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국제당이 엥겔스서거이후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사상에 장악되면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국제주의운동에서 원칙적세력으로 그입장을 명백히 해왔으며 1차세계대전에서 국제주의운동에 결정적역할을 했다. 그진리성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10월혁명을 승리하는것으로 실천적으로 확증되면서 레닌주의가 국제주의운동에서 지도력을 갖게 됐다. 1899 레닌의 <러시아자본주의의발달>은 짜르를 반대하고 농민을 혁명의 기본역량으로 보고 테러주의에 경도된 나드로니키주의에 대한 투쟁의 총결산이었다고 할수 있다. 레닌은 또 1895 저서에서 <합법적맑스주의자>들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레닌은 <무엇을할것인가?>(1901)를 통해 경제주의를 사상적으로 비판분쇄하고 사회주의정당들이 의회활동에 급급하면서 노동자대중을 혁명에 준비시키지못했다는것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계급의 당이 필요하다는것을 밝히고 그당의 활동원리들을 해명했다. 1903 러시아사회민주당2차대회에서 강령과 규약을 마련하는 과정에 당원자격에 관한 문제가 쟁점이 됐다. 당지도기관선거에서 마르토프일파가 레닌의 제의를 보이콧하면서 레닌파가 다수가 됐다. 이에 따라 레닌파는 볼셰비키(다수파)로, 반레닌파는 멘셰비키(소수파)라고 불리게 됐다. 이후 레닌주의당중앙위가 구성됐다. 회의이후 1904.5 레닌은 <일보전진,이보후퇴>에서 멘셰비키의 당원자격등 조직문제에 관한 기회주의적입장을 폭로·비판했다. 마르토프의 제의는 2국제당의 수정주의자들의 개방론에 의지된것이며 이를 승인하는것은 아이제나흐파가 겪은 <당의퇴화>를 답습하는것이자 당원자격에 관한 문제는 당을 노동계급의 조직된 전위부대로 꾸리는 문제였다. 1905혁명에서 1907 스톨리핀정부의 반동기에 들어서자 멘셰비키중에서 지하조직과 합법적당의 존재마저도 <청산>하려한 이들이 나타났고 볼셰비키의 동요분자중에 의원들의 소환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레닌은 양자사이에 원칙을 견지해 투쟁했다. 볼셰비키는 청산파의 청산을 위한 투쟁에서 1912.1 청산파를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자 트로츠키가 나서 그들과 <8월블록>을 조직했다. 멘셰비키는 1917혁명에서 2월혁명을 소비에트의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것을 보지못하고 부르주아임시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우경기회주의입장에 섰다. 한편 레닌은 제국주의전쟁시기 기회주의자들의 오류로 국제주의운동의 좌절과 혼란을 겪는 과정에 올바른 노선을 밝히기 위해 국제회의를 소집했다. 1915.9 짐머발트회의와 1916.4 스위스키엔탈에서 레닌은 제국주의전쟁을 반대하고 그것을 국내혁명전쟁으로 전환시킬것을 밝혔다.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한 후 레닌은 새로운 국제당을 창건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시켜 1918.1 뻬쩨르부르그에서 국제회의를 소집하고 국제당의 조직원칙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어 1919.1 2차회의를 소집하고 1919.3.2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진행됐다. 코민테른1차대회에는 30개 나라 35개 당·단체의 대표52명이 참가했다. 1919 헝가리, 독일의 바이에른, 슬로바키아에 소비에트공화국이 출현했고 중국·인도·베트남·이집트등 식민지반식민지나라들의 민족해방운동이 장성하고 이나라들을 포함해 자본주의나라들에서 혁명적당들이 창건돼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레닌은 국제당의 가입조건과 규약을 채택해 국제당을 조직사상적으로 강화했으며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