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 항쟁의기관차〉 〈석유달러〉 믿을수 있는 세계통화인가 

1960.10 런던금시장의 금값이 온스당40달러를 돌파했다. 금값안정을 위해 주요국들이 금을 각출해 <금풀>을 만들었다. 한동안 안정적으로 운영됐지만 베트남전쟁이 악화되고 달러발행이 늘어나 달러신인도가 떨어지자 프랑스가 가장 먼저 금풀에서 탈퇴했다. 이후 프랑스는 30억달러상당의 금을 미연준(미연방준비제도 Fed)으로부터 바꿔갔다. 1964 드골은 IMF에 특별인출권(SDR special drawing rights)발행을 제안했다. 1967 IMF이사회에서 이를 합의했고 1970.1.1 첫 발행했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전쟁등으로 국가채무가 급증해 미국이 보유한 금대비 570%의 달러가 발행됐다. 1971.5 영국이 미국에 30억달러의 금태환을 요구하자 미국은 그3개월뒤에 달러의 금태환중지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변동환율제로 이행했다. 미국에게는 보유금대비 달러발행량이 늘어나면서 국가부도가능성문제도 있었지만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달러가치의 하락을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1971·72 미국의 통화량은 연10%이상씩 증가했다. 1971 금가격은 온스당42.22달러, 1972 온스당70.3달러까지 거래돼 달러의 실질가치가 1년사이에 100% 평가절하됐다. 1979 달러는 독일마르크화와 일본엔화에 대해 40~50% 절하됐다. 미국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급격히 높아졌다. 1974 기존에 bbl당1달러의 석유가 11.65달러까지 올랐다. 2차오일쇼크때인 1979 bbl당40달러를 넘어섰다. 1975 미정부가 루스벨트시대 묶어둔 민간인의 금소유제한을 풀자 금값이 1980.1 온스당800달러를 기록했다. 이런 요인들로 미국은 인플레이션이 시작됐으며 고율의 인플레이션은 높은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연결됐다. 경기침체로 실업률이 10%를 넘어섰다. 두자리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 새로 취임한 볼커미연준의장은 통화량의 전년대비증가율을 1978 8.3%, 1979 7.2%, 1980 6.4%, 1981 6.3%로 줄여나갔다. 그리고 금리도 1981 19%대로 큰폭으로 인상해 대대적인 긴축에 들어갔다. 그때문에 많은 기업과 서민들이 파산했다. 이에 대한 분노로 한미국시민이 엽총을 들고 FOMC회의장에 들어가려했던 사건까지 벌어질정도였다. 1975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무장관 키신저가 석유를 달러로만 결제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사우디에 군사적지원을 약속했다. 약세를 면치못했던 달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이때부터 기축통화로서 그지위가 확고해졌다. 금은 채굴량이 제한돼있고 시장에서의 유통에 한계가 있지만 석유는 연료·원료로서 산업전분야에서 아직도 상당량의 공급이 꾸준히 요구되는 자원이다. 석유패권이 유지되는한 달러패권도 같이 가는 체제가 구축된것이다. 국제독점자본들의 석유자원에 대한 관심은 한결같이 높았지만 1차오일쇼크로 유가가 오르기전까지 20여년동안 유가는 bbl당1달러대에 머물렀다. 1차오일쇼크의 유가인상은 중동산유국들이 국제독점자본의 석유지배를 반대해 석유주권을 가져오기 위한 저항이었다. 기축통화로서 기능을 공고히 한 <석유달러>의 위력을 확인한 금융자본집단은 세계통화에서 석유의 역할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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