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전쟁의 계절이다. 과거일수록 전쟁을 하는데 계절적, 지정학적인 객관적요인은 큰 영향을 미친다. 식량과 물자가 부족한 긴 겨울이 지난후 봄에 전쟁을 치루기란 쉽지않다. 물자를 갖출수 있는 여름에 전쟁을 시작해야 최소 식량이 풍족한 가을까지 전쟁을 이어갈수 있다. 겨울은 추위를 비롯한 또다른 시련이 있다. 아무리 침략세력이라고 해도 전쟁의 파괴적후과는 고려하지않을수 없다. 그렇기에 침략자들은 속전속결을 확신하며 전쟁을 시작했고, 속전속결이 안되면 패배했다. 침략세력은 여름에 시작해서 겨울전에 끝내는것을 목표로 삼았다.
1·2차세계대전은 여름에 터졌다. 1차세계대전은 극단화된 식민지쟁탈전과 제국주의간모순폭발의 근본원인과 <사라예보의총성>을 계기로 발발했다. 2차세계대전은 당초 제국주의전쟁으로 시작했으나 소련을 중심으로 단결한 세계반파쇼통일전선의 강화로 인해 반파쇼대전으로 전화됐다. 2차대전이 여름에 터진 이유는 특히 지정학적이유가 크다. 독일의 소련진군은 반드시 여름에 이뤄져야했고, 또 반드시 속전속결로 전개돼야했기에 그렇다. 독일은 기습적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여름에 총공세를 단행했다. 히틀러나치의 이같은 전략은 1812.6.24 러시아원정을 시작한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전략을 상기시킨다. 19세기 러시아민중의 격렬한 저항과 맹추위속에서 러시아원정을 실패하며 몰락하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운명은 겨울이 소련민중의 편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여름을 버티고 이른 겨울이 오면 적들은 퇴각하고 승리를 도모할수 있다는것을 역사적으로 체득한 붉은군대·소련민중은 이오시프스탈린·소련공산당의 현명한 영도를 따라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2차세계대전의 승리를 쟁취했다.
나선형으로 변화·발전하는 인류역사는 또 격변의 여름을 앞두고있다. 반파쇼대전으로 전개된 2차세계대전을 계승·발전한, 군사·정치적위력강화와 전략·전술적협동으로 무장한 반제자주세력과 <신냉전>체제조작과 장기전으로 정치·경제적위기를 모면하려는 제국주의침략세력간 대격돌인 3차세계대전은 이미 터졌고, 본격화를 앞두고있다. 우크라이나전은 우크라이나신나치의 침략전쟁이 예견된 조건에서 동토대가 형성되는 지정학적요인을 고려해 겨울에 시작됐다. 현재 동아시아전선에서 격렬하게 감행되는 제국주의침략전쟁연습과 이에 대항한 북·중의 군사적대응은 2023여름 3차세계대전의 높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1차세계대전의 배경
19세기말 제국주의간 분열이 본격화됐다. 1870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프랑크프루트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알자스·로렌지역을 할양받고 50억프랑을 배상금으로 받아냈다. 1871.1.18 빌헬름1세는 프로이센건국170주년을 맞아 베르사유궁전에서 직위를 하며 프랑스에 굴욕을 안겨줬다. 오토폰비스마르크는 프랑스고립정책으로 오헝(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러시아와 3제동맹을 결성했다. 오헝과 러시아간 갈등으로 한차례 동맹이 깨진뒤 1879 독일·오헝, 1887 독일·러시아가 각각 동맹을 맺었다. 독일은 이미 1881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19세기말 유럽주요국동맹의 중심에 독일이 있었다. 1888 즉위한 독일 빌헬름2세는 동맹을 중시했던 비스마르크와 달리 식민지쟁탈에 골몰해 동맹과 갈등·충돌을 일으키다 결국 러시아와의 동맹이 깨졌다.
빌헬름2세가 내세운 독일식민정책이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정책이다. 이를 통해 독일·동유럽·발칸·페르시아만을 연결해 세력팽창을 하겠다는 의도는 영국의 3C정책,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충돌했다. 독일식민정책과 상충됐던 영국·프랑스·러시아는 추후 3국협상을 맺는다. 3국협상은 1892 러·프동맹, 1904 영·프협상, 1907 러·영협상을 기반으로 형성됐다.
한편 1875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 오스만제국에 저항하는 민족봉기가 일어났다. 발칸반도국가들은 오스만제국지배에서 해방되거나 이미 확보한 독립된 영토의 확장을 추구했다. 한편 범슬라브주의를 명분으로 러시아는 이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오스만제국이 내정개혁을 거부한것을 계기로 1877 러시아는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결과 산스테파노조약을 체결했는데, 러시아세력확장을 가로막고 지역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1878 여름 베를린에서 비스마르크가 국제회의를 주재해 산스테파노조약을 파기하고 베를린조약을 성립시켰다. 그결과 산스테파노조약을 인정했던 루마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독립은 승인되고 불가리아는 오스만제국치하 자치국으로 남았다. 오헝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관리하게 되면서 러시아의 남진정책은 좌절된다. 베를린회의결과에 러시아·발칸반도국가들은 큰 불만을 품게 된다.
독일은 오헝·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었다. 1879 독일·오헝간 독·오동맹을 체결했고 1882 프랑스와 갈등을 빚던 이탈리아와 독·오간 동맹이 체결됐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주변의 <미회수된이탈리아>영토를 두고 오헝과 영토분쟁을 하던 상황이었기에 3국동맹은 매우 불안정했다. 1902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독일·프랑스전쟁시 중립을 취하겠다는 비밀협상을 진행했고 1915.4 이탈리아는 3국협상과 런던조약을 체결하며 3국동맹은 붕괴된다.
한편 아프리카·아시아에서 영국은 19세기말~20세기초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이집트 카이로, 인도 콜카타를 연결하는 3C정책을 추진했다. 아프리카에서는 1880년대 케이프식민지총리 세실존로즈가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영국의 철도건설로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3C정책의 배경이다. 한편 프랑스는 알제리·마다가스카르를 잇는 횡단정책을 현실화하기 위해 1830 알제리점령, 1831 튀니지보호국화, 이집트·수단진출, 아프리카횡단철도건설등을 시도했다. 1898 파쇼다사건은 식민지쟁탈에 따른 영국·프랑스간 충돌이다. 파쇼다사건은 프랑스가 물러서며 전쟁으로 확대되지않았지만, 조선을 둘러싼 1894 청·일전쟁, 1904 러·일전쟁, 1898 라틴아메리카패권장악을 위한 미국·스페인전쟁등 세계곳곳에서 식민지쟁탈전이 심각하게 전개됐다.
국제적분쟁도 더욱 확대됐다. 오헝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1908 합병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전면적반대와 영·프의 우회적반대에 직면했다. 1911 모로코를 둘러싸고 이권쟁탈을 위해 프·독이 충돌하면서 두동맹간 대립이 격화됐다. 1912이후 오스만제국약화를 계기로 1·2차발칸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오헝의 이지역에 대한 간섭·지배는 지역내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사라예보사건은 필연이었다.
1차세계대전의 발발
1914.6.28 오헝황태자암살사건인 사라예보사건을 계기로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7.28 오헝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러시아가 전쟁에 뛰어들었다. 러시아의 전쟁개입은 전략적, 경제적 이해관계도 있었지만 1911이후 증가한 대규모 파업·봉기·농민반란·차르타도투쟁의 국내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도발적조치였다. 8.1 독일이 러시아·프랑스에 차례로 선전포고를 했고 3일뒤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룩셈부르크를 공격하자 영국이 전쟁에 참여하며 오헝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의 전략은 서부전선을 빠르게 점령해 안정시킨 다음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이는것이었으나 서부전선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히며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전쟁개시후 우선 벨기에를 빠르게 점령해 프랑스로 가는 지름길을 손에 넣으려한 독일은 8.4 벨기에국경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예상밖의 고전으로 국경지역요새를 12일이 지나서야 겨우 함락할수 있었고 8.20가 돼서야 벨기에수도 브뤼셀을 점령할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를 침략한 독일은 프랑스민중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일부군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키며 1914.9 마흔전투에서 패배했다.
1914.8 동부전선에서 65만명에 달하는 러시아대군이 진군하고있었다. 1914.8.17 동부전선에서 독·러전투가 시작됐다. 러시아군이 빠르게 전쟁주도권을 잡았고 독은 서쪽으로 후퇴했으나 러시아 1집단군사령관이 2집단군사령관에게 보낸 전보를 독일이 입수하면서 전세가 바뀐다. 독일은 고립된 2집단군에 공격을 집중해 격멸시킨뒤 1집단군까지 정리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얻었으나 러군의 집요한 반격을 받으며 전선은 양측에서 치열하게 대치했다. 결국 참호전으로 양상이 바뀌며 전쟁은 장기전·소모전으로 변모했다.
오스만제국은 8.2 독일과 비밀동맹조약을 체결했고 10월 독일에게 1억프랑차관을 받고 동맹국편에서 러시아를 공격했으나 오스만제국9집단군은 코카서스전투에서 러군에 의해 거의 전멸됐다. 11.5 영국은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동시에 키프로스섬병합을 선언했다.
1915 서부전선에서 장기전이 시작되자 독일은 우선 러시아를 주타격으로 삼아 동부전선전투를 정리하기로 결정한다. 1915.1 독일은 2차마주리호전투를 통해 러시아군이 극도로 취약해졌다는것을 확인한다. 봄에서 여름까지 독·오헝동맹군공격에 러시아는 계속 참패를 하면서 8.5 폴란드에서 러시아군이 정리됐고 러군75만명은 독일의 포로가 된다. 10월 불가리아가 동맹국가입을 선포하고 동맹국이 세르비아전역을 점령하며 발칸지역을 방어하던 러시아는 큰 타격을 입는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중국내 독일의 군사·경제적근거지를 빼앗는것이 당면목표였다. 영국은 전쟁초기 일본에게 중국산둥반도의 독일근거지와 독일해군력에 군사적타격을 가할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1914.8 선전포고후 2달만에 중국칭다오의 독일근거지를 공격·점령했고 일해군은 독의 동양함대를 추격해 남태평양제도를 차지했다.
1916초 시작된 베흐됭전투는 12월까지 감행되며 엄청나게 많은 병사가 학살됐다. 베흐됭은 프랑스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요새였기때문에 프·독양쪽에서 사활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프랑스의 완강한 저항에 독일은 9월 패배를 인정하고 베흐됭공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12월 프랑스가 마지막공격으로 독일점령지역을 모두 되찾으면서 베흐됭전투는 끝난다. 이전투로 프랑스54만3000명·독일43만3000명이 사망했다. 같은해 동부전선에선 솜강전투, 5월 북해에선 유틀란트해전이 발발했다.
한편 전쟁장기화에 따라 중립국들도 편가르기가 됐다. 1915.5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는 영토확장보장조건으로 협상국쪽에 서면서 전쟁에 가담했고 1916.8 독일이 <무제한잠수작전>을 선언하자 1917.4 미국은 <평화와정의의회복>을 내세우며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무제한잠수함작전>은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착이었다. 중립을 지키던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협상국에 결정적으로 유리해졌다.
혁명과 종전
세계민중의 혁명적진출은 1차세계대전종전을 앞당겼다. 그중심에 블라지미르레닌이 있다. 1889 2국제당은 전쟁반대를 선언하며 등장했지만 1차대전이 발발하자 2국제당의 기회주의적지도부는 <방어전쟁>명목으로 전시공채를 의회에서 통과시키는데 찬성했고 전시내각에 참여하며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말로는 사회주의를 주창하지만 실제는 제국주의적입장에서 타민족의 침략을 지지하고 제국주의가 다른 민족을 억압·지배하기 위해 민족적증오를 부채질하는 입장에 선 우익사회민주주의자들, 2국제당지도부에 대해 레닌은 사회배외주의로 규정했다. 사회배외주의자들에 의해 노동자·민중의 반전투쟁은 탄압받고 약화됐다.
레닌은 1915.9.5 짐머발트회의에 참석해 2국제당과의 결별, 새로운 국제당 창설, 모든 전쟁대부금 거부, <제국주의전쟁을내전으로전환>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1916.4 키엔탈회의에서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전쟁패배의 전망으로 자국정부를 위협할 태세가 돼있지않는한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혁명적행동은 불가능하고 사회주의배외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사회주의깃발을 들고 부르주아정책들을 추구하는 자들과 단호하게 갈라서야한다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일깨워주는것이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라는 내용의 강령을 제출했다.
1916 교전국들에서는 계급투쟁이 격화됐고 각지에서 파업이 고양됐다. 군수공장들에서 장기파업이 전개됐고 1917 거의 모든 교전국에서 대중적반전운동이 일어났으며 제국주의전쟁을 사회변혁투쟁으로 전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17.10 러시아사회주의혁명은 전세를 크게 바꿨다. 소련은 1차세계대전에서 벗어났고 이에 협상국측이 불리해졌다. 1918.3 러·독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을 체결하며 러시아는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남과 동시에 독일은 수세적상황을 조금 모면할수 있었다. 협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세력은 동부전선의 재구축과 사회주의확산저지를 위해 1918부터 러시아에 대한 무력간섭을 본격화했다.
1918.2 독일은 서부전선에 178개사단과 대규모침략무력을 집중하며 여러차례 공격을 시작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7월 연합국의 마흔강반격작전이 시작됐고 8.8 독일의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되며 독일의 열세가 확정됐다. 9.15 마케도니아전선에서 불가리아군이 완전 궤멸돼 협상국측이 승리하면서 발칸전선이 뚫린다. 동맹국측은 이를 막을 힘이 없었고 남은것은 휴전뿐이었다.
1918.10말~11초 독일내 군사반란·노동자총파업이 일어난다. 10.24 킬군항에서의 군사반란은 해군병사들의 반전투쟁으로 전개됐고, 여기에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결합했다. 베를린을 제외한 중·서부대도시대부분을 장악한 독일공산당세력은 11.9 베를린전역에서 총파업을 일으켰다. 빌헬름2세는 퇴위·망명하고 프리드리히에버트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1.11 1차세계대전은 종전한다.
1차세계대전은 사망자900만명·부상자2200만명의 엄청난 인명손실을 낳은 대살육전이었다. 독일·오헝·오스만제국의 정치체제가 해체됐으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획기적변화로 러시아사회주의혁명승리를 들수 있다. 비록 1918~19 독일혁명은 실패했으나 1919 코민테른(3국제당), 미국공산당이 창건됐고 1920 영국공산당이 건설된 역사적사실은 세계민중이 혁명의 주인, 사회발전의 주체로서 전면에 등장하는 인류사적새전기가 마련됐다는것을 보여준다.
파시즘의 대두와 전쟁위기
1919.6 베르사유회의결과 독일은 국토1/8·인구1/10·식민지300만㎢·10억파운드를 내놔야했다. 더해 군사적으로도 엄청난 제재를 받게 된다. 민족적자존심은 훼손됐고 경제공황까지 덮치며 심각한 경제위기·민생파탄에 시달린다. 이는 진보세력·공산당이 강화되고 동시에 나치당(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 대두되는 사회적배경이다.
사회민주당정부는 독일공산당에 탄압을 집중하며 나치세력이 집권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1919.1 스파르타쿠스봉기를 진압하면서 스파르타쿠스연맹핵심 칼리프크네히트·로자룩셈부르크를 학살한 사회민주당정부는 2월 독일 바이마르에서 국민회의를 소집해 사회민주당·부르주아정당의 연합정부를 조직하고 에버트를 대통령으로 선거했으며 8월 헌법을 채택하며 바이마르공화국을 세웠다.
1919.12 독일노동당에 입당한 아돌프히틀러는 당권을 장악하고 1920.2 당명을 나치당으로 변경했다. 1923.11.8 뮌헨폭동을 일으키며 정권장악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대공황의 와중에 미금융자본의 재정지원을 받은 히틀러는 1932.7 독일대선에 출마해 큰 지지를 받았다. 한편 독일내에서 경제공황에 따른 계급투쟁이 첨예화되면서 1930~32 1000여차례의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심화되는 계급투쟁을 가로막기 위해 독점자본가들은 히틀러에 힘을 집중시켰고 그결과 1932총선에서 나치당은 37.3%를 획득해 1당이 됐고 히틀러는 총리가 돼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으며 1934 독일대통령이 병사하자 국가원수가 됐다. 히틀러나치는 1933.2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을 조작해 공산당을 불법화하며 공산당원·진보세력을 대거 체포하고 민주적조치를 모두 폐지했으며 국제주의자·불가리아공산당원 게오르기디미트로프를 체포·감금하며 파쇼통치를 강화했다.
한편 1921.11 이탈리아파시스트당을 조작한 베니토무솔리니는 1922.10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된뒤 모든 반대당을 해산시키며 파쇼권력을 강화했다. 1924 유고슬라비아를 압박해 아드리아해북쪽항구도시 피우메를 강탈했다. 무솔리니는 1935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뒤 1936.10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며 로마·베를린추축을 형성했다.
1923.9 간토대지진을 계기로 재일조선인·일진보세력을 대량학살·검거하며 군국주의화를 심화한 일본제국주의세력은 대외팽창에 골몰하며 1936.11 독일과 <국제공산당을반대하는협정>, 1940.9 독일·이탈리아와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방공협정은 미국이 영국 또는 유럽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에 관여하면 일본도 즉시 독일·이탈리아의 추축국에 가입해 참전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이다. 독·이·일의 추축국형성은 2차세계대전위기를 심화시켰다.
반파쇼통일전선형성을 위한 코민테른결정
심화되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항해 코민테른은 1933.6.4~6 유럽반파시즘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는 3200명이 출석해 파시즘·제국주의전쟁에 반대하고 노동자의 민주적권리·경제적요구를 옹호하기 위한 투쟁강령이 제출됐으며 선언이 채택됐다. 선언에서 코민테른은 수십만의 사람이 피비린내 나는 파시스트테러의 희생양이 됐으며 파시즘의 국제적진출은 제국주의전쟁으로의 직접적이행을 예고하는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부르주아계급과의 협조를 완전하게 단절하지않고서는, 가차 없는 혁명적투쟁 없이는 파시즘에 반대해 투쟁할수 없다고 선포하며 반파시즘투쟁위원회·반파시즘방위부대·파시스트테러희생자구원위원회의 조직을 강조했다.
1935.8.20 코민테른7차대회에서 <제국주의자들의새로운세계전쟁준비와관련한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임무에관하여>결의가 채택됐다. 결의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세계재분할이 사실상 이미 시작되고있다고 밝혔다. 일본은 만주·중국북부를 점령하며 제국주의열강의 중국세력범위분배와 태평양에서의 열강들의 상호관계를 규제한 워싱턴조약을 사실상 파괴했으며 영국·독일간 해군협정으로 베르사유조약이 완전 파기됐고 나치독일은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보복, 체코슬로바키아분할과 오스트리아병합·발트해연안나라들의독립파기·소비에트우크라이나탈취등을 기도하고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평화를 지키고 제국주의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임무로서 평화를 지키고 소련을 옹호하는 투쟁, 평화를 지키고 전쟁방화자를 반대하는 투쟁에서의 통일인민전선, 제국주의전쟁반대투쟁·반파시즘투쟁결합, 군국주의·군비반대투쟁, 배외주의반대투쟁, 민족해방투쟁·민족해방전쟁지지등을 내세웠다. 이어 7차대회는 실제 전쟁이 일어날경우에는 2국제당 슈투트가르트대회에서 레닌·룩셈부르크가 제출해 채택됐던, 전쟁에 의해 발생한 경제·정치적위기를 이용해 대중의 정치적의식을 각성시키며 자본가의 계급지배붕괴를 앞당기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것이 각당의 임무라는것을 전쟁에 대한 공산당·전노동계급의 임무로 규정했다.
7차대회에서 <파시즘의공세와파시즘에반대하고노동자계급의통일을지향하는투쟁에서의코민테른의임무>결의도 채택됐다. 코민테른은 소비에트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 결정적 승리를 거둔것, 자본주의역사상 최대경제공황, 독일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하고 새제국주의세계전쟁과 소련에 대한 공격위협의 증대, 정치적위기, 근로대중의 혁명화등을 세계정세의 기본적변화로 꼽았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의 통일전선실현은 현재 역사적단계에서 국제노동운동의 당면한 주요임무라고 선언하며 행동통일을 위해 사회민주당·개량주의적노조·노동자제조직과의 공동행동달성을 위한 노력과 지역적, 전국적, 국제적 규모에서 일치된 행동을 강조했다. 식민지·반식민지나라에서의 반제인민전선결성을 주문했으며 각국 공산당강화와 노동계급의 정치적통일을 위한 투쟁을 내세웠다.
스페인내전, 2차세계대전의 전조
1936여름 스페인내전이 발발했다. 스페인내전은 인민전선정부와 파쇼세력간의 전쟁이며 독일·이탈리아의 전쟁개입, 영국·프랑스등의 배신적인 불간섭정책, 소련의 인민전선정부지원이라는 각각의 입장과 함께 프랑코파쇼반란군의 승리로 파쇼진영이 확대되며 2차세계대전개전에 영향을 미쳤다는점에서 2차세계대전의 축소판이자 전조라고 볼수 있다.
1936.1 코민테른7차대회결정에 맞춰 공산당의 주도하에 스페인인민전선이 결성됐고 2.16 총선거에서 승리했다. 7.17 왕당파·파쇼세력들이 군사반란을 일으켰으나 초기 마드리드·주요도시점령으로 정권을 장악하려던 반란군의 계획은 무산됐다. 그러나 인민전선정부도 48시간내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 노동총동맹·전국노동연합은 총파업을 선언하고 30만명을 무장시킨채 반란군에 대항했고 파쇼세력에 의해 학살됐다. 조지오웰은 스페인내전초기몇달 프란시스코프랑코의 실질적인 적은 인민전선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들이었고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나서지않았다면 프랑코는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기록했다. 인민전선정부가 노동자·의용군에게 제때 무기를 제공했다면 준군사단체대부분도 노동자들에게 합류했을것이고 반란에 가담한 수비대는 얼마 버티지못하고 항복했을것으로 분석된다. 그렇지못했기에 반란군은 신속하게 역공할 기회를 얻었다.
한편 1936.9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는 스페인내전에 간섭하지않기 위해 불간섭위원회를 결성하려했으나 실패했다. 영·프가 배신적인 <불간섭>을 주창하는 사이, 독·이는 공군부대·전투부대를 반란군에 투입했으며 미·영자본가들은 신용대부·석유를 제공하며 스페인파쇼세력을 강화했다.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인민전선정부에 무기를 지원했다. 인민전선편인 국제여단이 53개국에서 온 3만2000~3만5000명의 사람들로 조직됐다. 이로써 스페인내전은 장기전이자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1936.7 시작된 전쟁은 1939.4.1 파쇼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1936~37 인민전선정부진영내에서의 권력투쟁이 심화됐는데 이는 코민테른의 스페인내전에 대한 방침을 둘러싸고 본격화됐으며 1937봄무렵 공산주의자중심의 경찰과 아나키스트중심의 의용군사이의 갈등이 격화됐다. 1937.5 카탈루냐광장 전신전화국점령에 따른 인민전선군(공화군)내부진영간의 총격전은
<내전속내전>으로 불렸으며 이후 인민전선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게 됐다. 한편 1938 프랑코는 파쇼군대내에서 절대적지배권을 장악했다. 1월 파쇼내각을 발표하고 파쇼법안인 국가중앙행정법을 제정했으며 2월 프랑코군이 독·이공군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동부 테루엘에서 승리하면서 내전상황이 파쇼측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3월 대규모공격을 시작한 프랑코는 공화군전선을 갈라놨다. 4월 영국·이탈리아는 종전시까지 이탈리아군의 스페인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하며 영국은 인민전선정부를 또 배신했다.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는속에 1938.9.30 뮌헨협정이 체결됐다. 영국·프랑스와 독일·이탈리아간 협정인 뮌헨협정은 독일의 강도적요구인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승인한것이다. 영·프의 이같은 결정은 세계대전이 임박한 조건에서 독일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독일의 침략예봉을 소련으로 향하게 하려는 음모였다. 뮌헨협정결과 영·프가 스페인내전에 참전할것이라는 공화군의 기대는 무산됐으며 소련은 공화군을 지원하는것이 어려운 상황이 됐다.
1939.1 바르셀로나가 점령돼 1만명이 학살됐고 2월 카탈루냐전투가 끝났다. 2.27 영·프정부는 프랑코진영정부를 공식인정했다. 3월 파쇼군대가 마드리드로 진격했으며 4월 부르고스에서 인민전선정부가 항복을 선언하며 내전은 끝났다. 코민테른은 스페인내전에 대해 가장 넓은 사회적기반에 근거한 반파쇼투쟁의 필수적부분, 인민혁명이었고 민족혁명이었으며 반파쇼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
소독불가침조약과 2차세계대전시작
나치독일은 1937.11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합병을 결의했고 1938.3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스웨덴을 침략하면서 유럽정복을 목표로 한 침략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재건을 목적으로 아프리카·중동·발칸반도의 많은 지역을 종속시켜 지중해를 이탈리아의 내해로 편입시키려했으며 일본은 1931 만주사변을 일으킨후 1937.7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략하며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1938.3 소련은 파시스트침략확대저지를 위한 성명을 통해 열강들과 국제연맹등에 실제적조치마련을 위한 논의를 제안했음에도 영국·프랑스등은 집단안전보장정책을 거절하고 독·이·일에 유화정책을 취했으며 1938.9 뮌헨협정을 체결해 파쇼진영이 소련을 침략하도록 유도했다.
1939.3 나치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전역을 점령했고 폴란드침략준비에 돌입했다. 그제서야 영·프는 폴란드·그리스·터키등의 국가적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성명을 냈고 소련과 교섭을 시작했다. 영·프는 히틀러가 발트해연안나라들을 공격할경우 소련이 군사원조제공, 그외 영·프가 안전보장하겠다고 한 나라들에 대한 소련의 군사원조, 반대로 발트해연안등의 나라들은 소련에 아무런 의무를 지지않는다는, 소련이 거부할수밖에 없는 기회주의적제안을 제시했다. 1939.8.11~21 소련의 제의로 진행된 소·영·프3국군사대표교섭에서 영·프가 소련과 연합을 체결할 의사가 없음이 확인됐다. 실제 영국은 소련과 교섭하면서 동시에 나치독일과 비밀교섭을 진행하며 불가침조약·세계적규모의세력권분할협정체결을 히틀러에 제안했다. 그제안에는 소련분할안까지 포함됐다. 소련은 일제에 의해 극동전선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소련은 <전쟁도발자가소비에트국가를분쟁에끌어넣는것을허용하지말라>는 18차당대회지시에 따라 1939.8.23 나치독일이 제안한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소련은 조약체결을 통해 방위준비를 위한 시간을 벌고 두방향에서 전쟁에 끌려들어갈 위험에서 벗어났다.
1939.9.1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며 2차세계대전은 시작됐다. 영·프는 9.3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여전히 독일의 소련침공을 망상한채 적극적군사행동에 들어가지않았고 9.12 영·프최고회의는 대독일전쟁에서 수세적방어전술사용을 결정했다. 서부전선에 주둔한 영·프연합군병력이 독일군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사실상 그 어떤 대응도 하지않았다. 그렇게 1939.9~1940.5 서부전선에는 <가상전쟁>상태가 계속됐다. 1940.5.10 독일은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침공해 파죽지세로 이지역을 점령했고 독일은 이나라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로 진군하면서 <가상전쟁>은 끝났다. 1940.6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프랑스일부지역은 나치독일에 점령됐다. 한편 이탈리아는 영국식민지·반식민지를 장악하려했다. 영국령소말리아·케냐·수단일부를 점령하며 1940.7까지 식민지를 확대했고 그여세를 몰아 이집트를 향해 진군했으나 12월 영국군에 패배하며 아프리카내 거의 모든 식민지를 상실했다.
1940.9.27 독·이·일은 3국조약을 체결하며 서로 모든 가능한 원조를 하기로 결정했고, 다른 한편으로 영국·미국의 접근이 가속화됐다.
독일의 침략과 소련의 항전
1941.4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점령한 나치독일은 6월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기습공격했다. 1940 수립된 대소련침공계획 바르바로사작전에 따르면 작전기간은 1941.6.22부터 12월까지며 목표는 소련의 유럽지역정복이었다. 독일군을 중심으로 한 파쇼군대는 소련을 상대로 병사550만명·190개사단·탱크4300대·항공기5000대·포4만7200문을 동원했다.
소련은 1941.6.30 전연방공산당중앙위·최고회의간부회·소련인민위원회공동결정으로 국가방위위원회를 창설해 국가의 모든 권한, 국무·군경제지도권을 집중시켰고 국가·군시설·당·노조·콤소몰(전연방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조직활동을 통합했다. 스탈린은 7.3 <모든것을전선을위해!모든것을승리를위해!>구호를 들고 대조국전쟁의 정당성을 해설하고 조국방위를 호소하는 라디오연설을 했다.
파쇼군대의 파죽지세에 소련은 초반 고전했지만 소련민중의 영웅적투쟁으로 독일의 <전격전>전략을 분쇄했다. 소련인접지역을 빠르게 점령한 파쇼군대는 레닌그라드·키예프·스몰렌스크·오데사에 접근했지만 소련붉은군대·민중이 전력으로 항거하며 나치독일군 수십만을 전멸시켰다. 소련최고사령부의 군대철수명령과 도시방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소개작전이 있은후에야 겨우 키예프·오데사등을 점령할수 있었다. 한편 파쇼군대는 7월부터 레닌그라드공격을 시작했고 독일군은 9월초 핀란드파쇼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봉쇄했지만 레닌그라드민중들은 2년5개월에 걸친 대봉쇄에도 굴복하지않으며 영웅도시칭호를 받았다.
힘겨운 싸움속에서 소련공산당은 산업·군대·기업들을 서부에서 동부로 이전시키고 전쟁물자를 증산하며 계속 투쟁했다. 1941.7~11 1000만명이상의 사람들과 1360개이상의 대기업이 동부로 소개됐고 전선지역에서 대부분 공작기계류·동력공급시설이 반출됐다.
9월말 독일군은 모스크바총공격을 개시했다. 77개사단중 23개사단은 전차부대·기계화부대였고 독일14개기갑사단은 <타이푼작전>명칭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다. 독일은 민병대로 구성된 붉은군대수십만명을 스몰렌스크·바지마·브란스크주변에서 포위했다. 한편 7월 모스크바시당조직은 12만명에 달하는 12개사단국민의용군을 편성했다. 절반이 공산당원·콤소몰원이었다. 4만2000명이 모스크바대공방위부대·추격대대에 입대했고 50만수도민중들이 방어선을 구축했다. 파쇼군대의 모스크바공격에 다수의 당·정부기관이 소개된 와중에도 전연방공산당중앙위원회정치국·소비에트정부·국가방위위원회·최고사령부등은 모스크바에 남았고 연방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파쇼군대는 모스크바로 진격하지못했다.
소련국가방위위원회는 10.19 수도포위상태를 선언하고 <모스크바를적들의손에넘겨주지말자>고 호소했다. 한편 여름이 지나 가을로 향한 모스크바는 10월말부터 노면이 진흙탕으로 변해 독일의 기동성을 확 떨어뜨렸다. 11월말부터 추위로 노면이 단단해지자 독일기갑사단이 다시 전방으로 진격했지만 소련의 거센 반격에 부딪혀 12월초 수도를 포위하는데 실패했고 동쪽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보급로를 차단하지못했다. -40℃까지 떨어지는 겨울날씨에 히틀러는 결국 동계작전을 중지했다. 이때가 소련군최고사령부가 전쟁주도권을 장악할 기회였다. 1941.12초 칼리닌전선군대가 공격을 가하자 모스크바부근 파쇼세력은 퇴각했고 1942.1초 붉은군대의 공세로 모스크바근교 독일군주력부대가 패배해 후퇴했다. 2월까지 붉은군대는 중앙지역에서 북서쪽의 데미도프, 동쪽의 키로프까지 진격했다.
1942.2.23 스탈린은 역사적인 붉은군대창군기념일연설에서 소련민중들에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며 올해안에 침략자 히틀러무리들에게 완벽한 패배를 안겨줄것이라고 다짐했다.
한편 1942.1.1 소련·미국·영국·중국등 26개국은 파쇼블록을 분쇄하기 위해 군사·경제자원을 동원한다는 선언문을 체결했고 영·미간에는 1943 유럽에서 2전선을 구축한다는 협정이 맺어졌다.
스탈린그라드전투와 쿠르스크전투
1942여름 2차세계대전의 판세를 바꾼 스탈린그라드전투가 전개됐다. 파쇼군대는 모스크바전방전투에서 패배한뒤 볼가쪽을 침공해 카스피해서쪽연안에 위치한 바쿠를 장악하면서 북카프카스와 스탈린그라드측면으로 밀고 들어갔다. 스탈린그라드전투는 10만㎢의 거대한 규모의 지역에서 전개됐다. 붉은군대·파쇼군대에서 200만명이상의 군인과 탱크·항공기수만대, 대포·박격포수만문이 군사작전에 동원됐다. 파쇼군은 50개사단·100만이상군인이 스탈린그라드방면으로 결집했다. 독일의 공격은 1942.7.23 시작됐다.
붉은군대·스탈린그라드민중들은 <한발자국도후퇴하지말라!>구호를 내걸고 결사적으로 싸웠다. 15만노동자·콜호스원(집단농장성원)들이 방어시설을 구축했고 수천명의 공산당원·콤소몰원들이 군대에 입대했다. 9월 전투는 시내로 확대됐고 붉은군대는 파쇼군대의 수백번에 달하는 무자비한 총격을 영웅적으로 격퇴하며 2달가까이 도시를 방어했다. 붉은군대는 볼가·북카프카스지역에서 방어전투, 볼가강연안 루제프, 서부 프스코프주 벨리키예루키지구, 레닌그라드등에서 공세를 이어가며 스탈린그라드방면으로 파쇼군대가 이동할 여지를 주지않았다. 소련공산당은 스탈린그라드근교에서 파쇼군대를 분쇄하고 겨울 소·독전선의 남쪽에서 진격작전을 광범위하게 실시한다는 전략을 세우며 파쇼군대모두를 포위섬멸할것을 붉은군대부대들에 하달했다. 1942.11.19새벽 스탈린그라드반격작전이 시작됐다. 볼가강주변 각부대들이 일제히 공세로 전환했고 11.20 스탈린그라드전선 각부대들이 반격에 나섰다. 11.23 붉은군대의 포위망에 독일6군병력30여만명이 갇혔다. 포위망을 돌파할수 있을거라는 히틀러의 생각과는 달리 포위망은 견고했다. 1942.2.2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독일군이 항복했고 9만군인과 부상자2만명이 붉은군대의 포로가 됐는데 이들 가운데 극소수만 살아남고 거의 전멸했다. 붉은군대·민중들은 <대조국전쟁>에서 전략적주도권을 장악해 2차세계대전승리의 중대한 전기를 마련하면서 대전환을 이룩했다.
1943여름 쿠르스크전투는 2차세계대전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이자 가장 뛰어난 전투로 평가된다. 독일측은 쿠르스크·오롤·벨고로트지역에서 붉은군대를 상대로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50개사단·90만명과 당시 최신무력인 팬저탱크·타이거탱크, 2000대이상항공기·야포1만대, 탱크·자주포2700대를 쿠르스크방면에 대대적으로 배치했다.
50일간의 격렬한 전투에서 소련군은 탱크사단7개를 비롯 30개독일사단을 분쇄했다. 파시스트군은 병사50만명·탱크1500여대·대포3000대·항공기수백대를 상실했다. 쿠르스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붉은군대는 전략적총공세에 들어갔다.
세계곳곳에서의 전투
1937이후 대중국침략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1940.7 <일본에의해주도되고서방세력에게독립된아시아각국의블록>조작을 위한 대동아공영권창설에 들어섰다. 대동아공영권은 프랑스·네덜란드의 아시아식민지를 일본이 삼킬수 있다는 계산하에 수립된것이다. 1940.8 중국화베이지역에서 중국의 항일전쟁중 가장 대규모, 최장기 전투인 바이퇀전투가 전개됐다. 일제가 구축한 산시성·화베이성·허난성을 두른 200㎞에 달하는 철도를 1940.8.8 팔로군이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팔로군부총사령관 팽덕회는 각종 매복전과 돌격전을 전개하며 전략적거점에서 잇따라 승리했고 철도를 철저히 파괴했다. 팔로군의 승리에 광분한 일본은 성곳곳에서 대규모 팔로군소탕작전을 감행하고 중국민중들이 서로 감시·이간할수 있게 보갑제를 실시했다. 팔로군은 일본군을 대상으로 크고작은 전투를 1824차례나 전개해 일본군2만645명·괴뢰군5155명을 사살하고 대포53문을 비롯한 무기를 대규모로 빼앗았으며 철도470㎞·도로1500㎞·교량및연결도로260여곳을 파괴하며 항일전쟁승리를 결정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일본은 1941초 프랑스령인도차이나를 사실상 장악했고 네덜란드령인도네시아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1941.4.13 소·일불가침조약을 체결한뒤 일본내에는 10월 침략적군사행동신봉자 도조히데키를 수반으로 한 정부가 들어섰고 12.7 일전투기가 미국태평양함대를 폭격, 12.10 영국태평양함대를 공격했으며 동시에 동남아시아영토점령에 착수해 6개월만에 필리핀·말레이반도·미얀마·인도네시아·인도차이나·타이를 차지했다. 일본의 미국공격은 미국의 본격적참전으로 이어졌다. 1941.12.11 독일·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대응해 미국도 독일·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1940.8 이탈리아는 그리스침공을 계획하고 10월 실행했다. 그리스가 영국을 지지하고있다는 이유였다. 전쟁초반 병력8만7000명·탱크163대·전투기380대를 투입했지만 이미 전쟁동원령을 내린 상태였던 그리스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이탈리아의 침략을 막아섰다. 11월초가 되자 그리스는 오히려 반격을 시작했고 11.11 영국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전투기21대가 이탈리아주요해군기지 타란토항을 기습공격해 성공했다. 같은날 이탈리아는 영국본토기습에 착수했으나 실패했다. 11.14 그리스는 그리스영토에서 이탈리아군을 완전히 구축했다. 이탈리아의 패배로 스페인파쇼정권은 추축국가입을 포기하고 중립을 선포했으며 그결과 히틀러의 지브롤터해협장악음모도 분쇄됐고 발칸반도를 장악하려는 이탈리아의 야심을 확인한 소련은 추축국에 대한 경계를 더욱 높일수 있었다. 1941.3 무솔리니는 또 그리스를 침략했으나 실패했다.
소련이 2차세계대전의 주전선인 동부전선에서 파쇼군대를 격퇴하는것에 주도권상실위협을 느낀 영국·미국은 소련과 1943까지 서부전선형성할것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북아프리카·이탈리아방면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1942 스탈린그라드전투로 인해 독일군병력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북아프리카전선이 취약해졌다. 독일사단5개·이탈리아사단8개만 주둔해 있는 이곳에 영국군은 탱크·대포·항공기등을 투입해 10.23 공격했고 파쇼군대를 분쇄하며 11월 아프리카에 상륙했다.
태평양에서 1942.6 미드웨이해전, 1943.2 과달카날전투 패배후 일본군의 후퇴가 시작됐고 1943.9 이탈리아는 항복했지만 1944.6 돼서야 2전선(서부전선)이 형성됐다. 이시기 소련은 이미 대부분의 피점령지역에서 파쇼군대를 축출했고 동유럽여러나라·중부유럽나라들을 파쇼군대로부터 해방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반파쇼전선의 승리
1944 붉은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승리했다. 여름공세의 결과 1944.9.4 핀란드파쇼정부는 소련의 휴전조건을 수락했다. 같은해 7월 폴란드민족운동가들은 폴란드정권의 모체가 되는 폴란드국민해방위원회를 건립했는데 소련은 이위원회와 우호적관계를 맺었다. 8월 소·독전선남부지역에서 소련군이 맹공을 펼친 결과 루마니아는 반파시즘세력의 힘으로 파쇼진영에서 탈퇴해 소련과 휴전협정을 맺고 독일·헝가리전쟁에 참여했다.
9월 붉은군대는 불가리아에 진주했고 9.9 무장봉기로 불가리아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반파쇼전쟁에 참전했다. 10월 헝가리정부대표단은 모스크바에서 휴전에 관한 예비협정을 체결했으나 이내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반변했다. 결국 12월 반파쇼세력이 중심이 돼 임시민족정부를 수립했다. 1944여름 붉은군대는 점령당한 지역의 약3/4을 해방시켰고 발칸반도쪽으로 진출해 남동유럽에서의 전투를 지원했다. 6월 2전선이 형성됐지만 독일군의 2/3는 소·독전선에 배치됐다. 그럼에도 붉은군대가 동유럽지역을 쾌속으로 해방시킬수 있었던것은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현명한 영도와 뛰어난 전략·전술에 더해 이지역내 파르티잔이 강력하게 조직돼있어서다. 예컨대 1944상반기 폴란드에는 10개병단이 넘는 소비에트파르티잔이 활동하고있었고 1944중반 붉은군대와 함께 폴란드인부대·체코슬로바키아병단·루마니아사단·유고슬라비아여단이 조국해방을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고있었다. 일련의 사실은 동유럽내 조직된, 공산당을 중심으로 조직된 파르티잔이 곧 반파쇼세력이자 새정권창출의 주역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전쟁승리가 임박하자 영·미는 프랑스남·서부 노르망디에 군대를 상륙시키며 1944.6 2전선을 형성한다. 프랑스내에서는 이미 1943 레지스탕스평의회가 조직됐고 유격전이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반파쇼항전이 가열하게 전개되고있었다. 영·미군은 레지스탕스의 방조를 받으며 프랑스내에서 나치독일을 제거하고 프랑스대부분을 해방시켰다. 1944.8 파리가 해방됐고 1944말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일부가 파쇼에서 벗어났다.
1944.12 독일군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미·영연합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독일서부국경에 인접해온 연합군을 갈라친뒤 기갑사단·공정부대를 투입해 반격을 가하면서 전선 깊숙이 독일군이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영국측이 소련에 구원을 요청했고 붉은군대는 1.12 발트해에서 카르파티아산맥에 걸친 1200㎞광범한 전선에서 마지막일격을 가하는 대공세를 시작했다. 붉은군대는 폴란드·헝가리전역에서 점령군을 소탕하고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지역대부분을 해방했으며 덴마크민중의 나치독일타도를 방조했다.
1945.2 얄타회담에서 국제연합운영절차·전범처리·독일분할관리등의 문제가 논의됐다.
영국총리 윈스턴처칠이 전후패권장악에 골몰하며 소련패망을 목적으로 항복한 나치독일군에 다시 무기를 배급할 준비를 하던 시기 소련은 오히려 맹렬하게 진격작전을 전개하며 전쟁승리를 향해 나아갔다. 1945.4.16 베를린작전이 개시됐고 10여일간의 가열한 전투의 결과 5.1 독일국회의사당옥상에 소련국기가 펄럭였다. 5.8 독일은 무조건 항복문서를 체결했고 9일 붉은군대는 최후작전을 완료했다.
한편 만주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가열하게 전개하던 김일성부대는 1940 전략적과업집행을 위해 대부대작전에서 소부대작전으로의 이행을 결정했다. 이는 인민혁명군역량보존·축적과 혁명역량강화, 아시아에서의 정세완화정책을 실시하던 소련에 대한 국제주의적단결을 위한 조치였다. 1940년대전반기 김일성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은 조국해방3대노선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의총공격·전인민적봉기·인민무장대및소부대의배후연합작전을 제시했으며 1942.7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중국측은 국제연합군창설을 결정했다. 광복전까지 수백개의 인민무장대·반일지하조직들이 항일무장투쟁을 가열하게 전개하고있었고 1945 독일이 무조건항복을 하고 일본은 모든 전선에서 패배하고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3대노선에 따라 최후공격작전준비를 다그쳤고 8월부터 국경요새요충지에 대한 습격전투를 조직했다. 8.9 조국해방최후공격작전명령을 내렸으며 국경요새·두만강조선북부일대를 비롯해 넓은 지역을 조선민중의 힘으로 해방했고 인민무장대·무장봉기조직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결합해 적통치기구파괴투쟁을 과감하게 전개했다.
일본의 패배는 확정적이었음에도 미국은 2차세계대전종전후 세계패권장악을 목적으로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다.
2차세계대전은 세계반파쇼전선의 완벽한 승리로 종결됐고 세계전역은 대고조기에 진입한다. 사회주의소련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동유럽은 사회주의화됐으며 세계각국의 공산당·노동운동세력은 강화되고 식민지·반식민지나라들은 해방되면서 진보정권이 수립됐다. 2차세계대전후 제국주의진영에서 식민지쟁탈전은 사라지고 미제를 정점으로 수직적구조가 형성된것은 제국주의취약성의 반영이다.
2023여름, 3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되는가
2022.2 우크라이나전이 발발했다. 1차세계대전의 시작으로 사라예보사건을 들듯이, 추후역사는 3차세계대전의 시작을 우크라이나전으로 기록할것이다. 미제침략세력이 우크라이나의 군사·정치·경제적권리를 완전히 장악한채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을 전쟁꼭두각시로 앞세우고 폴란드를 전초기지로 삼아 대리전·장기전을 전개하고있는것이 오늘의 우크라이나전이다.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 사실상 러시아와 한뿌리라는점에서 우크라이나전은 해방전쟁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친미신나치세력은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뒤 8년간 러시아계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돈바스지역을 폭격했고 8년간 1만4000여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신나치세력의 돈바스침공이 예고된 조건에서 단행된 우크라이나전은 그렇기에 예방전쟁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러시아군력으로는 마땅히 쾌속으로 마무리할수 있는 우크라이나전이 장기화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민족이 넓은 의미로 같은 민족인 조건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않은채 전쟁을 전개하고있다는점과 함께 미제침략세력과 나토중심의 유럽제국주의가 우크라이나에 천문학적규모의 침략무기를 투입하고있기에 그렇다. 미국·나토의 반러침략책동·합동군사연습이 공공연히 러시아인근에서 감행되고있고 미국의 핵추진항공모함 제럴드포드함이 노르웨이에 입항하고 반러침략기구 나토의 정상회의가 러시아와 초인접한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진행됐으며 러시아의 전술핵이 벨라루스에 배치됐고 바그너민병대가 폴란드공격을 촉구하고있는 여러사실들은 우크라이나전이 동유럽전으로 확대됐다는것을 보여준다.
남코리아전과 대만전은 동시에 터지며, 실제 전쟁이 발발할경우 3차세계대전은 본격화된다. 2023여름 남코리아전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윤석열친미주구정부가 등장한 이래 대규모북침핵전쟁연습이 모두 재개되고 새로운 북침핵전쟁연습들이 감행됐으며 미·일·남<3각군사동맹>이 강화되고 3국핵전쟁연습도 심화됐다. 미제침략세력이 일본을 전초기지화하기 위해 일군국주의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윤석열을 일군국주의세력에게 굴복시키고있다는것은 윤석열의 일제강제징용<제3자변제안>·일본독도영유권궤변묵인·일본초계기논란묵인·일본군성노예제역사왜곡·<적기지공격능력>보유동조·핵오염수무단투기비호등을 통해 여러차례 확인됐다.
4월 미<대통령>조바이든과 윤석열이 발표한, 대북선전포고문에 해당하는 <워싱턴선언>을 현실화하기 위해 남코리아주변에 각종 핵전략자산들이 전개되고있으며 2023.7.18 42년만에 미전략핵잠수함이 부산해군작전기지에 기항했다. 미남연합사령관 폴러캐머라는 켄터키함에 대해 <미국의핵전력3각체계(전략폭격기·전략핵잠수함·대륙간탄도미사일)중아주중요한전략적플랫포옴>·<미국이남에제공하는확장억제의중요구성요소>라고 언급했다. 켄터키함출항 3일만인 7.24 미국LA급핵추진잠수함 아나폴리스함이 제주해군기지에 입항해 북을 겨냥한 대잠전연습을 실시했다.
북의 입장은 단호하다. 7.12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발사관련 담화를 발표한 김여정당중앙위원회부부장은 17일 <미국의특등앞잡이인<대한민국>과세계악의제국인미합중국을상대로장기전략을세워야하며압도적인억제력에기초하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전망적인안전담보체계를구축해야한다>며 <며칠전미국이우려스럽게목격한것은이미개시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군사적공세의시작일따름>이라고 경고했다. 북은 19일 단거리탄도미사일, 20일 미전략핵잠수함의 부산항기항이 핵무기사용조건에 해당될수 있다고 강조한 국방상담화, 22일 순항미사일여러발발사, 25일 탄도미사일2발발사를 통해 군사대응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대만전가능성도 매우 높다. 중국은 2022.8.2 미연방하원의장 낸시펠로시의 대만방문에 맞춰 96시간 대만해방전쟁연습을 실시했고 2023.4.9 <날카로운칼>연합훈련을 통해 72시간 대만해방작전연습을 전개하며 대만전이 임박했다는것을 보여줬다. 6.30 미언론에 따르면 미국은 대만에 4억4000만달러규모의 침략무기판매를 승인하며 중당국을 향해 전쟁도발을 했다. 한편 미정보당국고위자는 <미정부가유사시대만거주자국민들을위한대피계획을수립하고있다>고 언급하며 대만전이 가까워졌다는것을 드러냈다.
남코리아전·대만전가능성은 미정객의 말·행동으로도 확인된다. 7.22 마크밀리미합참의장은 코리아반도가 <상황에따라며칠안에전쟁상태에빠질가능성이있는지역>이라고 언급했고 소련붕괴에 기여했던 미국무장관출신이자 미제침략세력의 대리인 헨리키신저가 오바마시기국무장관이었던 존케리에 뒤이어 중국을 방문했다. 대리전·비핵하이브리드전의 한계를 합의하기 위한 막후협상일것이라는 합리적추정이 제기되고있다.
최악의 군사·정치·경제적위기상황을 <신냉전>체제조작과 3차세계대전으로 모면하려는 제국주의침략세력의 전쟁책략이 유사이래 가장 강력한 군사·정치적위력과 전략·전술적협동관계를 보여주는 반제자주세력에 의해 분쇄되는것은 필연이다. 세계인류는 반제대전으로 전개되는 3차세계대전의 승리와 제국주의침략세력의 결정적패배, 20세기대고조기를 잇는 새로운 대고조기를 앞두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