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정권붕괴로 미국의 대남신식민주의정책이 파탄났고 <혁신세력>의 장성강화는 미국의 대남지배전략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미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을 내세우는 한편 전시(展示)정책으로 경제부흥을 추진하도록 했다. 미는 여기에 남일관계를 엮어 미일남3각체제를 획책했다. 북은 조국통일의 역량강화에서 이미 주권을 틀어쥔 북반부를 강력한 기지로 튼튼히 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를 위해 북의 정치적역량·경제적역량·군사적역량을 모두 강화해야한다고 봤다. 북은 사회주의적생산관계개조를 선행한 조건에서 사회주의공업화로 나라의 경제발전,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현대수정주의노선을 취한 소련사회주의가 1962 쿠바미사일위기를 초래했다. 미국에 의해 야기된 분쟁이었지만 소련은 쿠바를 군사적위기에 처하게 두고 퇴각했다. 이를 계기로 북은 경제국방건설병진노선을 제기하고 사회주의공업화의 경제건설을 다그치면서도 국방건설을 소홀하지않도록 견지했다. 1966 조선노동당2차대표자회에서는 이노선을 확인하고 원래 계획했던 인민경제7개년계획의 목표를 3개년 연장했다. 전쟁이후 북은 평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도 전략적으로 무장력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핵·미사일개발에 주의를 기울였다. 중국도 1964 첫핵실험에 성공했고 1970까지 수소탄·인공위성개발까지 완성했다. 국제정세는 1964 베트남전쟁으로 치달았다. 미군은 코리아주변정세도 격화시켰으며 북은 1968.1 푸에블로호정찰함을 동해에서 나포했다. 1968.12 1년가까운 협상을 거쳐 승무원들은 본국으로 송환됐다. 이듬해에는 미해군의 EC-121정찰기가 동해상에서 격추됐다. 승무원 31명전원이 사망했다. 소련은 협상으로 미제와 타협했지만 북은 미제침략무력의 군사책동에 단호히 대응했다. 북은 코리아전쟁당시 미해군의 상륙작전과 미공군의 폭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미공군은 B-29폭격기등으로 북전역을 폭격해 도시건물의 85%를 파괴했으며 미군은 정밀폭격을 실시했다고 했지만 사실상 무차별적폭격이었다고 한다. 1950.9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작은 섬에 불과한 월미도에 소이탄93발을 투하하고 항모와 상륙함등 261척과 7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북의 방어병력은 400명에 견인포7문이 전부였다. 이들은 3일간 상륙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관철했고 조선인민군의 전략적후퇴를 보장했다. 전쟁이후 북은 대함미사일<금성>과 대공미사일<번개>를 개발하고 나라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했다. 이무기체계가 푸에블로호사건당시 미함대를 견제하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베트남전의 코리아전으로의 확대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