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주의운동에서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10월혁명과 레닌주의는 인류역사의 첫사회주의혁명이 1국적범위에서 실현된것으로 맑스레닌주의의 승리로 됐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이스크라파를 조직해 볼셰비키당을 세운 뒤로 줄곧 멘셰비키의 중간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종파적으로 행동했다. 1912.1 멘셰비키의 청산파가 당에서 제명당하자 트로츠키는 그들과 <8월블록>을 조직했다. 트로츠키는 1917 혁명시기 이뤄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6차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트로츠키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거치지않고 단번에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며 덮어놓고 세계혁명에로 나아가는 <영속혁명론>을 들고나와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는 <유럽합중국>으로 연합된 유럽나라들에서 동시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소련의 <1국사회주의>건설을 계속 시비했다. 스탈린의 영도하에 소련사회주의건설이 계속되자 공업화를 반년동안에 실시해야한다며 농민을 <식민지적으로수탈>하고 노동자들은 <나사못을조이듯>이 숨돌릴틈을 주지말아야한다는 <초공업주의>를 주장했다. 사회주의하에서 생활향상이 사회적부패와 변질을 가져온다며 인민생활향상을 반대하고 <평등화>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노농동맹을 훼손해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기초를 무너뜨리려는 책동이었다. 또 트로츠키는 독재와 민주주의를 대치시키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비방·중상했다. 레닌의 서거뒤 스탈린과 국제주의자들은 1924 5차대회, 1928 6차대회등을 통해 트로츠키·부하린·지노비예프등의 기회주의노선을 배격하고 맑스레닌주의의 순결성을 고수하고 국제당을 조직사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트로츠키파는 지노비예프파와 함께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사회주의를 인정하지않고 봉기를 조직했다. 1926 트로츠키는 직접 공개적인 대중선동을 벌였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됐으며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1929 추방됐다. 추방된 뒤 트로츠키는 유럽에서 반소련활동을 벌였으며 1938.9 코민테른에 반대해 <4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4인터내셔널>은 국제주의운동의 단합을 방해하고 각국공산당원들을 분열와해시키는데 주력했다. <4인터내셔널>은 1956.10 헝가리반사회주의정권시위에 지지를 표하며 호소문을 보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는 정치조류가 아니라 해독분자·파괴분자·탐정·간첩·암해분자의 무원칙하며 무사상적인 도당이며 외국첩보기관에 고용돼 행동하는 노동계급의 원수들의 도당이라고 밝혔다. 1934.12.1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지구당1서기 키로프가 트로츠키파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료에 의하면 1938 반소비에트<우파트로츠키블록>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트로츠키·부하린과 그들의 공모자들은 1918 레닌·스탈린·스베르들로프를 살해하고 부하린·트로츠키파·사회혁명당좌파로 새정부를 구성하고 독일과의 강화담판을 파탄시켜 독일제국의 진격을 초래해 독일제국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소비에트정권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제당은 각국공산당들을 과학적이며 혁명적인 전략전술로 무장시키고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국제당은 혁명운동이 세계적범위에서 폭넓고 다양하게 발전하고 각국이 각국의 특성에 맞게 사회운동을 전개하고있는 상황에서 2차세계대전의 전략전술적요구에 따라 1943.5.15 해산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