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군사파쇼독재는 1987여름 종말을 고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은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중요계기였다. 5.27 출범한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주도로 통일민주당을 통합한 반파쇼민주전선이었다. 전두환은 6.10 민정당대선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했고 같은날 국본은 전국22개도시에서 24만여명이 참여한 <박종철군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및민주헌법쟁취를위한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범국민대회가 진행된 6.10밤부터 6.15까지 계속된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부대>시위는 6월항쟁을 대중적항쟁으로 전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18 <최루탄추방대회>에는 6.10 범국민대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으며 이후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대됐다. 6.26 <국민평화대행진>은 6월항쟁기간 중 최대규모시위였다. 대중적개헌투쟁은 점차 군사파쇼정권을 무너뜨리는 반파쇼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500여만명이 항쟁에 떨쳐나서자 전두환정권은 군사독재연장음모인 <4.13호헌조치>를 철회하고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을 발표했다. 전두환정권의 배후였던 미레이건정부는 남민중의 투쟁을 군사파쇼로 통제할수 없게 되자 기만적인 개량화조치로 전환했다. 6월항쟁의 가장 큰 성과는 노동자들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나선것이다. 87년노동자대투쟁은 1987.7.5 울산 현대엔진에서 현대계열사 최초의 노조결성으로 시작됐고 삽시간에 울산의 현대계열사 전체로 확산됐다. 7.15 현대미포조선, 7.27 현대중전기, 8.1 현대정공에서도 노조가 결성됐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울산을 시작으로 마산·창원·거제를 거쳐 경기·인천·강원·대구경북·광주전남등 전지역과 전산업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1987.7~9 발생한 파업건수는 총3311건, 하루평균40건으로 3달동안의 파업건수가 지난 10년간 파업건수의 2배, 참가자수는 5배나 됐다.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어용노조의 민주화와 새로운 민주노조결성이 잇따랐다. 1986 2700여개노조 약100만명의 조합원은 1987.12.31기준 4000여개노조 약120만명으로 불과 몇달사이에 1300여개노조와 20만명이상이 증가했다. 87년노동자대투쟁은 노동운동이 대중화되는 분기점이 됐다. 노조는 1989 7900여개로 늘어났고 조직노동자수도 20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자기사업장범위를 넘어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를 조직하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업종회의(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를 건설했다. 이성과를 바탕으로 1995 노동자들의 총연합체인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됐다.