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자료에 따르면, 해방직후 북에는 현대적인 군사과학과 기술로 무장한 군사정치간부가 부족했고 정규무력건설에 필요한 물질적토대도 매우 미약했다. 일부사람들은 소련군대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군대를 조직할 필요가 없다거나 외국의 원조가 없이 자체의 힘으로 정규군을 창설할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아직 남북이 통일되지못한것을 정규무력건설반대이유로 들기도 했다. 김일성주석은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자신의 힘으로 정규화된 혁명군대를 건설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항일혁명투사들을 정규무력건설사업에 우선적으로 파견했다. 1945.10.2 평양시 평천리 병기제조소자리를 돌아보고 군사일군들에게 강력한 정규무력건설에서 중요한것은 모든 군인들을 현대적무기와 군사장비로 튼튼히 무장시키는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체의 병기공업을 창설하고 발전시켜야한다고 말했다. 군사정치간부양성사업에 선차적인 힘을 돌려 1945.11.17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 지울리에 첫군사정치간부양성기지로 <평양학원>을 건설하고 1946.1 1기첫강의에 직접 나섰다. 1946.4 평양학원을 모체로 군사지휘관을 전문적으로 키워내는 중앙보안간부학교가 나왔다. 평양학원에 새로 항공반이 증설됐으며 1947.7 첫해군간부양성기지인 수상보안간부학교가 창립됐다. 당은 항일혁명투사들을 골간으로 하고 평양학원졸업생들을 핵심으로, 해방직후 각지에 조직된 보안대·철도경비대·국경경비대를 토대로 보안간부훈련소를 조직했다. 1945.12 조선항공협회건설을 결정하고 1947.8 평양학원 항공반졸업생들과 항공기술자들로 첫비행대가 조직됐으며 1946.6 해상경비임무를 수행하는 수상보안대가 조직되며 현대적해군무력창설의 토대를 마련했다. 1947.6 첫병기공장을 건설하고 자체의 힘으로 여러가지 무기와 군사장비들을 생산하게 됐다. 1948.2.4 북조선인민위원회58차회의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안에 혁명무력에 대한 군사정치적지도를 전문적으로 맡아 수행할 민족보위국을 내오고 국장으로 김책을 임명했다. 북의 자료들은 김정숙여사도 평양학원과 중앙보안간부학교에서 군사정치간부양성사업과 각군종·병종부대들의 조직, 군대의 무장장비등 군건설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당의 건군노선을 실현하는데 공헌했다고 밝히고있다. 1948.2.8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적혁명무력인 조선인민군으로 강화발전시켰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