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7 쿠르스크전투가 발생한다. 1942여름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소련군은 팬저탱크무력을 앞세운 파쇼독일과 쿠르스크에서 전선을 형성하고있었다. 코노발로브대위는 독일탱크의 기습으로 수하들을 잃고 큰 부상을 입는다. 새부대에 배치된후 코노발로브는 망가진 탱크의 부품을 구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고 자신과 부대원들이 보병으로 차출되자, 독일군이 노획하고 버린 소련탱크를 되찾기도 한다. 종국에 KV-1탱크1대로 독일탱크팬저16대·무장차량2대·차량8대를 격파하고 독일탱크를 탈취해 부대에 합류한다.
쿠르스크전투는 2차세계대전의 주요전투중 하나다. 1941여름 파쇼독일의 기습작전에 초반 고전했던 소련은 겨우내 전열을 가다듬고 1942여름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승리하며 대전환기를 맞이한다. 1년뒤 벌어진 쿠르스크전투는 파쇼독일입장에서 전쟁의 운명을 판가름할 전투였기에 반드시 승리해야했다. 군사기술적측면에서도 역사상 최대규모의 기갑전이었으며 지상전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승리하며 수세에서 공세로 크게 전환했지만 독일은 쿠르스크전투에서 패배하며 동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영웅탄생은 우연이 아니다. 코노발로브와 리코프의 갈등은 소련이 외부의 적인 파쇼독일만이 아니라 내부의 적인 관료주의와도 싸우며 전쟁에 임했다는것을 보여준다. 리코프는 코노발로브가 부품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것을 <자유주의>로 매도하고 코노발로브가 영웅시되자 시샘하며 고장난 탱크를 몰고 전장에 나가라고 명령한다. 코노발로브는 리코프의 무리한 명령을 거부하지않은채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결과를 안아오며 뛰어난 전략가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한편 대학시절 코노발로브가 자진해서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사실이 여러번 언급된다. 코노발로브의 영웅성은 가장 위험한 전장에 나서는것을 주저하지않은 숭고한 국제주의정신·붉은군대정신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가장 뜨거운 여름, 대결전이 있었다. 제국주의간 각축을 벌인 1차세계대전, 국제반파쇼세력과 파쇼세력의 결전장이자 2차세계대전의 축소판인 스페인내전, 반파쇼대전의 시작과 스탈린그라드전투·쿠르스크전투, 2차대전종전이후 가장 많은 나라가 참전한 코리아전까지, 20세기갈피마다 대전장은 여름에 형성됐다. 지금 코리아반도에 가장 치열한 전선이 형성되고 반제세력과 침략세력은 가장 뜨거운 여름을 향해 돌진하고있다. 2차세계대전의 반파쇼통일전선승리는 반제대전으로 전개되는 3차세계대전의 승리자가 누구인지 예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