기와 중국의 군사적준비
1979.1.1 중·미수교후 미국은 미·대만상호방위조약을 종결하겠다고 대만에 통고했고 4.28 대만방위사령부를 해체하며 대만주둔미군병력을 전원 철수했다. 이로써 미국의 대만문제불법개입이 종식될것으로 기대됐으나 실상은 그렇지않았다. 철수하기전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대체하는 대만관계법을 채택하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경우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무력개입을 할수 있도록 규정했다. 주대만미군은 철거됐으나 미군은 대만군과 고위급군사회담을 계속 진행했고 대만군고위지휘관들은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미국산무기들은 대만군에 계속 투입됐다. 뿐만아니라 일본주둔의 미해군7함대는 공공연히 대만해협에 출동하며 대만해방전쟁을 가로막았다.
한편 대만내 대만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전면 등장했다. 1988 리덩후이가 대만총통이 됐다. 스스로 일본을 <조국>이라 말한 리덩후이는 <2차세계대전시기대만인들은실제로일본인의신분으로조국을위해분투했다>·<일본은대만현대화의계몽자>라고 공언했고 야스쿠니신사참배를 하며 뿌리깊은 친일성을 드러내왔다. 일본유학파출신 리덩후이는 1968 미국코넬대에서 농업경제학박사학위를 받으며 친일파이자 친미파임을 드러냈다.
리덩후이는 1999 <독일의소리>인터뷰에서 <양국론>을 주장하며 중국의 <하나의중국>을 부정했고 책<대만의주장>을 통해 중국을 대만·시장·신장·몽골·화남·화북·화중7개지역으로 분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리덩후이의 중국분할주장은 제국주의세력의 세계지배전략인 <거대한체스판>전략과 같다.
3차대만위기의 직접적계기는 리덩후이의 미국방문이다. 1989천안문사건·난사군도영유권문제·중국이란원자로판매·핵시험재개등으로 중·미관계가 악화된 시기였다. 1994.9 미정부가 대만과의 통상관계를 강화하고 대만각료급관리가 방미하고있는 조건에서 1995.5.22 빌클린턴미대통령은 리덩후이가 개인자격으로 방미할수 있도록 허용했고 리덩후이는 6.7부터 6일간 코넬대졸업식에 참석해 연설까지 한다.
중외교부는 미국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대사를 불러 <이총통의방미를허용할경우심각한결과가초래될것>·<그책임은전적으로미국이져야한다>고 경고했다. 인민해방군공군사령관을 소환하고 중국당국의 워싱턴방문계획을 취소하며 정치·외교적대응을 단행했다.
중국은 1996.2.4 대만과 마주한 해안지대에 15만전투병력·대규모군사장비를 공격형으로 전진배치했고 3.8 인민해방군로케트군이 둥펑15탄도미사일3발을 대만앞바다에 발사하며 3차대만위기가 시작된다. 대만은 혼란에 빠졌다. 3.12 중국은 연속적으로 대만과 마주한 둥산섬과 난아오섬에서 실탄사용기습작전을 연습했고 3.18~25 푸젠성 핑탄해협과 하이난섬에서 육해공군무력동원 실전급상륙강습훈련을 진행했다. 더해 전투기300대·구축함5척을 대만해협에 출동시켜 분리독립책동을 제압하려고 했다. 이에 미해군은 2개의 항공모함과 강습상륙함을 주축으로 편성한 원정타격단을 대만해협에 급파했다. 인민해방군은 대만쪽으로 사거리600km둥펑15탄도미사일3발을 발사하며 상륙전을 연습했지만 미해군원정타격단을 격침시킬 공격력이 없었기에 결국 대만상륙을 포기했다. 이당시 중국은 대만해방에 필요한 2종의 전략자산, 항공모함·상륙강습함을 갖고있지못했다. 중국이 이후 절치부심하며 항모제작을 비롯한 무력개발에 총집중한 이유다.
대만전 부추기는 미제침략세력
2000들어 중국해군력이 강화되고 서태평양진출이 본격화되자 미국의 대만군사지원이 더 노골적으로 추진되며 대만을 매개로 한 반중침략책동이 심화됐다. 이를테면 미국무부·국방부현직고위관리들, 대만국방부현직고위관리들, 양측군사전문가·군수업계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대만의 군사력증강문제를 모의하는 미국·대만국방공업회의가 2002부터 매년 개최되고있다.
버락오바마미정부는 반중책동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시아중시전략·아시아태평양재균형정책을 수립했다. 핵심내용은 태평양패권을 쥐고있는 미국이 중국주변국과 군사·외교·경제관계를 강화해 중국을 약화·분열시켜 중국의 서태평양진출을 가로막는것이다. 이를 위해 설정한것이 <태평양방어선>이다. 미국은 중국주변국을 끌어들여 일본규슈·오키나와·필리핀·팔라완·싱가포르를 잇는 4500km의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한다. 한편 중국입장에서 다른 지역은 국경으로 가로막혀있고 오직 서태평양으로만 진출할수 있는 조건에서, 동중국해·필리핀해·남중국해를 차지해야하는데 그접점에 대만이 있다. 중국에게 대만은 영토완정의 대상이자 해양진출을 위한 핵심이익이다.
2014 본격화된 대만내에서의 <해바라기운동>과 2016 차이잉원대만총통당선은 친미반중분리주의세력이 득세하고있다는것을 보여준다. <해바라기운동>은 대학생·청년300여명이 중국·대만의 <서비스무역협정>비준안통과반대를 촉구하며 입법원을 점거한 사건이다. <해바라기운동>후 청년세력은 <시대역량>·<사회민주당>등 새정당을 조직했다. <해바라기운동>과 함께 교과과정내용변경에 항의하는 <반고중과강미조운동>도 벌어졌는데 참여자중1명은 <종군위안부는중국세력과국민당의날조교육>·<자원한사람도존재하니모든종군위안부가강제동원된것은아니다>라고 말하며 <해바라기운동>의 반역적성격을 드러냈다.
홍콩의 <우산혁명>과 비슷한때 발생한 대만판<색깔혁명>인 <해바라기운동>의 결과는 친미반중분리주의자 차이잉원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리덩후이와 같은 코넬대출신의 차이잉원은 리덩후이집권시기 정계에 입문해 무소속으로 활동하다 2004 민진당에 가입하며 정치적입지를 다졌다.
한편 2023.8 일자민당부총재 아소다로는 대만에 방문해 <싸울각오,유사시대만의방위를위해방위력을사용한다는분명한의사를상대에게알리는것이(전쟁)억지력이된다>고 언급하며 대만전위기를 증폭시키는 한편 2024.1 대만총통선거를 겨냥해 <대만인들의삶과행복,번영을유지하기위해현상황을지켜낼각오를가진분이차이잉원총통의뒤를이어총통이돼우리와같은가치관으로함께싸워주실것을진심으로기대한다>고 대만내정에 간섭하며 반중침략세력의 의중을 드러냈다. 미국이 민진당을 앞세워 반중침략책동을 계속 강화하는것은 차기민진당총통후보인 라이칭더부총통이 거듭 미국에 방문하는것으로 확인된다.
바이든미<정부>가 대만에 군사력을 투입하고 대중국경제봉쇄망을 강화하며 중국을 전쟁에로 추동하고있다. 2023.2 미월스트리트저널보도에 따르면 대만군을 훈련시키고있는 미군병력이 30여명에서 향후 몇달내 100~200명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한편 2023.7.28 미백악관은 3억4500만달러규모의 대만군사지원계획을 발표하며 중국을 극도로 자극했다. <지원패키지>에는 감시정찰장비·소형무기탄약·대만군교육훈련지원등이 포함됐다. 로이터통신은 정찰·폭격용무인기MQ9리퍼4대가 지원목록에 포함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중국측은 <이런행동은대만을화약통이자탄약고로만들고대만해협에서전쟁위협을격화시키는것>이라고 맹비난했다. 2021.1 바이든<정부>출범이래 대만에 무기판매건수는 무려 10번이나 된다. 한편 미정부는 <반도체동맹>칩4를 조작하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결성하며 대중국경제봉쇄망을 강화하고있다. 스리랑카·잠비아등 중국의 일대일로정책에 포함된 나라들이 미국의 자본수출정책인 <킹달러>로 인해 파산하고있음에도 마치 일대일로로 인해 파산한것처럼 흑색선전하면서 중국을 압박하고있다.
대만해방전쟁은 임박했다
2022.8 미하원의장 낸시펠로시의 대만방문에 맞춰 96시간대만해방전쟁예행연습을 단행한 중국은 2023.4.9 <날카로운검>연합훈련을 실시했다. 첫날 각종작전기70대·전투함11척을 참가시킨 중국은 훈련과 동시에 <대만주위에서전투대비순찰을동시에조직해대만을전방위로포위하는억지태세를형성했다>고 언급했다.
인민해방군해군은 4.5 대만동부해안에서 약370km 떨어진 해상에 산둥호주축의 항모전투단을 미리 파견했다. 괌에서 이륙해 중국으로 전개하는 미공군전략폭격기편대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연습이다. 이렇게 해야만 인민해방군상륙부대가 대만상륙을 할수 있다.
인민해방군로케트군미사일여단들은 선제타격·정밀타격전연습을 전개했다. 실전에서 미사일여단은 둥펑11탄도미사일1500발을 집중발사해 대만군공군기지를 타격할것으로 예상된다. 고폭탄·산포탄·전술핵탄두를 장착할수 있는 둥펑11을 푸젠성·장시성에서 발사할경우 7~10분뒤 대만공군기지를 모두 날려버릴수 있다. 2020.6.22 보도에 따르면 로케트군은 2740발탄도미사일·순항미사일을 실전배치했다.
인민해방군공군 젠10·16·20전투기로 편성된 전투기편대들과 훙6폭격기편대들은 쿵징500조기경보기·투폴레브154전자정찰기·윈9전자전기·윈8전자정보수집기·윈여우20공중급유기의 지원을 받으며 중거리공중전·장거리공중전연습을 실시했다. 전투기편대들은 대만군전투기를 겨냥한 섬멸전과 일오키나와미공군기지에서 출격하는 미전투기공격차단공중전을 연습했다. 인민해방군은 연합타격전과 상륙전도 연습했다. 인민해방군육군장거리포병부대는 무인기를 동원한 타격전연습으로 오키나와에서 출항하는 미해병대강습상륙함·호위함격침훈련을 실시했다. 인민해방군해군연합함대는 대만해협서남쪽바다에서 함대지미사일·함대함미사일을 집중발사해 대만군과 미일연합함대를 제거하기 위한 타격전을 연습했다.
인민해방군 공군은 공중타격전연습을, 로케트군은 대만군집중공격과 일오키나와 주일미군기지공격을 위한 2타격전연습을, 해군은 대만동쪽바다로 고속기동해 해안상륙연습을 실시했다. 특히 해안상륙연습에서는 험준한 산맥과 연결된 대만서부해안이 아닌 대만동부해안으로 우회기동하기 위해 지8·9헬기, 밀미8헬기를 앞세워 상륙하는것을 훈련했다. 실전에선 해상육전대가 상륙부대를 싣고 대만동부해안으로 돌격할것이다. 인민해방군은 대만전역에서 대만군잔여병력·반항세력무장을 해제하고 대만을 진정시키기 위한 안정화작전연습을 진행하며 72시간단기전연습을 마무리했다.
이번 훈련에 무인폭격기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실전에선 무인폭격기를 동원해 대만군전략거점들을 폭격할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무인폭격기는 폭탄500kg을 탑재하고 초음속으로 전개한다. 2022.7 홍콩발보도에 따르면 푸젠성공군기지들에 무인폭격기수천대가 배치돼있는데 대만까지 도달하는데 약7분이면 충분하다. 그외 그동안 AI(인공지능)위성으로 미해군항모타격단의 이동좌표를 실시간 추적해 둥펑21항모타격미사일로 항모타격단을 격침시키는 항모타격전법을 연습했고 실전에서 미해군잠수함·일해상자위대잠수함탐색·제거, 대만군정보통신체계마비를 위해 대잠수함전·전자교란전연습을 실시한 사실은 실제전쟁양상을 예상하게 한다.
2023.3 스웨덴민간연구소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의 <2022년도국제무기이전동향>보고서에 따르면 2013~17, 2018~22 양기간의 비교결과 중국의 무기수입은 4.1% 증가한 반면 수출은 23%나 급감했다. 뿐만아니라 석유·천연가스·석탄·식량·의약품같은 전시물자, 부상자치료에 필요한 인공혈장도 비축하고있다. 여러객관적사실은 대만전은 확정적이며 시기선택만 남았다는것을 보여준다.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시기를 결정하지못한 주된 이유로 차이잉원·대만군수뇌부의 전원생포에 실패할 가능성이 추정된다. 대만전을 72시간단기전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방도는 대만정부·군지휘부의 항복을 받아내는것이다. 중국내몽골자치주 주르허군사기지에 위치한 대만총통부청사모의건물에서의 군사훈련에서 인민해방군은 차이잉원·대만군수뇌부생포작전에 실패했다.
분석에 따르면 대만 타이베이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지하전쟁지휘소인 헝산지휘소에 차이잉원·대만군수뇌부가 피신할경우 전쟁은 장기전으로 전변되고 미군개입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1960 착공돼 1982 완공된 헝산지휘소는 미사일·핵·생화학·전자기파공격에 견딜수 있는 견고한 방호시설인것으로 보인다. 전시 인민해방군항공육전대가 헝산지휘소를 습격·점령하는것이 불가능해 현실적으로 로케트군이 핵탄두장착미사일을 발사해 헝산지휘소출입문을 파괴하는 작전을 펼칠것으로 예상된다. 높은 타격정밀도, 긴 사거리를 자랑하고 기습적야간선제핵타격이 가능한 훙6N전략핵폭격기에 둥펑21D미사일을 탑재해 출격할것이다. 둥펑21D는 타격정밀도가 높아 원형공산오차가 10m이고 사거리는 1450km며 200kt·300kt·500kt급핵탄두를 선택적으로 장착할수 있다. 둥펑21D를 약300km 떨어진 거리에서 발사하면 1분40초만에 대상물을 타격할수 있다.
인민해방군은 훙6전략핵폭격기를 대만방공식별구역(ADIZ)안에 2021 60대, 2022 101대나 출격시켰다. 2022.12.12 24시간동안 18대를 대만ADIZ안으로 출동시켰으며 2023에도 1.1을 시작으로 4·6·7월 집중적으로 훙6을 전개했다.
마잉주전대만총통은 2023.6.24 한대담에서 <지금대만은전쟁에서한걸음밖에떨어져있지않다>·<머리카락한가닥을잡아당기면몸전체가움직일만큼정세가급박하다>고 진단했다. 2023.7.6 시진핑중국국가주석은 장쑤성의 인민해방군동부전구사령부를 찾아 <중국의안보형세에불안정성과불확실성이커졌다>며 실전화된 군사훈련실시를 주문했다. 중·미간 <강대강>의 지난한 역사의 마침표를 찍을 대만전은 머지않았다.
사회주의소련과 제국주의세력의 격돌
1917.10 사회주의혁명에 승리한 러시아는 여러우여곡절끝에 1918.3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협정을 체결하며 1차세계대전에서 벗어났고 영국·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협상국에서도 탈피한다. 제국주의세력은 러시아사회주의를 붕괴시키기 위해 무력침공을 감행한다. 1917.12 영국·프랑스는 미국의 동의하에 프랑스는 우크라이나를, 영국은 그밖의 남동지역을 맡는다는 내용의 비밀협정을 체결하며 소련침략을 시작했다. 미국·영국·프랑스는 1918봄 무르만스크에 군대를 상륙시켰고 일본에 뒤이어 미국·영국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침략했다. 뿐만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병사들을 선동해 반소비에트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종했다. 1918.5 일어난 반란에 제정러시아세력인 백군이 대거 합류한다.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반란은 소비에트내에서 반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으며 이로인해 내전이 시작됐다. 백군과 연합한 제국주의침략군은 소련각지를 점령해 소비에트기관을 제거하고 반혁명정부를 수립했다. 제국주의군대는 슬로바키아군단·백군이 사방에서 소련을 점령할수 있도록 공세를 퍼부었다. 비록 적군(붉은군대)이 창설되긴 했지만 그병력이 소수인데다 전투경험이 없었고 중농의 동요로 소비에트권력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기에 침략이 가능했다.
제국주의세력은 비공업변경지대와 반혁명파가 주도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침략하고있었다. 소련내정에 간섭하지않겠다는 조약을 체결한 독일까지 전쟁에 뛰어들어 핀란드를 점령하고 그루지야의 멘셰비키와 협정을 맺으며 이지역을 점령했다. 1918여름 미·영·프3국은 블라지미르레닌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같은 무력간섭과 내전상태는 1920말까지 계속됐다. 내전은 소련공산당이 노동자·농민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뛰어난 당활동가들을 군대에 파견하고 각지역에 군대를 조직해 붉은군대를 강화하면서 점차 극복됐다. 군내부에는 군코미사르제도(공산당·소비에트권력전권위원)를 만들어 규율을 강화했다.
1918여름 동부전선 볼가지방에서 전황을 결정할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붉은군대는 반동세력의 모스크바진출을 봉쇄했다. 붉은군대는 공세로 전환해 동부전선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단과 백군의 연합병력을 격멸했고 이후 반동파점령지를 해방했다. 1919들어 서부·남부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하며 각지를 해방시켰다. 반면 제국주의자들은 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러시아에 군대를 투입한다고 병사들을 기만했다. 병사들은 사회주의소련의 현실을 목도하며 동요했고 본국귀환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1919봄 제국주의군대는 소비에트의 많은 지역을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의 대소련침략은 2차세계대전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38.9 영국·프랑스는 나치독일의 침략예봉을 소련으로 돌리기 위해 뮌헨협정을 체결한다. 1939.8.23 소독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소련이 시간을 벌고있는동안, 독일은 서유럽을 우선 침략한뒤 1941.6 소련을 기습공격한다. 미국·영국은 1943까지 2전선(서부전선)을 형성하겠다고 소련과 합의했지만 소련붕괴를 목적으로 2전선형성에 일부러 태만한다. 나치연합군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소련은 1942여름 시작된 스탈린그라드전투에 승리하며 주동을 쥐었고 1943.7 쿠르스크전투에서 승리하며 독일의 공세를 완전히 꺾었다. 미·영은 1944.6 전후패권을 고려하며 2전선을 형성했고 영국은 소련의 공세를 파탄내기 위해 독일패잔병에게 무기를 대줄 음모를 꾸몄다.
소련은 동유럽을 해방하며 독일로 진격해 1945.5.2 독일베를린국회의사당에 소련국기를 내걸며 승리를 선언했다. 동아시아방면 일제침략군대의 격멸만 남은 상황에서 미국은 전후세계패권장악을 목적으로 이미 패색이 짙은 일본에 8.6·9 2발의 원자폭탄을 터트린다.
대러시아침략책동과 나토결성
2차세계대전종전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진영간의 냉전이 시작됐다. 제국주의세력의 반소감정은 1946.3 처칠이 한 연설을 통해 확인된다. 그연단에는 트루먼도 있었다. 처칠은 <발트해연안슈체친(폴란드)에서아드리아해연안트리에스테(유고슬라비아)까지유럽을가로지르는철의장막이드리워져있다>·<공산당또는제5열들이점차기독교문명에심각한도전과위협이되고있다>·<소련이원하는것은전쟁의과실이며힘과정책의무한한확대>라고 발언했다. 미국은 소련이 이란주둔소련군을 철군한다고 공언했음에도 유엔에서 철군하지않을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며 소련을 자극했다. 반면 소련은 내부적으로 2차세계대전이후 복구건설을 진행하고 외부적으로 원자탄을 보유하고있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서 민족자결주의원칙을 견지하기 위해 평화적방식을 고수했다. 이같은 소련의 입장은 그리스내전과 코리아전에 소련군을 직접 개입하지않은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소련을 군사적으로 심각하게 위협했다. 일례로 미국의 핵개발프로젝트 맨해튼계획의 총괄자 레슬리그로브스는 1945 <핵무기를만들기시작하면우리를위협할정도로진전되기전에그들의제조능력을파괴해야한다>는 핵선제공격을 주창했다.
1947 마샬계획이 시작됐다. 마샬계획의 입안자인 미국장관 조지마샬은 <소련행동의원천>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는 계획을 명시했다. 소련의 힘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것이 봉쇄의 목표였다. 전후대외원조계획으로 알려진 마샬계획은 사회주의·민중정권전복을 위한 위장막으로 쓰였다. 관리자금중 절반은 미CIA를 통해 비밀첩보활동에 쓰였다. 이를 두고 CIA설계자 조지캐넌은 <조직적인정치전이본격개시된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자금은 사회주의정권내 친미주구들이 <지하조직>을 만들고 <게릴라운동>을 감행하며 <시설파괴와요인암살>을 하는데 투입됐는데 특히 <나이팅게일>우크라이나무장조직지원자금으로 사용됐다. <나이팅게일>은 우크라이나나치우두머리 스테판반데라를 추종하는 극단적나치세력 OUN(우크라이나민족주의자기구)-B를 근간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그핵심인물인 미콜라레베드는 1942 OUN-B의 테러전담별동대 UPA(우크라이나봉기군)를 조직했다. 1944 레베드는 OUN-B산하정치조직 UHVR(최고우크라이나해방위원회)을 결성하는데 깊이 관여했다. 2차세계대전종전후 OUN·UPA는 서부우크라이나지역에서 1950년대초반까지 반소비에트반군을 형성해 계속 활동했는데 그배후는 미CIA전신인 OSS(전략사무국)였다. OSS는 OUN조직원들이 확고한 반공주의자임을 확신했고 OUN은 1949 베를린위기당시 미국의 첩자로 움직였다. 미육군방첩대는 이우크라이나나치세력을 독일 뮌헨으로 빼돌렸고 1949 미국으로 보냈다. 이들은 미국의 주구로서 우크라이나사회주의붕괴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우크라이나내 신나치반데라추종자를 양산하고 이후 민주정권을 붕괴시키며 친미신나치정권을 조작한다.
1947.12 미국·영국은 <안보동맹>을 구상했고 이듬해초 미국중심의 집단방위를 내세운 브뤼셀조약이 체결됐다. 1948.3~4 펜타곤회담을 통해 미중심의 나토설립이 구체화된다. 1948.7 북대서양7개국과 유럽5개국이 참여한 <안보에관한워싱턴임시회담>이 개최된뒤 같은해 12월 북대서양조약을 위한 최종초안이 마련되면서 1949.4.4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설립됐다.
나토는 계속 동진하며 소련을 위협했다. 1950.9 등장한 <전진방위전략>의 핵심내용은 가능한 더 동쪽으로 나토회원국가들을 <방위>해야한다는것이다. 1952 그리스·터키, 1955 서독이 나토에 가입했다. 특히 <전진방위>를 내세우며 2차세계대전전범국인 서독을 무장화했다. 서독이 나토에 가입하자 이에 대응해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조직했다. 소련은 나토의 확장이 소련을 위협하는것만이 아니라 핵전쟁위기를 심화한다고 확신했다.
소련해체전후에도 나토의 동진과 반러시아책동은 계속됐다. 1989 우익정권이 들어선 폴란드가 나토가입입장을 드러냈고 1991.11 나토회원국과 25개중·동유럽국가간 공식적협의과정을 통해 나토동진을 위한 사전작업이 시작됐다. 소련해체후 비셰그라드그룹을 형성하고있던 폴란드·헝가리·체코·루마니아·불가리아가 1999.4 워싱턴DC나토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정식회원국이 되면서 1990 미·러간 확약했던 <나토동진금지>가 완전히 깨졌다. 이후 2004.3 불가리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 2009 알바니아·크로아티아가 나토에 가입했다. 한편 2000 블라지미르푸틴이 러시아대통령에 당선된후 나토가입의사를 밝혔으나 미국은 거절했다. 나토의 대러시아침략책동은 현재 우크라이나전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나고있다.
유로마이단쿠데타와 돈바스학살
2004 우크라이나에서 <오렌지혁명>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준동하던우크라이나나치세력은 1991소련해체후 우크라이나로 들어왔다. 이들은 2차세계대전당시 우크라이나파시즘의 본거지였던 갈리시아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우크라이나민족주의>미명하에 <오렌지혁명>을 일으켰다. 우익대선후보였던 빅토르유셴코를 지지한 시위자들은 2004.11.22 친러세력인 빅토르야누코비치가 대선에서 승리하자 <선거불복종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야누코비치의 당선을 선언했으나 서방세력의 노골적인 내정간섭으로 재선거가 이뤄지고 결국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유셴코는 우크라이나국립은행총재를 역임한 금융자본세력중 하나며 그부인인 카테리나는 우크라이나계미국인으로 레이건·부시미정부에서 반미국가의 체제전복추진을 주업무로 하는 미국무부산하 인도주의·인권담당관출신으로 우크라이나독립후 미국내에서 미·우크라이나친선재단을 설립했다. 친러세력이 카테리나를 미국의 고위스파이로 공개비판하는 이유다.
2004 <오렌지혁명>은 정치적쿠데타였다면,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는 사실상 우크라이나내에서 벌어진 군사쿠데타와 같다. 2010 수립된 우크라이나친러정권이 반데라에 대한 영웅칭호를 박탈하고 친러시아정책을 펼치자 친미신나치세력과 대립했다. 마이단시위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미CIA의 사실상 산하조직인 미민주주의기금(NED)으로부터 재정·물자지원과 내부전복을 위한 훈련을 받고있었다. 미국과 금융자본세력을 자금줄로 하며 탄생한 우크라이나신생뉴스매체들은 2013말 마이단시위에 맞춰 반정부흑색선전을 강화했다. 푸틴의 연설에 따르면 마이단쿠데타세력에게 미대사관은 하루100만달러씩 투입했고 수천만달러가 이세력우두머리들의 계좌에 직접 이체됐다.
2014.5 한우크라이나전문가는 우크라이나사태에 대해 내전으로 규정했다. 우크라이나남동부만의 내전이 아닌 심각한 국제적위기가 우크라이나전역으로 확산되고있으며 인종청소·학살과 같은 전쟁범죄의 재현가능성까지 거론됐다. 배후조종자는 미제침략세력이라면 그앞장에는 반데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전우크라이나자유연합>극우당과 우크라이나판나치식돌격대 <프라비섹토르>가 있었다. 전우크라이나자유연합의 그전명칭은 독일나치당의 정식명칭인 <독일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을 본딴 <우크라이나사회민족주의자당>이었으며 나치즘의 상징인 갈고리십자가를 당의 공식상징으로 사용했고 당부설기관으로 <요제프괴벨스정치연구소>가 있었다. 프라비섹토르는 2014.2.20 반러친우크라이나시위자를 사태악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사살할정도로 과격하고 폭력적이며 야만적이다.
유로마이단쿠데타이후 등장한 친미신나치정권에 의해 돈바스등여러지역의 민중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하거나 러시아계라는 이유로 대량학살됐다. 돈바스전쟁에서 1만4000여명의 민중들이 살육됐고 오데사지역 노조건물이 불타 활동가들이 대거 사망한것은 대표적사례다. 돈바스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2014.9.5 우크라이나키예프정권·러시아·도네츠크인민공화국·루간스크인민공화국이 민스크협정을 체결했음에도 우크라이나는 <테러리스트들에대한진압작전>이라며 돈바스에 대한 침공을 강행했다. 2021.3 우크라이나는 돈바스지역군사작전을 실시했고 2022에도 돈바스민간인거주지역을 포격했으며 우크라이나특수군사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2월중순에도 포격을 가했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의 목적으로 러시아계주민보호·신나치청산·나토동진금지를 내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불가피한 우크라이나전
푸틴은 2022.2.21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특수군사작전을 개시한 목적과 이유에 대해 해설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우리의역사·문화·정신적공간의뗄레야뗄수없는한부분>이라고 언급하며 역사적으로 한뿌리라는것을 밝혔다. 이어 소련해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경제적이점을 제공했음에도 우크라이나당국이 배신한 사실을 폭로하고 <우크라이나사회가극단적민족주의의확산에부딪히고그것이급격하게폭력적인러시아공포증과신나치즘의형태를띠게된것은놀라운일이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문명화선택>에 대해 <올리가르히들이우크라이나인들에게훔쳐서서양은행계좌에숨겨둔수십억달러를지키는것>라고 해설하며 금융자본세력과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간의 결탁을 공개했다. 푸틴은 마이단쿠데타이후 우크라이나내부는 분열됐고 <친서방문명화>선택으로 인해 경제붕괴·민중약탈·외부통제가 심화됐다고 언급했다. 정치적으로 파쇼화되고 정치세력은 부패화됐으며 국가권력이 박탈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어전면금지·표현의자유억압·우크라이나정교회제재등을 파쇼화의 대표적사례로 들었다. 또 러시아에 귀속된 크림반도내의 극단주의조직활성화·주요기반시설테러·러시아국민납치위한사보타주그룹투입등을 폭로했다.
2021.2 우크라이나정부가 채택한 새군사전략에는 러시아와 대치, 우크라이나와의 갈등에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는것, 크림반도·돈바스지역에 지하테러집단조직등이 명시돼있고 전쟁의 윤곽도 기술돼있다고 푸틴은 언급했다. 새군사전략에서 <러시아연방과의지정학적대결에서세계공동체의군사적지원을받아>라고 쓰인 내용은 현재 우크라이나전의 양상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것을 확인시켜준다.
푸틴은 미국이 2014부터 우크라이나에 무기·장비공급, 전문가훈련으로 수십억달러를 사용했고 서방무기가 우크라이나에 끊임없이 투입됐으며 외국의 고문관이 우크라이나군·정보기관활동을 지휘하고있고 나토군이 훈련을 핑계로 우크라이나영토에 상시주둔하고있으며 미·나토가 우크라이나땅에서 정기적합동훈련을 전개해 2021에만 2만3000명이상군인·수천대장비가 투입된 사실을 언급하며, 제국주의세력이 러시아와 확약한 <나토동진금지>를 노골적으로 위반하고있다는것을 확인했다.
푸틴은 3일후인 2.24연설에서, 소련해체이후 미국과 제국주의세력이 베오그라드유혈군사작전을 시작으로 중동·아프리카에서 범한 각종침략행위를 나열하며 <서방이자신의질서를수립하려고하는사실상모든곳에서피와아물지않는상처,국제테러와극단주의라는궤양이그결과로남는다>고 언급했고 미국이야말로 <거짓말제국>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2021.12 유럽안보보장원칙·나토확장금지원칙에 대해 미국·제국주의세력과 합의를 시도했다고 강조했다. 돈바스지역에서의 참상에 대해 <대학살>로 정리하며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와 비나치화를 달성하고 러시아국민을 포함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유혈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법적책임을 물을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련의 내용은 우크라이나전이 예방전쟁이자 해방전쟁이며 본질에서 반제국주의전쟁이라는것을 보여준다. 러시아와 미국·나토간 <강대강>충돌은 불가피한것이다.
우크라이나전과 3차세계대전
우크라이나전에서 주목되는 전투는 마리우폴전투와 아르툐몹스크(바흐무트)전투다. 마리우폴은 돈바스지역과 크림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 이곳을 차지하면 남부일대를 모두 장악한것과 같고 흑해연안을 점령할경우 우크라이나바다를 봉쇄할수 있는 전략적요충지다. 마리우폴은 아조프해를 끼고있는데, 가장 악랄한 신나치부대인 아조프대대의 본부가 있는 거점도시가 바로 마리우폴이다. 2022.3 러시아군은 마리우폴의 90%를 장악한채 철강공업단지 아조프스탈만 남겨두고있었다. 2차세계대전이후 군사요새화된 아조프스탈은 지하통로로 연결돼있는데 그길이가 총24km에 달하며 웬만한 폭격으로도 견딜수 있을정도로 견고한것으로 알려졌다. 아조프제철소사장의 말에 따르면 방공호가 36곳이며 지하6층에 대피소·벙커·창고등을 갖추고있다. 내부에는 약3000명의 아조프대원과 우크라이나해군, 나토군소속미군3성장군을 포함한 200여명의 외국군사고문단이 있는것으로 추정됐다. 아조프대대를 소탕하고 나토군장성·외국군사고문단을 생포하기 위한 격전이 벌어지는것은 필연이었다. 러시아방송에 따르면 4.8 우크라이나화물선 아파치호가 나토군장성·군사고문단을 구출하기 위해 마리우폴항에 몰래 들어오다 러시아군에 발각돼 배는 총격되고 우크라이나요원들은 모두 생포됐으며 이후 우크라이나헬기는 아조프스탈에 들어오다가 격추됐다. 4월 알자지라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36해병여단은 공식SNS를 통해 탄약이 다 떨어졌으나 젤렌스키지휘부는 아무 도움도 주지않는다며 고별문을 발표했다. 러시아군은 240mm자주박격포를 집결하고 다연장로케트를 배치하며 아조프스탈소탕작전을 실시했다. 4월중순 우크라이나36해병여단1000여명이 집단투항했고 러시아군은 아조프스탈지하통로로 진입했으며 Tu22장거리폭격기를 동원해 미사일공격을 실시했다. 러시아측은 마리우폴에서만 우크라이나군의 병력손실이 4000명이상이라고 밝혔다.
전투가 장기화된 가장 큰 이유는 아조프대대가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내세우는 야만적방식으로 러시아군에 맞섰기에 그렇다. 5월초 아조프스탈을 포위하고있던 도네츠크인민공화국병력 1만2000명이 돈바스로 북상하고 체첸용병들이 도네츠크병력과 함께 아조프스탈관리동앞에서 승리를 선언하며 마리우폴이 완전 정리됐다는것을 밝혔다. 러시아군중앙군구사령관은 2단계특수군사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2022.8 시작된 바흐무트전투는 2023.5 러시아군의 바흐무트함락으로 종결됐다. 우크라이나동부 도네츠크에 위치한 바흐무트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도움을 받아 수년동안 요새화된 군사적요충지다. 5월중순 우크라이나군은 바흐무트공세를 시작했지만 하루동안 러시아군에 의해 1600명이나 사살됐고 우크라이나군이 발사한 하이마스다연장로케트·우라간로케트등은 러시아군에 모두 요격됐으며 드론25대는 격추됐다. 그외 도네츠크지역에서 900여명의 우크라이나군이 사살됐고 곡사포·차량등이 파괴됐으며 도네츠크소재 아드빕카부근에서 우크라이나110기계화여단탄약고가 파괴됐다. 그외에도 러시아군은 수백의 우크라이나병력과 여러대의 전차·전투차·로케트·자주포를 완전히 파괴하며 전과를 확대했다. 5월말 도네츠크공화국측은 바흐무트의 지뢰제거작업을 시작하며 전투가 러시아군의 승리로 종결됐다는것을 보여줬다.
5.24 예브게니프리고진바그너수장은 한인터뷰에서 2022.10부터 224일간 바흐무트에서 우크라이나군 약5만명이 사망하고 5~7만명이 부상당했다며 <바그너부대원들이우크라이나군대에비해전사자는약1/3,부상자는약절반정도에머물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전투의목표는아르툐몹스크점령이아니라이곳에서최대한많은우크라이나군인을제거하는<고기분쇄>였다>·<바그너부대는제거해야할자들을모두제거하고서주어진임무를완수했다>고 언급했다. 프리고진의 발언을 통해 바흐무트전투목적이 우크라이나·제국주의세력의 전투자원소모였다는것을 확인할수 있다.
우크라이나신나치정권이 당초 춘계공세를 말한것과 달리 미루다 시작된 하계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이 4월초~9월초 6만6000병력을 잃은것으로 추정했다. 전CIA분석가 래리존슨은 6만명이상병력이 손실됐다고 말했다. 중국언론 관찰자망은 사상자수가 막대해 미국도 그수를 확인할수 없을정도며 러시아군고지대포병부대가 가하는 고강도포격으로 우크라이나군2개대대가 하루만에 사라지고 주요장갑차를 잃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에 동원된 병사들은 보병돌격전술을 수행하면서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는 명목상 2500문이상의 포병을 보유하고있고 탱크수도 300대를 초과하고있지만 공중지원이 없고 지뢰밭에 갇히면서 1주일만에 병력30%·무기20%를 상실하기도 했다. 관찰자망은 서방이 우크라이나지원을 위해 무기고를 열었다며 6.9~7.25 미국이 6번에 걸쳐 총54억2500만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해 그나마 우크라이나군이 2달동안 반격을 지속할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한편 2023.5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총768억달러를 제공했고 여기에는 500억달러가까운 군사원조와 39억달러의 <인도적지원>도 포함돼있다.
2023.5.9 푸틴은 2차세계대전전승기념연설에서 <오늘문명은다시한번결정적전환점에있다.우리조국을겨냥한진정한전쟁이시작됐다.>며 우크라이나특수군사작전을 <전쟁>으로 공식화했다. 우크라이나전은 동유럽전으로 확대되고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고 폴란드는 벨라루스국경인근에 군대를 대거 주둔시켰다. 8.9 세르게이쇼이구러국방장관은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스웨덴·핀란드와 접한 서부지역에 군사력을 증강하겠다고 밝히면서 폴란드가 향후 서부우크라이나점령을 위해 정규폴란드·우크라이나연합부대창설을 계획하고있다고 폭로했다. 쇼이구의 말에 따르면 폴란드는 미국의 반러시아정책의 중요도구로서 군사대국화를 위해 미국·영국·남코리아로부터 전차·포병장비·방공무기·전투기를 대량 구매하고있다. 폴란드가 향후 우크라이나분할점령을 음모하고있다는것은 6월 드미트리메드베데프러시아국가안보회의부의장이 <폴란드가우크라이나에전차지원을하기로한결정도국가분할을위한은밀한책동>이라고 폭로·비판한데서 드러난다. 특수군사작전에서 전쟁으로, 동유럽전으로의 전환은 동아시아에서의 전쟁가능성과 함께 현시기가 3차세계대전중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중·러군사협력과 반제대전
중·러군사협력은 <강대강>국면속에서 더욱 강화되고있다. 2023.3.21 시진핑·푸틴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공식회담을 진행한뒤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에서 우크라이나전쟁관련 <상황을긴장시키고더길어지게만드는모든행동을중단할것>을 언급했고 중·러공군·해군합동훈련정례화를 결정하며 <양국군대의협력과신뢰강화>·<양국은각자의이익,무엇보다도주권과영토보전,안보를지키기위한지원을제공할것>·<오커스동맹이핵잠수함을만들기로한계획에서비롯된위험에대해우려한다>고 언급했다. 러시아는 대만문제에 대해 <어떤형태의대만독립에도반대하며자국주권을지키려는중국의행동을확고히지지한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푸틴과의 1대1비공식회담에서 <(우크라이나전)불길에기름붓기를반대>한다며 반제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편 7.10 발렌티나마트비예코러연방평의회의장은 시진핑과의 만남에서 <양국의포괄적전략적동반자관계가사상최고수준>이라고 언급했다.
7월중순 중·러합동군사훈련 <북부연합-2023>이 실시됐다. 15일 중국매체는 유도미사일구축함·유도미사일소형구축함·종합보급함등으로 구성된 함대가 합동군사훈련참가를 위해 칭다오해군기지를 떠났다고 보도하며 훈련목적에 대해 <전략적해상통로의안전을보장하기위한것>이라고 언급했다. 18일 러시아의 6800t급대잠구축함·초계함등도 합동군사훈련에 참가시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기지에서 출발했다. 25일 중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중·러가 군함10여척·군용기30여대를 동원한 훈련이 전날 종료됐다고 보도하며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중군사전문가 쑹중핑은 <훈련이제3국을겨냥한것은아니지만일부주요지정학적강대국이역내안보에큰위협을가하는시점에이뤄졌다>고 언급했으며 훈련후 합동으로 해상·공중순찰을 실시한점을 들어 양국의 전략적협력이 강화되고있다고 해설했다. 다른 군사전문가는 <중·러가주요전투장비를훈련에투입했으며훈련과정도전투지향적으로진행됐다>고 설명했다. 군사훈련이 있던 시점이 7.11~12 나토빌뉴스정상회의, 7.18 미남핵협의그룹(NCG)첫회의와 맞물린다는점은 군사훈련의 목적이 미국·침략세력의 핵전쟁책동에 대응하기 위한것임을 보여준다.
미국의 반중·반러책동에 중·러가 더욱 과감하게 대처하고있다. 8.5 미알래스카주상원의원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알래스카앞바다에서함께작전중인11척의중국·러시아군함>을 언급했다. 미해군은 구축함4척을 알래스카인근에 배치했고 미북부사령부는 중·러순찰대를 감시하기 위한 항공기·선박을 배치했다. 중국측은 <중·러군간연간협력계획에따라양국해군함정이최근서태평양과북태평양관련해역에서합동해상순찰을실시했다>고 밝혔다. 중·러함정은 8월중순들어 태평양에서 오키나와해역을 지나 동중국해로 진입했다. 일본 교도통신은 중·러함정이 함께 이해역을 통과하는것이 발견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7.27 북전승절열병식에서 김정은위원장과 중·러정치·군사대표가 한자리에 함께한 모습은 오늘날 반제전선의 선두에 누가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반제대전으로 전개되는 3차세계대전, 반제자주세력대 제국주의침략세력의 <강대강>대결전은 현재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