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대공황으로 미국의 경제는 반토막나고 실업자는 1300만명을 넘어섰다. 총실업률이 37%까지 올랐는데 대도시는 실업률이 50%에 이르렀다. 은행은 전체의 44%가 도산했다. 미국인구의 약28%가 대공황기간 일체 수입이 없었다. 1933.3.4 루스벨트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다음날 루스벨트는 금태환을 중지했다. 그리고 민간인과 은행의 금보유를 모두 금지했다. 1933.10 온스당20.67달러였던 금가격을 1934.1 온스당35달러로 고정시켰다. 달러화가 69% 평가절하된것으로 미국으로 금유입현상이 나타나고 미국내통화량이 증가하며 산업생산량이 늘었다. 수출경쟁력이 높아지자 <호혜통상법>을 제정해 기존관세를 50%까지 인하할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이 행사할수 있도록 했다. 취임이틀째 3.6 루스벨트는 은행영업중단을 선언했다. 부실은행들을 정리하고 나머지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30억달러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은행들은 1주일뒤 영업을 재개했다. 이렇게 취임1달만에 은행들의 신용위기를 해결했다. 은행법(글래스·스티걸법)을 통과시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업무를 분리하고 정부채권을 은행권의 담보로 사용하도록 했으며 연방예금보험공사를 만들고, 공개시장조작을 중앙은행 아래 두고 은행지주기업은 중앙은행의 조사를 받도록 했다. 또 루스벨트는 금·은의 증서를 모두 회수해 금속본위제를 완전히 없앴다. 1933 루스벨트는 대공황후 경기부양을 위해 미연준(미연방준비제도 Fed)에 미정부의 신용, 즉 국채를 담보로 달러를 찍어내 경기부양에 동원했다. 루스벨트는 <우리가알다시피,잭슨시절이래거대한금융영역이정부를소유하고있다는것이사태의진상이다.이나라는잭슨이연방은행과싸운일을되풀이하고있다.>고 말했다. 1933.6 국제연맹가맹국66개국이 모인 런던통화회의가 개최됐다. 회의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 위한것이었지만 회의를 얼마 남기지않은 1933.4 미국은 금값을 인상하면서 금본위제에서 전격 탈퇴했다. 런던통화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금준비가 비교적 괜찮았던 프랑스는 주변국들과 금블록을 형성하려고 했다. 루스벨트는 금의 해외유출을 차단하고 외국과의 이익을 모두 금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금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상황에서 결국 프랑스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미국의 보호주의는 유럽각국의 보호주의를 낳았고 독일·이탈리아·스페인·벨기에등의 파시즘으로 이어져 2차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 미국은 세계금의 75%를 보유하게 됐으며 미국화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다. 1944.7 브레튼우즈회의에서 미달러를 기축통화로 하자는 안이 채택됐다. 1923 케인즈는 <금본위제는이미야만적잔해에불과하다>며 금본위제에 대해 부정적입장을 밝혔고 그의 수요중심의 이론도 이를 뒷받침하고있다. 1960년대에 이르면서 달러통화량이 금본위제에 기초한 달러기축통화체제를 유지할수 없었다. 1971 미국은 달러의 금태환중지를 선언하며 사실상 금본위제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