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항쟁이후 군사파쇼정권이 아니고서는 친미사대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벌이고 이승만정권의 부패세력청산도 내세웠지만 4.19정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있던 혁신세력을 탄압했다. 1961.6 국가재건최고회의산하로 파쇼통치기구인 중정(중앙정보부)을 설치하고 1961.7 찬양·고무등, 회합·통신등, 탈출·잠입등, 편의제공등을 규제하는 반공법을 제정했다. 이는 1980년대 국가보안법에 통합됐다. 중정은 1962.3 정부의 직속기관이 됐다. 미국은 1951.9 일본과의 강화조약체결이후 동북아의 지배질서로 미일남3각군사동맹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남일간 관계정상화를 추진했으나 결정적인 고리를 풀지못하고있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1말 일본과 미국을 연속방문해 이러한 미국의 지역지배전략에 걸린 문제를 풀려는 의지를 보였다. 1964.6 남일협정을 추진했으나 반대시위가 광범하게 벌어지면서 위기에 처했다. 1964.8 인혁당사건을 날조하고 1965.6 남일협정을 체결했다. 미남은 전쟁직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부터 합동군사연습 <포커스렌즈>를 매해 실시했다. 베트남전으로 곤경에 처한 미국은 1969 닉슨독트린의 발표를 앞두고 <포커스레티나>를 실시했다. 1971에는 <일본대역론>을 내세우고 일본에 오키나와반환을 결정했다. 이를 앞두고 박정희는 이해 신년기자회견에서 <일본대역론>을 언급하며 그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면서도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이해 미국은 합동군사연습을 <프리덤볼트>로 바꾸고 미7사단을 빼 베트남전에 배치했다. 1976에는 20만~30만명의 대규모군병력과 다양한 핵투발수단들이 동원되는 세계최대규모의 핵공격야외기동군사연습인 <팀스피리트>가 시작됐다. 같은해 <을지훈련>과 <포커스렌즈>를 통합해 <을지포커스렌즈>미남합동군사연습을 시작하는등 대북전쟁책동의 도수를 높였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획책하고 야당인사들과 민주화운동세력을 탄압해 집권을 연장했다. 집권기간이 길어지면서 권력층내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박정희정권을 반대하는 반파쇼민주화투쟁도 고조됐다. 박정희는 1979.10.26 김재규중정부장에 의해 피살됐다. 김재규는 중정부장으로 미CIA(중앙정보국)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위치였으며 박정희피살당일 14시경에도 글라이스틴주남미대사와 만난 사실이 알려졌다. 박정희군사정권은 전두환군사정권으로 이어졌다.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권좌를 차지한 전두환은 1980년대 미국과 함께 북을 테러국가로 조작하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했다. 남코리아반파쇼운동의 성장과 함께 군사정권은 패망의 길에 있었으며 1987 6월항쟁으로 군사정권 자체를 유지할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