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47.9 코리아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상정시켰다. 김일성주석은 1947.10.3 북민전(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의장단회의에서 남단독정부조작음모를 파탄내고 조국의 완전한 통일독립을 위한 대책으로 남북협상을 진행할것을 제안했다. 김일성주석은 1948 신년사와 1948.3.9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원회25차회의에서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방침과 그실현을 위한 투쟁과업을 재차 천명했다.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선거원칙과 비밀투표방법에 의해 최고입법기관을 전조선적으로 선거하고 이렇게 선거된 인민의 최고입법기관에서 민주주의적헌법을 채택하고 우리인민을 민족적융성과 행복의 길로 인도할 진정한 민주주의인민정부를 구성해야한다고 밝혔다. 조선인민자신이 이런 방법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것은 오직 외국군대가 철거되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조선인민이 자주적으로, 민주주의원칙에서 평화적방법으로 조국을 통일할것을 그기본방침으로 규정했다. 1948.1.9 북민전중앙위의장단회의에서는 남북협상의 조속한 실현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낼것을 토의했다. 코리아민중은 자주권을 무시한 유엔<결의>에 반대해나섰고 투쟁은 2.7 남전역에 걸친 구국항쟁으로 확대됐다. 미국은 2.26 <유엔소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남단독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게 했다. 조성된 정세는 분단의 고착화가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런때 3.25 북민전중앙위26차회의에서는 4월 남북연석회의개최를 제의하는 공개서한을 채택·발표했다. 이어 3.27~30 조선노동당2차대회는 혁명의 참모부인 당을 더욱 튼튼히 하고 혁명기지를 강화하는것과 함께 미국이 추진하는 남단독선거와 남단독정부조작책동을 반대배격한다는것을 선포하고 당면해 북과 남의 전체 애국적민주역량이 단합해 <단선단정>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반미구국항쟁을 힘있게 벌이며 이를 위한 북남 모든 정당·사회단체대표들의 연석회의를 소집할것을 토의했다. 4월 남북연석회의에는 남북1000여만명의 소속원을 망라한 56개정당·사회단체대표695명이 참가했다. 5.2 대동강 쑥섬에서 있었던 남북연석회의의 지도부협의회에서 통일전선을 강화하며 통일적인 중앙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할것을 협의·확정했다. 김구·김규식은 서울로 귀환한 뒤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반미구국통일전선으로 통일독립촉성회를 조직했다. 연석회의참가자들은 남북단일국가건설을 위해 투쟁했으며 5.10<단독선거>가 진행되고 이승만정권이 수립된 정국에서 총1080명을 선출해 8월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남측대의원360명을 선출했다. 이들중에는 홍명희·백남운·이병남·이극로·유영준등이 포함됐다. 9월 이들은 북측대의원212명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을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