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국방위원장이 1991.12.24 조선노동당중앙위6기19차전원회의에서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됐다. 북의 자료들에서는, 당시 조성된 정세는 사회주의수호전이 역사의 온갖 반동들과의 사상과 신념의 대결인 동시에 격렬한 군력의 대결임을 보여주고있었다면서 김일성주석은 이 격렬한 반제대결전에서의 승리의 결정적요인은 무적의 강군으로 자라난 인민군대를 필승불패의 대군으로 이끌어갈 군영도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데 있다고 보고 김정일국방위원장에 대해 <혁명무력의최고사령관다운불굴의의지와담력,뛰어난지략과영군술>을 지니고있다며 여기에 혁명무력의 끊임없는 강화발전과 백전백승의 담보가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일성주석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1960년대말1970년대초부터 인민군대사업을 맡아 지도하게 했고 1970·80년대 인민군대에 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당적, 군사적 영도체계를 확립하도록 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을 1980.10 당6차대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위원으로, 1990.5 최고인민회의9기1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1부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북에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에 추대됨으로써 건군위업계승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밝히고있다. 1992.4.25은 조선인민혁명군창건60돌이며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최고사령관이 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건군절이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날 열병식에서 최고사령관으로서 <영웅적조선인민군장병들에게영광이있으라>며 전체 열병부대들에게 축하를 보냈다. 이듬해 1993.3 북침핵공격연습 미·남합동군사연습<팀스피리트>가 재개되자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최고사령관으로서 <준전시상태>를 선언하고 당시 군사대결전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북은 3.12 NPT(핵전파방지조약)탈퇴를 선언했고 5월말에는 첫탄도미사일시험발사를 단행했다. 6.11 북미뉴욕고위급회담으로 북은 미국과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NPT탈퇴시한을 앞둔 시점이었고 공동성명의 발표와 함께 북은 탈퇴를 유예했다. 그러나 1994 김일성주석서거이후 미국은 미·남합동군사연습<을지포커스렌즈>등 군사공세와 경제제재를 더욱 강화하며 북을 고립압살하려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전례없는 난관앞에 인민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내세우고 그에 의거해 혁명과업을 수행해나갈 결심을 세우고 선군정치방식을 확립했다. 이는 2000년대 과학기술과 국방공업에 기초해 핵·미사일개발등 무장력의 첨단화·현대화를 이끈 바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