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 항쟁의기관차〉 완성되지못한 일본군국주의청산

일본은 1차세계대전기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세력권을 확장하면서 비대해졌다. 독점체들의 전시이윤율이 일반적으로 10~13%를 기록하는데 비해 1918 해운업 191.6%, 선박제작공업 166.6%, 면방직공업 115.9%에 달했다. 수출이 증대하고 해외투자가 늘었으며 공업총생산이 5배 장성했다. 독점재벌들은 비대해진 반면 일본의 노동자·농민들은 극도로 곤궁해졌다. 1918.7~9 일본에서는 전국 3개부 33개현에서 <쌀폭동>이 일어났다. 1922.7 일본공산당이 창당됐다. 한편 일제는 소비에트러시아지역에 반소련무장간섭에 나섰다. 1923.6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켰으며 9월 간도대지진을 계기로 계엄령을 발포하고 재일조선인들을 학살했다. 1925 치안유지법을 조작했다. <국가제도를변혁하거나사유재산제도를없앨목적을가진> 일체 조직들의 운동을 금지하며 이를 위반하는 자들을 10년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1928 일제는 이법을 개악해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사소한 혐의에 대해서도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이해 3.15 전국적으로 공산당원들과 그지지자들 1000여명을 검거하고 그중 480명을 치안유지법에 의거해 기소했다. 4월에는 노동농민당을 금지·해산했다. 일제는 이법을 식민지조선에도 그대로 적용해 1930 한해동안에만 3만8793명을, 1938에는 16만5300여명을 검거·투옥했다. 일본은 1927 일본쇼와금융공황으로 더욱 반동화됐다. 다나카내각을 구성하고 노동운동과 민주주의운동을 탄압했으며 1927.7 군사침략계획 <다나카상주서>가 제출되고 중국침략을 본격화했다. 일본은 9.18사변뒤 6개월도 채 안돼 전만주를 강점했다. 1936 일본에서는 군부독재에 의한 파쇼정치체제가 확립·강화되고 <북진론>과 <남진론>을 재확인하며 당면해 중국본토에 대한 전면적침략을 결정했다. 1937 중일전쟁으로 이어졌으며 1940.7 2차고노에내각이 수립될때 외상 마쯔오카는 <대동아공영권>건설이 일본<외교방침의기본>이라고 공개표명했다. 이는 아시아지역에 미·유럽제국주의국가의 식민지를 직접적으로 겨냥한것으로 이들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됐다. 1941.12 일본은 진주만을 습격해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을 감행했다. 침략과 약탈로 유지되는 경제는 침략과 약탈을 위한 전비지출을 필요로 하고 이로인해 다시 침략과 약탈을 요구한다. 침략과 약탈, 파쇼만행으로 유지되는 사회는 반드시 패망한다. 일제는 소련의 남하와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각국의 민족해방세력의 진출로 패망의 길로 가고있었다. 미국은 사회주의·민족해방세력의 세계적장성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일본이 패망하기전 원자탄을 투하해 전세계 민중들에게 미제국주의가 가진 가공할 파괴력의 신무기를 시위했다. 그결과 일본은 독일과 같은 분단을 피했고 미제국주의의 비호에 따라 일본군국주의세력이 되살아났다. 자본주의의 전반적위기와 제국주의국가간 모순 심화로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으며 첫사회주의국가가 출현하고 세계적으로 진보세력이 장성강화하자 독·이·일파쇼세력은 진보세력을 말살할 체제로 등장했다. 미국을 위시로 한 제국주의세력은 파쇼세력의 파괴적만행에 일시적으로 국제적인 반파쇼전선에 함께 했으나 파쇼세력을 제압한후에는 진보세력의 진출을 반대해 매카시즘식파시즘과 냉전을 획책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반제전선의 과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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