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 항쟁의기관차〉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영군체계확립과 핵개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60.8.25 근위서울유경수105탱크사단현지지도로 선군혁명영도의 길에 나섰다. 이시기 국제적으로 미국의 민족해방·사회주의세력에 대한 침략전쟁책동이 더욱 노골화되고, 사회주의내에서는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해 제국주의세력과 무원칙하게 타협하는 현상도 나타나 엄중한 후과를 낳고있었다. 이런때에 북에서는 인민군대에 대한 정치사상적영도와 함께 군사작전권을 행사할수 있도록 전군을 확고히 틀어쥐는 과정이 진행되면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의 전제가 마련됐고 1960년대말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를 시작했다고 밝히고있다. 북의 자료에 의하면 1960년대말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전당적으로 벌어지는 한편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반당군벌관료주의자들의 책동을 폭로분쇄하기 위한 사업을 지도했다. 한편 1968 푸에블로호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북에는 핵무기가 하나도 없었던 반면, 미국은 1958.1.29 주남미군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했다고 발표한 이래 1968까지 10년동안 수많은 핵무기들을 주남미군기지에 반입해 1960년대말 미국은 8종의 전술핵무기 약950발을 주남미군기지에 집중배치해둔것으로 알려졌다. 1976 북침핵전쟁연습 <팀스피리트>미·남합동군사연습을 시작하고 1980년대에는 이를 연례적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정찰위성을 통해 1982 영변지역에서 수십차례의 고폭실험흔적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1989 서방은 프랑스상업위성 SPOT이 영변의 핵시설을 촬영한것을 공개하면서 북핵개발문제를 제기했다. 6자회담이 진행중이었던 2005.5 북은 5㎿e원자로에서 8000개의 <사용후핵연료봉>인출을 끝냈다고 발표했고 6자회담중단을 선언한뒤 2009.11 폐연료봉 8000개에 대한 재처리를 2009.8말 끝냈다고 발표했다. 북은 2006·09·13·16·17 핵시험을 실시했고 4차부터는 수소폭탄기술과 증폭핵분열기술을 적용한 고위력핵무기를 실험했다고 분석하고있다. 북은 4차핵시험이후 핵탄두를 소형화·다종화·표준화했다고 밝히며 대량생산을 선언했다. 2017.9.2 김정은위원장의 핵무기연구소현지지도소식을 보도하면서 <화성14>ICBM에 탑재되는 수소폭탄방식의 핵탄두를 공개했는데 이는 직경 약1m의 소형화된 핵탄두였다. 1982.6 당중앙군사위에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영군체계를 철저히 확립하는것에 대한 문제가 논의됐다. 김일성주석은 회의에서 오늘의 시대는 군사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인것만큼 현시대의 발전추세와 군사사업에 정통하고 무비의 담력과 천재적예지, 세련된 영군술을 겸비한 김정일동지의 영군체계를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세우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일로 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당중앙위에 군대사업전반을 지도하는 부서를 새로 조직하고 군대안의 정치사업과 군사기술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업에 대해 당적으로 철저히 지도하도록 했다. 이후 군대내 당정치사업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총정치국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직접 보고하고 그결론에 따라 처리하는 사업체계와 질서를 세웠다. 또 총참모부를 통한 보고체계를 세우고 총참모부에서 아래단위 각급참모부들을 잘 꾸리고 참모부를 통해 전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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