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 주요정치인으로 역할을 했던 김영삼은 집권야욕으로 1987 대선에서 민주세력의 집권을 망쳤다. 1991 노태우·김종필의 군사쿠데타세력과 야합했으며 스스로 <문민>정부라 자처했지만 사실상 쿠데타세력의 정권을 연장하는데 기여했다. 노태우는 자서전에서 <금진호전상공부장관과이원조전의원을김총재에게소개해주고이들을통해각각1000억원씩모두2000억원을지원했다>·<대선막바지에김영삼후보쪽의요청을받고다시금전장관을통해1000억원을보내줬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영삼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이제살았습니다.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인사를 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또 <(김영삼이당선된뒤)청와대에서김대통령취임식장으로떠나기전청와대금고에100억원이상을넣어뒀다>고 말했다. 노태우는 비자금수사당시 자신이 관리한 자금의 총액을 <원금만2757억원이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집권한 김영삼은 정권유지에 역시 혈안이 돼있었다. 김영삼은 1995.3.21 청와대에서 열린 민자당당직자만찬에서 <6월지방선거는반드시승리해야한다.선거결과에대해서는다음에있을총선과정에서지구당위원장들에게응분의책임을묻겠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2004 이와 유사한 발언으로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이 일었고 야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직무가 정지됐다. 그러나 군사정권을 잇는 김영삼정권에 대해서는 이런 반응이 전혀 없었다. 정권말기 IMF(국제통화기금)사태가 터지기직전인 1997.4 김현철의 공천개입·국정개입의혹이 불거졌다. 차남 김현철은 <소통령>으로 불리며 권력을 누렸다. 1997.4.7 한보국정조사특위청문회가 시작됐고 김현철의 한보특혜대출의혹이 다뤄졌다. 또 언론사사장과 장관인사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김현철은 김영삼집권4년간 청와대·정부·안기부·언론·군·검찰의 인사와 신한국당의 공천등 국정전반에 개입했다. 1997.5 김현철은 최대의 금융부정사건인 <한보사태>의 한보특혜대출비리에 연루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알선수재및조세포탈)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삼정권은 <신자유주의세계화>의 시기에 들어서 정권초기부터 쌀개방투쟁에 직면했다. 우루과이라운드의 쌀개방협상과 <무역자유화>정책은 이전정권때부터 시작됐으나 1995.1 WTO(세계무역기구)출범을 앞두고 그에 대한 반대투쟁이 더욱 격렬해졌다. 농민들을 비롯해 민중진영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김영삼대리정권은 우리농업을 제물로 바쳤다. 김영삼이 치적으로 자랑하는 <금융실명제>·<금융자유화>도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체제의 전제조건으로 되는 조치에 불과했다. 김영삼대리정권은 <OECD가입>·<금융자유화>를 내세워 금융시장을 국제독점자본의 먹잇감으로 시장에 내놨다. 1997 아시아금융위기에 휩쓸리며 김영삼정권은 IMF사태를 맞게 됐다. 검찰에서 1998.4 정부관료들을 상대로 IMF구조조정위기까지 방치한 책임(직무유기)을 수사했을때 김영삼도 참고인으로 서면조사를 받았다. 김영삼은 쿠데타세력과 야합해 집권하고 결국 세계독점자본세력에게 경제를 팔아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