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베트남전쟁은 한측면에서 국제정세에 1971~72 중미관계완화를 가져왔고 코리아에서 남북간에 대화국면으로 이어졌다. 김일성주석은 이기회에 박정희군사정권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조국통일3대원칙>을 합의한다. 하지만 이런 정세는 오래가지않았다.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을 선언하고 파쇼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박정희는 정적인 김대중을 제거하려했고 김대중은 일본으로 피신했다. 1973.8 박정희는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바다에 수장하려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포기한다. 1973.6.23 박정희가 <2개의코리아>전략으로 유엔동시가입을 제안하자 김일성주석은 같은날 연방제통일과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가입을 담은 <조국통일5대방침>을 발표했다. 2달뒤 북은 김대중납치사건직후 1971부터 이어온 남북적십자회담의 중단을 선언했다. 2012 동독평양주재대사관이 작성한 1975.4.18~26 김일성주석의 방중에 대한 보고서가 공개됐다. 김일성주석이 1961.7.11 중국을 방문해 북중우호협조및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뒤 14년만에 방문한것이었다. 이기간 소련에 대한 북·중간의 견해가 충돌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에 의한 좌경화로 북·중관계도 대립했다. 국제정세에서는 1975.4 남베트남 사이공정부의 붕괴를 앞두고있었다. 1년뒤에는 베트남이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됐다. 남에서는 1975.4.9 <인혁당재건위사건>을 조작해 8명이 사형당하는 정세였다. 김일성주석은 이때 중국을 방문해 <…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우리인민의 현투쟁은 세계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 만일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는경우, 우리는 같은 민족성원으로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지않을것이며, 남조선인민들을 힘있게 지원할것입니다.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전쟁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전쟁으로 결정적인 대답을 줄것이며 침략자들을 완전히 소멸할것입니다. 이투쟁에서 우리가 잃을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우리가 얻을것은 조국의 통일입니다. … 남조선인민들이 바라는대로, 남조선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민족적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집권하면, 우리는 조선의 항구적인 평화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게 될것이며, 우리 조선사람들끼리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통일문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할수 있습니다.>라고 연설했다. 북은 코리아반도에서 미군이 철군하기를 원했으나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소련견제를 위해 미군주둔을 긍정적으로 봤으며 이는 중국이 대만의 미군을 철거시키면서도 코리아의 미군주둔문제를 외면한 이유였다. 1976.8.18 <판문점미루나무사건>직후, 미국은 방대한 무력을 코리아반도에 집결시키고 북침전쟁을 도발했다. 북의 시각으로 보면 당시의 긴박한 군사상황은 전쟁으로 미군을 몰아낼 기회였다. 그러나 북은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고 사태를 진정시켰다. 통일을 위해서는 3가지조건이 갖춰져야한다. 하나는 미군을 이땅에서 몰아내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을 이뤄낼 남의 역량이 마련돼야한다. 마지막으로 통일에 장애를 초래하지않을 국제적환경이 갖춰져야한다. 국제적환경은 우리민족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분단이 되는 역사적과정에 항상 중대한 작용을 했다. 외부환경에 좌우되지않고 스스로 우리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결정적인 힘을 가져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