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 항쟁의기관차〉 친미예속정권을 무너뜨린 구국항쟁

이승만정권은 미제의 대코리아전략관철을 위한 정권으로 탄생했다. 이승만정권은 태생적으로 경제위기와 민생파탄을 해결할수 없었고,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파쇼통치에 매달렸다.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향한 민중들의 염원을 짓밟으며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자연히 이에 반대하는 민중의 투쟁이 들불처럼 퍼졌다. 1958~59 노동자들투쟁은 390건, 농민들투쟁은 320건에 달했다.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2.28 대구학생의거, 3.15 마산의거로 시작된 항쟁은 단숨에 서울·부산·대구·광주·전주·대전·인천등 전국으로 확산됐다. 4.19 서울의 청년학생들·시민들 10여만명은 <썩은정치물러가라>·<이승만정권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이승만파쇼통치기반인 <자유당본부>·<특무대>·<반공회관>, 어용신문사인 <서울신문사>, 이승만거처인 <경무대>, <중앙청>, 주남미<경제협조처>등을 타격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민중항쟁은 남전역으로 확대돼 거의 모든 도시와 농촌에서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군인들일부까지 나서며 수백만의 군중이 참가했다. 4.26 이승만정권은 드디어 무너졌다. 이는 코리아전후 민중투쟁에서 이룩한 첫승리였다. 4월항쟁은 미국과 그식민통치밑에서 오랫동안 쌓였던 민중분노의 폭발이었다. 또 남전역에서 수백만명의 광범한 민중이 참가한 대중적인 구국항쟁이었다. 4월항쟁은, 민중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미군철거·보안법등 식민지배체제를 청산해야하고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등 광범한 민중을 이끌 변혁적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1960.11.24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이 창당됐다. 사회대중당은 민족자주노선에 기초한 민주주의적통일국가창건을 당면과업으로 삼았고 짧은 기간안에 200여개의 산하단체들을 망라하며 6만여명을 당원으로 조직했다. 사회대중당은 1961.2.25 광범위한 민주주의역량의 통일전선체인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을 결성하고 각계각층민중들의 자주통일투쟁을 지도했다. 사회대중당의 지도밑에 청년학생·민중들은 <가자북으로,오라남으로,만나자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외치며 조국통일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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