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 항쟁의기관차〉 반제의 최전선에 선 코리아

1860년대 제국주의열강의 봉건조선왕조에 대한 침략이 감행되기 시작해 1866 <셔먼>호사건이 발생했고 연이어 병인양요와 1871 신미양요로 이어졌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의 승리로 끝났으나 1875 일본의 운양호사건에서 조선이 패배하면서 1876 조선은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1894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조선에 밀어넣고 조선왕조가 추진했던 갑오개혁을 파탄내며 일본을 위한 조선왕조의 <개혁>을 강박했다. 갑오농민전쟁의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에 반대해 무장봉기를 단행했으나 조선관군과 함께 나선 일본군에 의해 제압당하고 농민군은 반일의병투쟁에 흡수됐다. 한편으로 민족주의자들의 부르주아<민권>운동도 벌어졌다. 농민들은 무장대로, 노동자들은 파업투쟁으로 일제에 맞섰다. 미영제국주의자들은 일본의 조선지배권을 인정했으며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확립하고 1910 조선을 병합했다. 조선민족은 조선국민회와 같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한 우리민족의 투쟁역량을 조직하고 1919 3.1운동은 4월말까지 계속되며 거족적항쟁으로 일어났다. 초기 비폭력시위형태는 점차 폭력투쟁형태로 바뀌어갔다. 지식인33인의 기회주의적행보와 달리 노동자·농민기층민중들의 항거는 전투적이었다. 이후 조선민족은 만주지역등지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추축국을 이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김일성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연합국측의 소·중과 국제연합군을 조직했다. 1945 일제패망후 북에는 반제민족해방세력이 집권했으나 남에는 미군정의 영향력아래 이승만이 친일부역자들을 기반으로 정권을 잡았다. 해방시기 남에서 독립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했던 여운형·김구·김규식등은 외국군의 완전철군과 남북의 전조선적인 총선거를 통한 독립국가건설을 추진했으나, 그과정에 살해당하거나 북으로 피신해야했다. 북은 미국이 전쟁을 통해 코리아반도전지역을 장악하려는 기도를 막았다. 평화적통일을 위한 노력은 남의 친미파쇼정권들에 의해 탄압당했다. 한편, 북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침략에 대비하지않으면 안됐다. 1962 <카리브해위기>에 북에서는 경제국방건설병진노선이 선언됐다. 북은 1960년대 푸에블로호나포사건과 EC121격추사건에서 대함·대공군사력과 전쟁억제력을 확인했다. 1991 소련붕괴와 1994 김일성주석의 서거이후 미국의 북에 대한 고립압살책동이 악랄하게 전개되는 한편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선군정치를 선언하고 반제혁명무력의 결정적비약을 위해 결단했다. 김정은위원장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전략을 계승해 2013.3 경제핵무력건설병진노선을 채택하고 핵무장력의 고도화를 추진했다. 최근에는 북·중·러전략전술적협동관계와 함께 미국의 북침전쟁책동에 맞서 전세계적인 반제전선에 가장 강력한 무장력을 시위하고있다. 김정은위원장은 핵반격가상종합전술훈련을 지도한데 이어 수중공격형무기체계<해일>의 발사훈련을 공개했다. 북은 <뜻하지않은상황이도래한다면주저없이중대한사명을결행할것>이라고 밝히고있으며 <핵전쟁도발책동에미쳐날뛰는미제와남조선괴뢰역적들에대한분노와적개심>으로 3.19현재 청년들140여만명이 입대·복대를 탄원해 나섰다고 전했다. 남에서는 미군정을 반대해 투쟁한 이래 특히 전쟁이후 파쇼탄압속에서도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했고 1980.5 광주민중항쟁의 <피의학살>배후가 미국이라는 진실을 폭로하며 미국의 남코리아에 대한 신식민주의 파쇼정권획책과 경제에서의 착취·약탈정책을 반대해 투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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