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주석은 항일시기 무장투쟁과 반일민족해방통일전선건설로 당창건의 조직사상적기초를 마련하고 해방직후 당중앙지도기관의 조직을 첫째로 보고 추진했다. 북조선공산당중앙조직위가 조직됐다. 노동계급의 토대위에 튼튼히 선 대중적당으로, 유일한 지도사상에 기초한 전당의 사상의지·행동의 통일을 보장하고 혁명적인 당규율을 세우는것을 당건설의 기본원칙으로 규정했다. 1946 동일한 근로자대중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북조선공산당·조선신민당 두당을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을 창립하는 결정이 채택돼 진행됐다. 대회에서는 노동당은 조선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하고 옹호하는 선봉대이며 현단계에 있어서 당의 기본임무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개혁을 철저히 수행하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것 이라고 밝혔다. 남에서는 공산당과 다른 근로자당들인 신민당·인민당을 합당하는 문제가 상정됐다.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이 불법화되고 한편으로는 합당과정을 기회로 자기지반을 확장하려는 파쟁이 극심하게 벌어졌다. 김일성주석은 1946.7 남의 신민당 허헌, 1946.9 조선인민당 여운형을 만났다. 11.23 3당합당으로 남조선노동당창립이 선포됐으나 근로인민의 대중적당으로 발전시키려한 본래목적은 실현되지못했다. 여운형은 남로당에 망라되지못한 인민당지지자들을 확인하고 1947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1947.7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홍명희가 당수가 됐으며 1948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에 갔다. 남북연석회의에는 남인사들로 41개정당·사회단체를 대표한 395명이 참석했다. 1948.8.21 해주에서는 남의 정당·단체들이 공동추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 남조선지역대의원을 선거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남의 각지역대표들 997명이 참가했다. 전쟁당시 조선노동당은 남지역에서 활동을 벌였고 조선노동당의 전남도당위원장으로 선임된 박영발과 전북도당위원장으로 선임된 방준표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유격대를 지휘하다가 1954 사망했다. 북에서는 해방이후 1946 민주개혁을 실시하고 1947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에 들 어갔고 전후복구건설직후인 1956~58 사회주의적생산관계개조를 실시해 계급적차별을 야기하는 사적소유형태를 정리했다. 애초 식민지민족해방운동에서 시작돼 애국지주·민족자본가들까지 함께 민주개혁을 진행하면서 조선노동당은 <인민정권>노선을 수립하고 친일파·봉건지주를 제외하고는 전체주민들을 인민위원회로 단결시켰다. 사회주의적생산관계개조에서도 청산의 방법이 아니라 자원성의 원칙에서 진행됐다. 정부는 협동화에 지원을 강화하고 그생산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추동했다. 북에서는 이것이 오늘날 북사회를 <하나의대가정>이라 할수 있게 한 바탕으로 됐다고 보고있다. 김일성주석은 자신의 정치철학에 대해 <이민위천(以民爲天)>이라고 표현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94 <사회주의는과학이다>에서 이에 대해 <인덕정치>라고 밝혔다. 김정은위원장은 최근년 특히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를 강조하면서 이와 같은 조선노동당의 정치노선을 확고히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