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 항쟁의기관차〉 외교와 군사에서의 첨예한 대결

베트남전으로 궁지에 몰린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으로 소련을 견제하고 베트남에서의 곤란한 처지를 피하려했다. 그런 정세에서 닉슨의 방중과 함께 남북관계개선도 추진됐으나 1972 10월유신, 1973 김대중납치사건등이 벌어지면서 대화는 중단됐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3세계 블록불가담운동이 장성했다. 1975 북과 남이 동시에 블록불가담운동가입을 추진했다. 남의 가입은 거부됐으며 북의 가입이 결정됐다. 이해 11.18 30차유엔총회에서 남코리아의 유엔사해체와 미군철군등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됐다. 1976.8.16부터 진행된 5차블록불가담운동정상회의에서 북은 주남미군철군문제와 미국핵무기철거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8.17 유엔성원국들은 주남미군철수와 남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거시키는 대미결의안을 9월 열릴 31차유엔총회에 상정했다. 이를 앞둔 8.18 판문점<미루나무>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이 발생하자 백악관에서는 워싱턴특별대책반이 소집됐으며 미국무부와 함께 <이사건의결과로빚어지는어떠한사태에대해서도그책임은북에있다>는 공동성명을 당일 발표했다. 미국은 판문점에서 오랫동안 키워졌던 미루나무 한그루의 벌목을 위해 <폴버니언>작전을 세웠다. 거기에 F-4·F-111·B-52폭격기·미드웨이항공모함등을 동원하는 대규모무력시위계획이 수립됐고 전투준비태세<데프콘3>이 발령됐다. 판문점사건 다음날 열린 군사정전위본회의에서 미국은 김일성주석에게 공식적으로 구두메시지를 보냈으며 북은 그에 대한 답장으로 통지문을 보냈다고 한다. 처음에 미국은 잘못을 인정한것이 아니라며 반발하다가 하루만에 태도를 바꾸면서 <사과설>을 조작했다. 이는 전면전으로의 확대를 피하기 위한 키신저의 꼼수였다. 미국은 미국이 먼저 김일성주석에게 구두메시지를 보낸 사실도 숨겼다. 당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판문점사건에 대해 <응당한자위적행동이며자랑할만한영웅적행동>·<우리인민과영웅적인민군대의전투적기상을높이보여주었다>고 치하하고 미군경비병들을 공격한 조선인민군경무원들을 크게 표창했다고 한다. 판문점사건직후 북은 대규모소개작전과 선제기습타격준비를 갖추면서 전면전태세에 돌입했다. 판문점사건으로 미국은 유엔총회의 결의안통과를, 북은 제국주의침략세력의 전쟁도발을 막았다. 1975 유엔사해체결의안이 통과됐지만 미국은 1978 미남연합군사령부를 설립해 남의 군대와 주남미군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는 꼼수를 썼다. 유엔사에는 군사정전위·중립국감독위·판문점주둔공동경비구역경비대대·비무장지대경계초소운영과 북과의장성급회담등 정전협정관련임무만 남겨뒀다. 유엔총회의 결정은 이행되지않고있는 반면 미제의 판문점사건은 코리아반도에 우리민족의 희생을 강요하는 또다른 전쟁을 불러올수 있었다. 

- Advertisement -
The World Anti-imperialist Platf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