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항쟁의기관차〉 국제주의운동의 경험과 현대수정주의의 교훈

현대수정주의는 사회주의집권당에서 나타났다. 소련사회주의는 인류의 첫사회주의정권으로 국제주의운동에서 남다른 상징성과 위상을 갖고있었다. 스탈린은 2차세계대전의 반파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여러나라에서 사회주의·민족해방혁명이 이뤄졌다. 스탈린의 사후 소련에서는 사회주의에서는 허용될수 없는 권력찬탈이 진행됐다. 흐루시쵸프는 우선적으로 소련과 혁명, 혁명의 지도자에게 충실했던 베리야에 반당반혁명음모죄등을 씌워 처형했다. 다음으로 스탈린의 후계자로 당과 내각의 수반이었던 말렌코프를 단계적으로 밀어냈다. 흐루시쵸프는 1956.2.14 소련공산당20차대회보고에서 <평화적공존>을 소련의 대외정책의 총노선으로 규정했다. 또 그에 근거해 자본주의나라들에서 사회주의에로의 <평화적이행>노선을 제출했다. 당시 소련신문방송은 이를 <레닌적노선>이라고 둘러댔다. 이런 경향성은 1962 카리브해위기로 이어졌다. 카리브해위기는 국제주의운동에서 지울수 없는 치욕을 안겼다. 흐루시쵸프의 수정주의노선에 기대를 가진 프랑스공산당·이탈리아공산당·브라질공산당·칠레공산당등이 폭력투쟁을 포기하고 의회주의노선을 취했다. 브라질에서는 브라질공산당이 안일하게 있는 사이에 군부반동들이 1964.3 굴라르트부르주아개혁정권을 전복하고 수만명의 혁명가들과 진보적인민들을 투옥·학살했고 칠레공산당은 1964.9 대선에서 실패했다. 20차대회에서는 스탈린격하의 보고가 이뤄졌다. 이는 선대지도자들의 성과, 업적을 부정하는것이며 소련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흐루시쵸프는 사회주의나라형제당들에 자기의 수정주의노선을 강박해 폴란드·헝가리등의 일련의 나라들에서 당·정부일군들이 <스탈린주의자>로 몰려 강직·축출됐다. 1964초 흐루시쵸프는 모든 정치세력의 합법화, 자본주의나라의 분권주의, 복수입후보제 직접선거, 대통령제등 국가정책의 주요결정들에 대한 당의 권리를 배제하는 새로운 헌법초안작성사업을 제기했다. 또 그의 독단적전횡이 고위간부들의 불만을 낳았다. 그는 대부분의 공화국·주1비서들을 우크라이나시기 자기측근들로 채우고 사위를 내세워 자기의 개인대표로서 다른 나라의 수반들과 로마교황까지 만나 막후회담을 진행하게 하고 그결과는 당중앙위상임위까지 비밀로 했다. 결국 10.13 중앙위상임위와 10.14 중앙위전원회의에서 흐루시쵸프는 해임됐다. 이를 계기로 그의 수정주의이론의 정책은 전면적으로 비판됐다. 그러나 그의 수정주의노선은 1980년대중엽 현대사회민주주의로 이어졌다. 이전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개량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이행을 주장했다면 현대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개혁><개편>의 방법으로 시정해 사회주의를 완성한다고 하면서 자본주의로 복귀하는것이다. 이들은 사회주의나라들에 부르주아자유화와 다당제, 자본주의사적소유와 시장경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결국 소련붕괴로 이어졌으며 그이후 소련과 동구에 정치불안 사회불안이 뒤덮었다. 러시아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 권한문제를 놓고 치열한 권력분쟁이 벌어졌으며 1993 <10월사변>이 발생해 15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주도자들은 구속됐다. 우크라이나에서도 권한문제로 오랫동안 대립이 계속됐고 타지키스탄에서도 3년간의 싸움끝에 1995.5 평화회담을 진행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등에서도 분쟁이 벌어졌다. 1993 한추산자료에 의하면 구소련지역에서 발생한 민족간분쟁은 164건이며 그중 약30건이 무장충돌로 번졌다고 한다. 유고슬라비아연방도 해체된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분쟁, 코소보분쟁등 발칸반도에서 첨예한 정세를 조성했다. 사회주의나라들의 자본주의로의 복귀는 해당나라의 민중들의 삶, 운명을 좌우하면서도 국제주의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일시적이나마 좌절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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