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 항쟁의기관차〉 지중해제국 노린 무솔리니의 처참한 몰락 

이탈리아는 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지만 큰 이득 없이 이탈리아동북부지역이 황폐화되고 상선의 50%를 잃었다. 또 약70만명이 전사했고 100만명이상이 상해를 당했다. 전쟁시기 금속기계제작·화학공업들이 일정하게 발전해 농업국에서 농업공업국으로 되고 생산력이 높아졌으나 판매시장을 갖지못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된 1920 경제공황에 빠졌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생각에 지중해연안의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와 알바니아등에 대한 제국주의적영토팽창요구를 내세웠다. 이탈리아에도 러시아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으로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이 장성했다. 그러나 노동총동맹의 개량주의적지도부는 1919~22 내각이 5번이나 교체되는등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이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지못하게 했다. 무솔리니는 1919.3 <이탈리아전투자단>을 조직한데 이어 1921.11 <국민파시스트당>으로 바꾸고 <파시스트강령>을 채택했다. 1920.10 6만여명의 예비역장교들이 <흑셔츠단>에 가담하고 1920.11 사회당좌파가 지도하는 볼로냐시정부를 무장공격한것을 시작으로 각지의 공산당·사회당·노동조합·농민조합청사들을 습격·파괴하고 그성원들을 학살했다. 이들의 범행은 정부에 의해 묵인됐고 반면 저항하는 노동자·농민들은 체포돼 처벌받았다. 1922 파시스트대열은 80여만명에 이르렀다. 무솔리니는 1922.10.30 <로마진군>시위를 벌였다. 이미 전날 엠마누엘3세가 무솔리니를 내각수상으로 임명했으나 이들은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려했다. 1922~24 무솔리니는 전시이윤조사위원회해산·직접세인하간접세인상·근로자들의임금인하등의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1923초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투옥했다. 이탈리아공산당은 1921 창당됐는데 그람시를 선두로 한 공산당은 파쇼정부를 반대하는 총파업을 호소했으나 다른 당들의 거부로 실현되지못했다. 1923 무솔리니는 선거법을 개악하고 1924 총선을 날조해 1925 파시스트당의 1당독재정부를 수립했다. 이해 미국모건상회는 무솔리니정부에 1억42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1925~26 파업금지령·출판의자유박탈등 악법을 조작하고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했다. 또 비밀경찰(반파시스트진압의용단)을 창설하고 특별재판소와 사형제도를 완비했다. 1929 무솔리니는 라텐란협약을 맺어 바티칸시국을 인정해주고 카톨릭교회의 지지를 얻었다. 1935.10 에티오피아를 무력침공하며 해외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에티오피아에 유독성물질과 독가스를 사용하고 주민지대를 폭격해 27만5000여명을 학살했다. 무솔리니파쇼정권은 미·영·프로부터 전략원료와 무기를 원조받은 1936.6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이탈리아령소말리아를 합쳐 이탈리아령동부아프리카를 조작했다. 그러나 1939 알바니아를 점령한 이후 이탈리아는 세계4위의 해상무장력이 무색하게 2차세계대전에서 연전연패했다. 국내민중의 반파쇼투쟁의 앙양으로 이탈리아국왕과 군부·독점자본세력은 시칠리아섬에 상륙한 미영제국주의연합군에 항복하고 무솔리니를 1943.7 파면·감금했다. 무솔리니는 9월 독일군에 의해 구출됐으나 1945.4 이탈리아저항군(레지스탄자)에 체포돼 4.28 북부이탈리아민족해방위원회군사재판소판결에 의해 총살됐다. 분노한 이탈리아민중들은 그의 시신을 밀라노광장에 매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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